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착수 >
*
바다의 밤하늘은 깨끗하고 서늘했다.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 아래에서,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마력등에 번들거렸다.
-촤아아악!
도선을 시도하던 흡혈귀가 조각나 쓰러졌다. 뎀드 원과 구울들이 해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해상에서 군함은 요새와 같았고, 이것은 선상에서 치뤄지는 일종의 공성전이었다.
“죽어라, 피 주머니들아!!”
-촤악!
흡혈귀들의 젖은, 끈적한 비명이 온 바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바닥에 곧게 박은 채 잠시 숨을 돌렸다. 저 멀리에 키르하스와 아벨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프 와일드프린스들은 함상 전투의 전문가들이다. 그에 반해 흡혈귀들은 맹목적으로 달려들 뿐이었다. 그들이 압도하는 것은 오로지 물량 뿐이었지만, 이런 적은 면적의 전장에서 물량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게 끝인가?”
레이아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자세를 잡으며 눈을 빛냈다. 스겅, 짧은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이고. 그녀의 눈 앞에 달려들던 흡혈귀가 양단되어 쓰러졌다. 그녀는 언제 뽑았냐는 듯 칼을 납도한 상태로 주위를 살폈다.
“정말 이게 다라고? 기습이라 할 만한가 이게?”
레이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괴성을 지르는 뎀드원을 바라보았다. 박쥐와 고대 괴수, 그리고 인간의 시체를 조악하게 뒤섞은 형상의 덩치 큰 괴물이었다.
그 힘과 덩치는 트롤에 육박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는 점까지 더해진다면 트롤보다 위협적인 괴물이다. 그러나—
-스겅.
칼자루에 올라간 검지 손가락이 한 순간 사라지고, 다시 괴수의 몸이 양단된다. 레이아는 끈적하게 반으로 갈라지는 뎀드원의 시체를 무시하고 다음 상대를 찾았다.
고작 썩은 시체 몇 구, 고작 나약한 흡혈귀 수 개체, 고작해야 트롤 정도의 괴수 뿐이다. 단지 이 정도의 물량과 구성으로 감히 가이메른의 황금함대를 넘보려 했단 말인가?
-투우웅···.
그때, 레이아의 귀가 쫑긋 섰다. 페르난데스 또한 날카롭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좌현! 회피 선회!”
-끼이이익···.
선창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던 선상 마법사들이 일제히 수인을 짚었다. 미리 준비되었던 탓에 대응은 신속했다. 근방의 모든 배들이 마치 미끄러진 것처럼 흩어지고—
-촤아아악!
그 사이를 뚫고, 거대한 투창이 바다 아래에서 솟구쳤다. 물방울이 폭포처럼 비산하고, 강력한 힘이 담긴 녹슨 투창이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놈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레이아는 재빨리 장루를 타고 올라가며 허릿춤에서 뿔나팔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흩어진 군함들을 향해 외쳤다.
“기함 기준 동북 7시 300미터, 해저를 향해 발포하라!!”
엘프들은 장생족이며, 그 긴 시간 자연스레 자신의 업무에 전문가가 되기 마련이었다. 전투 요원들은 효율적으로 공성전을 지속하고, 항해사들은 순식간에 포격을 준비했다.
모든 업무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진행되고 있었다. 곧 귀청을 찢는 포성과 함께 함포가 일제히 바다를 때렸다.
폭약이 심어진 폭발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게와 힘만을 담은, 강력한 철갑포가 해저를 향해 빗발쳤다.
포성과 함께 흡혈귀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첫 습격 이후 나흘 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
“지연전이고, 퇴각전술이야.”
레이아는 회의실 옥좌에 앉아 해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함장 하나가 손을 들었다.
“폐하, 놈들은 우리가 피로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매일 밤 교전으로 병사들의 소모가 점차 심해지고 있습니다.”
“교전을 회피할 방법이 있나?”
“적어도 사전에 차단할 수는 있습니다. 이제 적들의 접근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밤이 되면, 엘프 마법사들이 해저에 하수인들을 포진시키는 감시 체계를 만들었다. 프란츠리트의 기함은 해저 먼 아래에 숨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놈들이 가시적인 거리까지 접근한 이후부터는 엘프들도 도함을 대비할 수 있었다.
해저를 향한 수차례의 포격 끝에, 놈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만 포격전을 시도했다. 놈들의 전술은 함대전에서 도함 백병전으로 변하고 있었다. 기습은 기습일 때에만 효과적인 법.
함대 포격전에서, 레이아의 황금 함대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북해상 최강 함대라는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으니.
“그래서, 놈들이 접근하면 화망을 뿌리자?”
“말레이른과의 일전이 목전에 있는데, 흡혈귀 따위에게 병사들이 더 이상 소모되어선 안됩니다. 폐하.”
“우리의 자원이 그렇게 넘쳐나던가, 장군?”
레이아가 재무대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무대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과 같은 교전을 반복한다면 닷새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보급을 위해 피항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말레이른의 기함에 충각전이라도 벌일 것이 아니라면, 화력을 보강해야 해. 그런 와중에 흡혈귀에게 포환을 모두 낭비하자? 좋은 의견이로군.”
“놈들의 자원 또한 무한하지 않습니다.”
포격전으로 손상을 입는 것은 엘프 함대 뿐만이 아니었다. 프란츠리트의 함선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었으나, 놈들의 포격이 점차 드물어지고. 지난 밤엔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놈들 또한 함대전에서 선박, 또는 공격 수단을 손실하고 있었다. 놈들의 공격 수단이 거대한 작살포라는 것을 고려할 때, 적재와 수급이 여유로울 리가 없었다.
“놈들의 공격은 파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폐하, 하오면 더 이상 병력이 소모되기에 앞서 말레이른을 치는 것은 어떠할런지요?”
대신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병력의 소모를 고려할 때 현명한 방안인 것 같았으나···.
“놈들을 꼬리에 달고 양면전을 벌이자는 뜻인가? 대단히 유리한 전투가 될 것 같군. 우리에겐 아직 서펜트킹의 기함을 파괴할 수단이 없다.”
“그걸 확보하기 위해 저 인간을 포섭한 것이 아닙니까.”
“그랬지. 자, 이단심문관. 네 의견을 말해봐. 어떻게 생각하지?”
레이아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와 잠시 눈을 맞추고, 천천히 대신과 장군들을 둘러 보았다.
반발, 혐오, 호기심이 느껴졌다. 인간에 대한 적의 또한. 그러나 레이아는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항구로 돌아가 물자를 보급해야 하오. 그 전에 말레이른의 기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군. 내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어떻게 그것을 파괴할 지 판단하기 위해선.”
“박쥐들을 두고 도망치자?”
“놈들은 우리의 당면한 적이 아니오.”
“놈들이 괴멸한 지 이제 고작 일 년이 지났어. 고작 그 일 년 만에 저 정도의 병력을 수복했는데, 놈들에게 더 시간을 주자는 뜻인가?”
대신들이 웅성거리자 페르난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아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책상을 탁 쳤다.
“반대로 생각해, 놈들에겐 고작 1년 뿐이었어. 놈들의 공세는 인퍼머르때와 같지 않다. 놈들의 병력 대부분은 몸이 불어 느릿한 구울들 뿐이야. 놈들은 약해졌어. 지금이 프란츠리트를 처단할 유일한 기회야. 마법대, 적들의 위치는?”
레이아는 로브를 입은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잠시 수인을 짚고 눈을 감았다 떴다.
“놈들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왕님.”
“여전히 놈들의 선박은 한 척만 보이나?”
“예, 더 이상 놈들에게 접근할 수는 없지만···. 다른 선박들은 파괴되었고, 놈들은 워커들의 힘으로 해저면에서 기어가고 있습니다. 저희보다 빠르진 못하지요.”
“미개한 것들.”
궁중 마법대의 장로가 보낸 하수인이 놈들의 후미를 미행하고 있었다. 두 번째 급습 이후 레이아는 놈들의 함선 근방에 하수인을 배치했었다.
릭터에게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하수인은 먼 거리에서 릭터의 기함을 감지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놈들은 함선을 인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력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들에게 닿을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 어려울 뿐.
“놈들의 기함은 교전 시에만 부상해. 놈들의 함포 사거리는 형편없지···. 누군가가 미끼가 되어야 한다.”
“교전을 계속하시겠다는 뜻입니까?”
“프란츠리트는 말레이른과 합작했지만, 놈들이 말레이른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건 놈의 오만이고 패착이다. 놈들을 꺾고, 재보급 이후에 말레이른과 교전을 시작할 거야.”
페르난데스의 말에 레이아가 대답했다. 레이아는 천천히 해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말레이른의 기함은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저 개자식이 뭘 노리고 북해상에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에게 뒤늦은 후회에 대해 알려주어야겠군. 제군들. 며칠만 더 고생하도록 하지. 승전 파티는 궁중에서 책임질 테니.”
*
선실 책상엔 필기구와 낙서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은공, 부르셨나요?”
선실 격문이 열리며 키르하스가 들어왔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돌리자, 키르하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의 곁에 다가와 그의 앞에 늘어진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밤새 격전이 있었는데, 쉬시는 편이 어떠신지요? 당장 오늘 밤에도 교전이 있을 겁니다.”
“키르하스, 아주 은밀하게.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그의 말에 키르하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하명하세요.”
“지금 여왕과 대신들은 복수심에 맹목적으로 타오르고 있어. 우린 다른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레이아의 말이 옳긴 합니다. 대적을 앞에 두고 배후에 위협을 남겨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 하지만··· 이걸 봐라.”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전술적 안목을 믿었다. 그녀의 재능은 전투보다 야전사령관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녀의 재주는 개화하고 있었다.
불패자 키르하스의 전술적 시야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커다란 두루마리를 펼쳤다.
복잡한 숫자와 기호들이 늘어선 거대한···. 일종의 지도였다.
“별자리와 천구의 위치로 계산한 우리의 항해 경로야. 우리는 지금 정확히 서북 290도 방향으로 직진하고 있다.”
거의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직선 항행하고 있었다.
“놈들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직선이동하고 있는 탓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총 세 번의 습격을 보거라. 보이느냐?”
항해 방향을 기록한 긴 직선에 붉은 점들을 가리키자, 키르하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향이 빗나갈 때 마다 추가적으로 공격했군요. 그리고 다시 같은 방향으로 도주하고요. 간혹 낮에 있었던 기습이 그럼···.”
“그래. 우리를 끌어들이는 중이다.”
“레이아 여왕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건 어떨까요, 은공?”
그녀의 말에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방향을 돌려 말레이른을 치자는 뜻이냐? 놈들은 오히려 좋아할 거야. 레이아의 말이 맞다. 이미 우리는 기호지세인 바, 놈들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놈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던, 적어도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자신이 있으니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선은··· 피항해 보급을 확보하는 것일까요?”
“더 큰 판을 보거라, 키르하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프란츠리트가 원하는 것이 지연전일 경우, 말레이른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 곧 끝나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퇴각하는 것은 놈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는 셈이지. 놈들이 바라는 것이 소모전이라면, 말레이른과의 교전이 목전에 있다는 뜻이고. 놈들의 계획이 함정으로 유인이라면, 우리와 전면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합니까? 외통수에 걸린 셈이 아닙니까?”
모든 전술이 적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산발적인 교전에선 압도적인 교환비로 승리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쫓기고 있는 것은 엘프 함대였다.
“그래 그렇지···.”
가이메른의 기함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프란츠리트는 인퍼머르 사태에서도 가이메른의 기함을 뚫지 못해 용을 부활시키려 했었으니까.
그 말은 즉, 해상에서 기습하는 프란츠리트에게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고 압도적으로 승리하려면 엘프 왕의 기함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북해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엘프 왕의 기함, 말레이른의 함선은 프란츠리트와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다.
‘적의 유일한 약점이 적에게 있다···. 이건 꼭 인퍼머르 당시 흡혈귀가 된 기분인데.’
페르난데스는 다시 천천히 해도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바다, 잠복한 적, 미지의 위협, 강대한, 난공불락의 해상 요새.
이 광경은 마치 체스와 같다. 퀸과 나이트를 떼고 두는 체스. 그에 반해 적의 기물은 그들의 두 배가 넘고, 적의 킹은 완벽한 보호를 받고 있다.
압박감과 긴장감, 전략적인 수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적들의 계략에 끌려가고 있는 여왕과 자신감에 가득한 오만한 장수들까지.
페르난데스는 살짝 입술을 핥으며 웃었다. 복잡한 논리 퍼즐처럼, 막막해 보이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답안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퍼즐이 좋았다.
“우리의 목적은 프란츠리트가 아니야.”
“하지만 놈들을 달고 말레이른을 어찌 도모하겠습니까?”
“그 말이 맞다. 레이아 여왕의 생각 또한 그렇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해도의 한 귀퉁이, 말레이른의 기함을 표기한 인장에 점을 찍었다. 동쪽, 멀지 않은 거리였다.
“레이아 여왕이 회의 때 한 말이 있었지. 누군가는 미끼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이 맞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미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란츠리트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
“오늘 밤에 있을 교전 때, 너는 혼란을 틈타 피난선 한 척을 확보해라.”
착수, 이 판도의 선수는 그가 아니오, 오히려 그는 기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다만 적의 킹을 보호에서 노출시키기 위한 와일드카드에 불과했지만.
단 하나의 룩도 킹을 잡을 수 있으며, 착수하는 순간에 그는 결코 한 가지 수에 몰두하지 않으니.
“놈들이 가장 바라는 미끼가 되어 주어야겠다.”
신성을 사냥하는 엘프 왕, 해저에 잠든 옛 신의 후예,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신성을 품고 있는 존재까지.
말레이른이 잠시 여력을 내어,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