< 142. 파견 임무 : 빙어 낚시 >
*
장구류를 챙겨 이단심문청을 나서기 전에, 레이아는 준비할 것이 있다며 먼저 떠났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항구에 함대를 입항 하겠다고 전달하곤 떠났다.
이단심문청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항만은 페이른 왕실의 메를린포트였다. 페르난데스는 마구에 행낭을 걸며 투레질하는 말을 바라보았다.
“메를린포트라, 오랜만에 가는 길이겠군.”
“아, 제피스 형제님.”
마구간에 제피스가 들어와 모포에 쌓인 짐을 던졌다.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받고는 안을 살폈다. 여행 도구들을 더 챙겨주시려는 건가? 페르난데스가 모포를 걷자 열자, 라운드 실드가 있었다.
“방패···?”
“이제 형제는 방어구를 챙겨야 하지 않겠나? 몸으로 때우는 것은 디모니카의 방식이 아닐세.”
“···어. 그랬던가요?”
대체로 몸으로 때우는 것만 봐왔던 페르난데스는 당황했다. 제피스는 피식 웃더니 방패에 턱짓했다.
“마르코 형제님이 아주 오랜 시간 축성하고, 마르티리오 형제가 며칠간 대장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야장들과 만들어낸 성물일세. 살펴 보게나.”
말 그대로 수많은 형제들의 피땀이 어린 방패나 다름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살짝 감동하며 방패의 뒷면을 보았다.
-대황야의 성자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속세의 홍진을 빗겨갈 수는 없어도, 악적의 암수에 해함 없기를.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요? 개인 병장기 소지 허가가 나온 겁니까?”
“어차피 그것 말고도 많지 않나. 뭐 별일이라고.”
데인 왕의 검과 베이타서스의 열쇠검, 이 두 병장기는 무기고에 기증하지 않고 그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고, 다른 이단심문관들은 이를 알고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방패를 왼손에 차며 무게를 가늠했다. 세인트메탈로 마감한 강철 방패의 묵직한 무게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시대 최고의 유물이라 할 수는 없다네. 하지만 쓸모 있는 병기일세.”
“방패 하나를 만들 때 녹여야 하는 세인트메탈의 양을 생각해보면, 쓸모 정도였겠습니까.”
이단심문청의 물자 부족을 고려할 때 방어구에 세인트메탈을 투자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이들의 병장기는 대부분 작전 도중 파괴되곤 하며, 이를 유지 보수하는 것에도 대단히 많은 자원이 소비되었다.
방패 하나를 재련하기 위해 드는 철괴라면 장검 세 자루는 더 벼릴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제피스가 픽 웃었다.
“점점 더 엔마기카 같이 생각하는군. 형제. 잔말 말고 들고 가게. 어차피 무를 수도 없다네.”
“안아 드릴까요?”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게.”
“하하하.”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마구 위에 올라탔다. 말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박차를 건드리자,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제피스가 조용히 묵념하는 것이 보였다. 성하 대로변엔 이미 말을 탄 아벨과 키르하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 책임자로서 상부에 보고해야 할 것들이 남아 뒤늦게 출발한 탓이었다.
“추웠을 텐데, 오래 걸렸군.”
“아니, 용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
“음··· 음. 수인족도요···.”
키르하스는 코끝까지 빨갛게 물든 얼굴로 훌쩍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수인족은 추위에 대단히 약한 종족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다각.
세 마리의 말이 이단심문청 성하 대로변을 내려가 숲 저 아래로 나아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새벽이었다.
*
메를린포트는 인퀴지션 킵에서 마보로 사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페르난데스 일행은 말 위에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고, 그 덕에 이틀 밤을 지새워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추위와 피로, 허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심지어 아벨마저도 이틀을 지새우며 달리는 여정엔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메, 멜, 메를린포트다!”
키르하스는 언덕 아래로 저 멀리, 수평선과 그 끝에 있는 항구 도시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눈이 내리는 겨울 바다는 몽환적이었다.
눈발이 소복이 쌓인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며, 페르난데스는 뜨겁게 달아오른 말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푸르륵.
거품을 문 말이 헐떡이며 달렸다. 목적지가 보인 탓인지 키르하스와 아벨의 컨디션이 다소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얼굴에 부딪치는 눈송이들을 쓸어내며 크게 숨을 쉬었다.
‘피곤하군.’
-이리 급하게 준비할 이유가 있었더냐?
‘겨울철 노숙은 힘들어. 차라리 짧게 더 고생하는 편이 낫지.’
디모니카의 육신은 사흘 밤을 지새워도 성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벨은 지금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키르하스는 심지어 젊은 여인의 몸이다.
이 둘에게 겨울철 노숙을 시키느니, 차라리 그는 박차를 가하는 편을 택했다. 페르난데스는 점점 다가오는 메를린포트의 입구를 바라보며 마보의 속력을 줄여 나갔다.
-푸륵.
말이 고개를 흔들며 힘겹게 헐떡였다. 성문의 시티 가드들이 그들을 보며 창을 살짝 들었다.
“정지, 정체를 밝히시오.”
“성 요한 기사단 안젤로. 이쪽은 내 종자들이다.”
“실례했습니다. 안젤로 경. 겨울철에 편력 여행을 하는 기사님은 처음인지라.”
“고생이 많군.”
겨울은 행상의 왕래가 줄어드는 계절이었다. 거대한 항구 도시인 메를린포트도 이 시기엔 다소 한산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품속에서 기사단 인증서를 꺼내 건네자 시티 가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젤로 경.”
“경비가 엄하군. 요즘도 도시에 괴물이 나타나나?”
“아, 작년에도 오셨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사건 이래로 메를린포트의 검문을 강화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던지라.”
“현명한 처사군. 끔찍한 사건이었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죠. 다신 일어나선 안될 일입니다.”
시티 가드는 침통하게 끄덕이더니, 창을 옆으로 치워 길을 텄다. 페르난데스와 일행은 그 사이를 걸어 메를린포트 안으로 들어섰다.
*
레이아와 접선하기로 약속한 곳은 메를린포트의 [하늘 실프 여관]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급 여관의 외견을 보며 빙글거리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곳에 묵으시네요?”
“그래. 잠입 임무가 아니니까.”
“옛날 생각 나고 좋았을텐데요. 별과 인어 여관도 나쁘진 않았어요.”
키르하스의 농담에 페르난데스가 피식 웃었다. 광랑증 연쇄살인사건과 리치, 그리고 워커 사태까지. 메를린포트를 거의 절반 이상 불태우며 벌였던 지난 작전이 떠올랐다.
키르하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여관의 시종이 황급히 뛰어나와 고개를 숙이고 고삐를 받아 쥐었다.
“어서오세요! 묵고 가시나요?”
“그럴 것 같군. 일행이 하나 있을텐데.”
“잠시···. 기사 나리, 예쁜 숙녀님 둘···. 아! 그 엘프 손님의 일행이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로비로 가 보세요! 식사하고 계실 거에요!”
“고맙구나.”
페르난데스는 시종에게 동편 반 닢을 던져주고 스윙 도어를 열었다. 왁자지껄한 여관의 로비와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간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겠구나.”
“이 시기에 고기 요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소. 해산물은 좋아하시오?”
“싫어했다면 내가 해안에 묻혔겠느냐?”
아벨은 부드럽게 웃고는 페르난데스를 따라 걸었다. 로비로 향하니, 주위 인파들의 시선이 잠시 페르난데스와 일행에게 닿았다.
‘확실히 눈에 띄는 조합이야.’
아벨은 화려하게 빛나는 미녀고, 키르하스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주위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형제들이 호색한이라고 놀리는 이유가 실감이 나는군.’
-그렇게 우쭐대지 말아라. 이 가벼운 녀석아.
페이자쉬가 투덜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겨울철 점심나절의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다. 고풍스러운 악단이 기운 없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가장 호화로운 테이블에 온갖 산해진미를 늘어놓고. 레이아가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달그락.
테이블 위에선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떠돌았다. 페르난데스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아벨과 키르하스는 아주 오랜만에 먹는 요리다운 요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편 레이아는 연신 회중 시계를 꺼내 힐끔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여관을 잡았는지 아느냐?”
“고급 여관이라서?”
“그것도 이유는 될 수 있지. 이제 나는 여왕이 아니냐. 사치를 조금 부리는 것은 오히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의 문제다.”
레이아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페르난데스는 고기를 작게 잘라 입에 넣고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여기선 바다가 보이는 탓이다.”
레이아는 창 밖을 손짓하며 말했다. 성긴 눈이 흩날리는 창 밖으로 넘실거리는 검은 바다가 보였다. 이 여관은 항만의 정면에 있었고, 메를린포트 항구 거리의 가장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다. 식사를 서둘러라.”
레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완벽한 테이블매너로 요리를 해치우던 아벨도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부우우우···.
저 멀리에서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곧—
-뎅! 뎅! 뎅! 뎅!!
-항구로!! 항만으로 가라!!
씨가드들이 뛰어다니고, 종탑의 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디모니카의 육안으로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눈발 사이로, 저 멀리에. 수평선의 끄트머리에—
-적습이다! 적습이다!!
-모두 위치로! 포격을 준비해라!!
-부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이아를 돌아보았다. 레이아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청에 미리 고지한 것 아니었소?”
“절차가 복잡하더구나.”
시청 공무원들은 레이아의 말에 난색을 표하거나,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나왔다. 그들이 귀찮은 티를 내며 건넨 입항허가서 조항을 모두 따르면 일주일은 걸렸을 것이다.
레이아에게 그렇게 여유 부릴 시간 따윈 없었다. 그 대신, 그녀에겐 북해상 최강의 황금 함대가 있었다.
-부우우우—!
이번에 들려온 소리는 뿔피리 소리가 아니었다. 묵직하고 뼈를 떨게 만드는 저음의, 거대한 소음이 항만을 덮쳤다. 엘프의 뱃고동 소리였다. 입항 허가를 요청하는···.
“내가 그 공무원들에게 내 정체와 내가 묵는 곳을 알렸으니. 자, 이제 놈들이 아주 멍청이들이 아니길 바래 보자꾸나.”
“레이아 여왕,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소?”
“일족의 왕으로 군림하려면 권위가 있어야 하거든. 소탈한 것은 오히려 독이다. 내 백성들의 자긍심이 걸린 문제가 아니냐.”
레이아는 훗, 하고 웃었다. 그와 동시에 여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씨가드들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하하, 멍청이들은 아니었구나.”
“그, 그대가 레, 레이아 핀 가이메른 여왕이시오?”
“여왕 ‘폐하’.”
“여, 여왕 폐하십니까?”
“그래.”
창백하게 질린 시청 귀족들의 얼굴을 보며 레이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나른한 몸짓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씨가드들이 위협적으로 창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검지 손끝을 칼자루에 얹었다.
“무례하구나.”
-스겅.
칼날의 발도, 그리고 납도까지 걸린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저 잠시 번뜩이는 섬광을 제외하고서, 이 자리에서 그녀의 검격을 본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한결 더 정순하고 깔끔해진 그녀의 검격에 감탄했다. 곧 씨가드가 들고 있는 창날이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공무원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메를린포트는 왕실 조폐공사가 있는 핵심 무역항이었고, 심지어는 워커 사태로 도시 기능이 정지된 후 회복하는데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제 갓 성장세를 타고, 새로 열린 인퍼머르 북해 무역로로 다시금 발돋움하려는 이 시점에서 엘프 군함들이 도시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내 함대에게 안내해라. 그리고 너희 병사들에게 일러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조용히 떠나겠다고.”
걱정하지 말거라. 레이아는 귀족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걸어갔다. 그녀를 포위하듯 도열한 씨가드들이 겁에 질려 옆으로 비켜섰다.
이 여관은 항만으로 향하는 대로 가장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호리호리한 레이아의 체구 너머로, 쏟아지듯 들어오는 거친 겨울 바닷바람을 흘리며—
-촤르륵.
은발이 시린 북방의 해수면처럼 일렁이고, 그 밖으로. 수평선을 가득 채운 대함대가 인접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우우우!!!
뱃고동이 항만에 울려 퍼졌다. 씨가드, 시민, 항만 잡부, 그리고 귀족. 너나 할 것 없이 혼비백산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
페르난데스는 얼굴을 감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아가 찬란하게 웃었다.
“너희 왕국의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나의 왕국으로 초대하지. 이단심문관. 즐거운 선상 여행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