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미끼와 미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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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의 기함에 승선한 것이 사흘, 페르난데스는 이제 선박이 원양의 파도에 흔들리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여전히 미음만 간신히 삼킬 뿐, 헛구역질을 하며 어디론가 달려가버렸다.
-끼이이익.
뱃전에 파도가 닥칠 때마다 갑판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겨울 바다가 배를 뒤흔들고 있었다. 선창 아래의 선실은 뱀의 창자처럼 꿈틀거려, 밖을 바라보지 않으면 중력 감각이 뒤흔들렸다.
“제법 빠르게 익숙해지는군. 인간들은 으레 보름은 앓던데 말이야.”
레이아는 시원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가이메른의 기함은 완파되어 인퍼머르 앞바다에 좌초되어 있었고, 너무나 거대한 선체의 크기 탓에 인양 작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기함은 보다 작은, 인간 기준에선 여전히 압도적인 크기였지만 그럼에도 ‘바다 위의 성’이라 부르기엔 턱 없이 작은 범선이었다.
레이아는 병장기와 나침반, 그리고 해도가 걸려 있는 선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녀는 선장실의 해도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너도 들어, 이단심문관. 원양에서 차는 구하기 힘든 거야.”
“고맙게 마시겠소.”
“하하, 그래. 항해 경험이 있었나?”
“처음이오만.”
“놀라운 적응력이야. 디모니카의 육체가 있었기 때문인가?”
레이아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녀는 섬세하게 깎은 나무판자를 가리켰다. 나무판자는 시시각각 그 위에 음각된 그림이 변하고 있었다.
강력한 고대의 유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판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북해의 해도야. 어디에 뭐가 있든, 내가 찾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의 위치를 가르쳐주지. 별자리와 해류, 그리고 목적지까지. 엘프의 고어를 모르면 해석할 수 없으니, 그리 봐도 소용이 없어.”
“이게 말레이른의 기함이오?”
“···이거 기밀을 들킨 기분인데?”
레이아는 눈을 빛내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언제나 예상 외의 것을 입에 담곤 했다. 선왕, 영원왕 가이메른의 어전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랬다.
“학식이 깊은 수준으로 표현할 일이 아닌데?”
“우연히 익혔소.”
“상고 엘프어를 우연히 익히셨다?”
페르난데스는 미소 짓는 레이아를 바라보며 홍차를 마셨다. 페이자쉬였던 시절, 그는 [베레일데 학파]의 마법을 연구했던 적이 있었다. 고대 엘프 오왕국 시절의 마법, 멜리실두르의 여명을 포함한 엘프들의 비전을.
그 시절의 일이다. 더 많은 마법을 익히고 더 강력한 힘을 구가하기 위해 그가 가졌던 집착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고, 그 결과가 그를 엔소서리 학파의 대종사였다.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군.
페이자쉬가 투덜거렸다. 강대한 마법, 수많은 주문, 위대한 주언과 놀라운 순발력. 현대 마법전의 최강자. 이러한 평판은 먼 미래에 두고 왔고, 그 미래는 지금의 페르난데스에겐 결코 다가오지 않을 시간선에 있다.
페르난데스는 경계심에 눈을 빛내는 레이아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대가 이단심문청의 대서고에 들어오면 놀랄 만한 지식들이 있을 거요. 이단심문청은 대륙의 금서들을 봉인하는 역할 또한 겸하고 있으니.”
“아 그래. 넌 베레일데 학파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
어쩌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야 했어. 레이아는 경계를 풀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해도의 일렁거리는 거대한 탑을 가리켰다.
“네 말이 맞다. 이단심문관. 여기에 말레이른의 기함이 있지. 놈들은 벌써 며칠째 이 해상에 정박해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우리 초계함대가 몇 차례 놈들의 전선을 두드렸지만, 큰 성과는 없었지.”
“기함 탓에?”
“그게 아니면 뭐겠어? 가이메른의 황금함대는 여전히 해상 최강이야. 엘프 트라이던트 중에 가장 많은 인구와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레이른의 기함을 제외하면, 나머지 놈들은 피라미에 불과해.”
해도 위에선 거대한 탑을 기준으로 작은 점들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레이아는 점들의 행렬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놈들의 움직임을 봐. 저 지역에서 뭔가 꾸미고 있어. 놈들이 이 북해에 올라온 이유가 아마도 저기에 있을 테지. 우리가 아무리 공세를 펼쳐도, 놈들은 반격만 할 뿐 전세를 뒤흔들 생각조차 하지 않아.”
만일 말레이른의 기함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면, 레이아는 전략을 바꿔 지연적인 소모전을 펼쳤을 것이다. 말레이른의 기함은 해상에서 무적이지만, 그 안에 타고 있는 선원들은 먹고 자고 쉬어야 하는 일반 엘프들이었으니.
그렇게 계속 두드리고, 신경을 자극하고, 이따금씩 반격해오는 것들을 처리하고, 기함과의 전면전만은 확실히 회피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른의 기함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서서, 그저 무언가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끔찍하게도 불안했다.
“놈들의 목적은 예로부터 하나였어. 신들을 사냥했지.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해상에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는 없어. 나와, 우리 민족과 함께하시는 멜리실두르 님을 제외한다면. 북해상엔 신성이 없다.”
“아니, 있소.”
“뭐?”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북해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원양 원정은 처음이었고, 바다 사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신학은 그의 주종목 중 하나였다.
“대해의 신 맥러렌의 아들이 있소. 파도의 대공 키안. 그 자의 거처가 이 해저 어딘가에 있을 거요.”
“···어떻게 알지? 북해에서 나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건 믿기지 않는데.”
“사제들은 신학도요. 맥러렌의 세 자식 중 유일하게 이 시대까지 살아있는 자식이 파도의 대공 키안이오. 하지만 이 시기에 죽을 신이 아닌데···.”
파도의 대공 키안, 엘프 삼왕조가 실종된 이후 인퍼머르를 중심으로 해상을 장악한 프란츠리트 혈족과 전쟁을 벌인 해신이다. 선신 만신전에 소속되진 못했지만, 신격을 가진 소신(小神)중 하나였다.
엘프들의 신성 사냥은 전생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으나, 엘프들은 해저에 잠수할 능력이 없었다. 해저에서 잠자던 키안을 깨운 것은, 호흡곤란으로 죽을 일도, 심해의 냉기에 몸이 굳을 일도 없는 언데드들이었다.
키안은 물질 세계 최후의 대전쟁이 다가온 시점에서 깨어나, 프란츠리트 혈족을 포함한 흡혈귀 대귀족들과 동귀어진하고 장렬하게 산화한 신이었다.
그 말은 곧, 이 시기에 엘프 삼왕조의 탐색망에 걸려들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어디서부터 바뀐거지?’
-예측하는 것이 의미 있나? 너무 이유가 많아서 문제지.
‘적어도 누군가가 말레이른에게 키안의 존재와 위치를 누설했어. 어떻게? 누가 어떻게 키안의 존재와 위치를 이렇게 정확히 알고 말레이른에게 조언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엘프는 아니겠지.
‘흡혈귀도 아니야.’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찡그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전생의 엘프들은 결코 알 수 없던 정보였다. 놈들이 사냥한 신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중에 키안은 없었다.
전생의 엘프들이 끝까지 알지 못했던 정보를 이제와 깨달았다면. 그건 전생 이후의 시간선이 변하며 발생한 변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적어도 엘프는 아닌 존재에 의한 변수.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정보는 과하게 부족했고, 놈들이 키안을 깨우는 것에 성공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불확실성은, 페르난데스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안개 낀 체스판을 바라보는 감각으로 해도를 노려보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놈들은 무려 맥러렌의 아들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거군?”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일족이 바다의 신을 분노하게 만들 짓을 자행한다는 것은 퍽 우스운 일이었다. 레이아는 차를 홀짝였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저지르려 한다는 거겠지.”
“놈들의 목적이 종족의 저주를 풀어내는 것이라면 그럴 것이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신학도이자, 마법사이자, 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어린 인간으로서 대답해봐.”
“말레이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지 못하는 이상, 가정은 무의미하오.”
페르난데스는 잠시 말을 삼키고는, 새로운 가정을 떠올렸다. 전생의 엘프들은 한 순간 지상 위에서 소실되었다.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신의 땅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세 명의 영원왕들은 엘프 만신전에 직접 침입한 적이 있다.’
만일 저주를 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순하고 직관적인 목적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수평 차원을 넘어, 또 다른 차원으로 향해. 대륙의 저주가 없는 땅을 밟고자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면···. 그 차원이 내가 온 차원일 수도 있다는 것.’
이미 지옥이 승리하고, 온 세계가 불타오르고, 대기가 지옥 마력에 오염된 그 세계선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버린다면···.
‘베이타서스의 역천은 반드시 실패한다.’
베이타서스와 선신 만신전의 역천 계획은 불의의 기습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역천 계획의 핵심은 본산 세계의 대악마들이 이 수평 차원의 세계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
지금까지 모은 신성을 소모해 만신전이 만들어둔 이 차원의 벽을 허물고, 이 세계로 향하는 문이 잠시라도 열리면.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본산 세계의 악마들은 반드시 눈치챌 터.
“레이아. 말레이른의 기함까지 닿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평균 항행 속도로 사흘은 더 걸릴 거야. 놈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면.”
“조금 더 박차를 가해야겠소.”
“서두를 필요가 있나?”
“확인해 보아야 하오. 기함의 방어 수준, 보호 주문들을 파괴할 방법. 그리고 놈들의 목적···.”
-쿠르르릉!!
거기까지 말했을 때, 선장실의 창에 뇌전이 흘렀다. 저 멀리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바다에 한 순간,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갔다.
-끼이이익. 끼익!
파도가 뱃전을 후려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선실이 요동치고, 배가 기울었다. 커다란 파도를 타고 오를 때면 으레 이랬다. 마치 대지가 뒤틀리는 감각에 페르난데스가 눈살을 찌푸릴 때—
“이런···?”
레이아가 깜짝 놀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빨리 허릿춤에서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그녀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엎드려, 이단심문과—!!”
-콰아아아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선실의 가구가 기울고 각종 서적이 쏟아졌다. 테이블 위의 찻잔과 다기가 바닥에 쏟아지고,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몸을 굴려 자세를 잡았다.
-콰아앙! 콰앙!!
선박이 급격하게 흔들리며 벽과 바닥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어느새 그들은 반쯤 기운 상태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온갖 집기들이 사방에 떠다니고 튕겨나가며 깨지고, 부서졌다.
-콰아아앙!!
“적습이다!!”
레이아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바닥을 차고 도약해 방향을 잡았다. 신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의 절반 이상을 바다 위에서 보낸 이 특유의 움직임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간신히 자세를 잡고 어느새 천장이 된 창을 바라보았다.
태산처럼 밀려드는 검은 바다, 사방에 흩날리는 폭풍, 우박, 젖은 진눈깨비. 그리고—
-콰르르릉!!
벼락이 바다를 지지고, 그 심연 깊은 곳을 한 순간이나마 밝게 비쳤다. 저 아래에—
디모니카 특유의 동체시력 덕이었을 것이다. 아니, 준신의 영역에 도달한 그의 육체 성능이 발견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저 깊은 바닷속. 검은 심연 속에서. 벼락이 내리 쪼일 때 망막 안에 남는 작은 잔상. 붉은 눈과 심해 아귀와 같은 거대한 입. 벌어진 틈 사이로 늘어선, 면도날 같은 송곳니—
‘흡혈귀다.’
-프란츠리트!
퍼즐이 맞춰진다. 인퍼머르를 빼앗기고 거점을 잃은 프란츠리트와, 신을 사냥하고 싶어하는 말레이른. 그 둘의 이해가 닿고—
말레이른이, 잠들어 있는 강력한 신성의 위치를 알아내는 대가로 프란츠리트에게 인퍼머르와 일족의 부흥을 약속했다면.
“키르하스—!!”
“네, 은공!!”
-와장창!
문이 박살나며, 키르하스가 뛰어들어 대검을 집어 던졌다. 페르난데스는 뛰어올라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그 궤적에 자신을 맞추고—
‘가이메른 왕조를 끌어들인 것은··· 미끼!’
키안의 존재? 그를 깨워내 신성을 빼앗으려는 계획? 그것은 차선이었다. 놈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레이아와, 그녀의 일족이 품고 있는 멜리실두르의 영혼!
그리고 프란츠리트가 원하는 것은 북부 해상의 장악과 일족의 부흥.
‘해상 최강의 병력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같은 수준의 전력이 필요하다.’
인퍼머르 사태 때, 프란츠리트가 시도한 계략은 내전이었다.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페르난데스의 개입으로 인해 혈족 자체가 멸족할 위기에 처해졌지만.
흡혈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병과 같아 쉽게 퍼져나가고, 빠르게 성장한다. 놈들은 새로운 계략을 짜냈다. 왕조 내부의 내전이 아니라, 종족 자체의 내전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
바다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심연 속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마법이다. 전언, 아주 짧게 속삭이는 수준에 그치는 간단한 마법—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고.”
서펜트아일스의 송곳대공. 릭터 반 프란츠리트는 심해 속에서 웃으며 그에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