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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46화 (147/388)

< 146. 공성과 수성의 경계면 (1) >

*

저녁놀이 지는 창 아래에서, 페르난데스는 청동 왕좌를 내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청동 왕좌의 마법은 하루 세 번이 한계였다. 과부하가 걸릴 때까지 무리한다면 다섯 번 까지.

그것도 대주문 수준의 강대한 수법은 쓸 수도 없었다. 그의 가장 강력한 패 하나가 묶여있는 셈이었다. 전생의 그는 수십 가지 대주문을 조합해 전황을 뒤집던 대마법사였으니.

그러나, 장인의 솜씨는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섬세한 세공에서부터 범인과 차이가 있는 법. 페르난데스는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실 한 구석에 늘어져 있던 행랑에서 녹색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마력석을 갈아 넣은 가루.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써보겠는가.

‘이건 말레이른의 기함을 파괴할 때 써야 하지만···.’

도박이란 으레 판돈을 크게 걸수록 더 큰 몫을 챙길 수 있으니. 페르난데스는 아낌없이 마력석 가루를 바닥에 쏟아 버렸다.

-사르륵.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것처럼, 녹색의 고운 모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페르난데스의 손가락이 허공을 짚었다. [작성].

사륵, 뱀이 또아리 트는 것처럼 모래가 일정한 방향을 그리며 선실 바닥을 휘몰아쳤다.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페르난데스는 그 한복판에서 재빨리 수인을 짚었다. [축조], [혼령].

-촤악.

그의 등 뒤에서 반투명한 팔이 뻗어 나왔다. 한 쌍의 영체 팔이 동시에, 전혀 다른 수인을 짚고,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그 가운데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르르륵.

모래가 기괴한 문양을 그리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심장 박동처럼 맥동하며 일렁이고, 휘몰아쳤다. 그 사이로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세 시간···. 오늘 아니면 내일, 릭터가 준비한 함정이 나타날거야. 가능성은?’

릭터의 습격과 엘프의 항행 거리는 지수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계산상 오늘, 아니면 내일. 여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그곳은 북방인들의 해역이고, 릭터가 굳이 그들을 자극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함대가 원양에 있을 때 작전을 개시할 것이다.

-8할 이상. 말레이른의 탐욕이 가이메른의 절반만큼만 된다면.

그리고 말레이른의 함대가 위치한 곳은 여기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떨어진 곳. 약 하루 거리에 있었다. 멀다먼 멀다 할 수 있는 위치지만, 말레이른이 ‘특정 조건 아래’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시도하기에 충분한 위치.

‘놈이 그보다 더 욕심이 많다면?’

-10할.

페이자쉬가 킬킬거렸다. 페르난데스는 따라 웃었다. 욕심과 이기심, 그런 요인들은 사람을 보다 단순하게 만든다. 가령 자신이 그리도 바라마지않던 것이 눈 앞에서 사라질 위기라면 더욱.

그것은 천여 년을 묵은 엘프와 흡혈귀 같은 괴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해가 저물기 무섭게 놈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선박을 타고 오르는 단순한 작전. 탁한 눈과 썩어 문드러진 얼굴, 그리고 소금물에 절어 부어 오른 몸으로, 그저 같은 족속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려는 행동들 뿐이었다.

“놈들을 밀어라! 저 더러운 발을 갑판 위에 올려두지 마라!”

레이아가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녀의 검이 한 번 칼집을 벗어날 때 마다 구울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바다 아래로 처박혔다. 그러나, 끝이 없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몰려들어 배의 선창 아래를 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만한 수를 만들었지? 얼마나 많은 피를 삼킨 것이냐, 릭터!”

-스겅!

구울의 목이 갈라지며 놈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너무 쉽다. 이젠 더 이상 뎀드원이나 고위 흡혈귀들이 나타나지도 않고 있었다.

‘고위 흡혈귀 혈족들은 인퍼머르에서 전멸했다!’

인퍼머르 한복판에서 터진 멜리실두르의 여명으로, 놈들의 병력은 일소되어 심연 아래로 가라앉았다. 릭터가 아무리 뛰어난 흡혈귀라 하더라도, 고작 일년 사이에 마련할 수 있는 병력이라곤 이정도가 전부였을 터.

‘놈은 바보가 아니야. 대체 이런 잡병들로 뭘 하려는 거지?’

*

심연의 저 아래에서, 붉은 안광이 타올랐다. 흰 곱슬머리가 바닷물 사이를 너울지고, 새하얀 송곳니가 이따금 내려앉는 달빛에 번들거렸다. 릭터는 해상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둔중한 소음을 들으며 웃고 있었다.

“대공.”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한 여인이 천천히 나타났다. 그녀는 달빛 아래에서 릭터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

그녀의 하반신은 뱀의 꼬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룩덜룩한 비늘들이 빼곡히 덮인 꼬리가 부서진 나무 판자 위로 꿈틀거렸다.

“놈들이 인접했습니다.”

“시간을 아주, 아주 잘 맞췄군.”

릭터는 웃으며 저 먼 해상을 바라보았다. 지연전과 유인. 놈들은 올가미에 걸린 곰이나 다름 없었다. 자못 흉포하게 팔다리를 휘둘러 대지만, 그래봐야 움직일 수 없는 사냥감들.

충분히 끌어들였다. 닷새에 걸친 지루한 추격전으로 놈들은 충분히 지쳤고, 이미 더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먼 바다로 나왔다.

수많은 구울들이 끊임없이 해상을 향해 헤엄쳐 올라가고 있었다. 릭터는 천천히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그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바다뱀의 반신을 지닌 여인들이 수인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꼬리 아래에서 붉은 빛이 타올랐다. 릭터는 엄지 손끝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냈다.

수많은 구울들, 한때 인간이었던 이들. 천여 명에 달하는 인간의 시체를 구울로 만들기 위해 릭터가 삼켰던 핏방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그의 삶 전반에 걸쳐 그 장구한 시간동안 삼켰던 핏방울들은?

피는 생명의 화폐다. 릭터는 그 화폐를 쌓아 올린 거부와 다름 없었고, 태양 아래를 거닐 수 있는 극소수의 흡혈귀 군주 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피는 독약과 같다. 단 한 방울로도 수많은 생명을 사멸시킬 수 있는 지독한 독약. 그리고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던, 도를 지나친 힘에는 반드시 ‘힘’이 깃든다. 마력이든, 신성이든.

-치이이익.

심해의 바닷속을 릭터의 피가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처럼 퍼져나간 피가 점차 침착되듯 그가 밟은 나무 판자 아래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바다 마녀들의 수인이 격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붉은 빛이 하나로 이어져 거대한 주술을 만들어냈다. 나무판자 전체가 타오르듯 붉게 명멸하고, 릭터의 피가 그 주술을 잇는 가교가 되어—

-콰드드드득!

심해 속을, 빛이 달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해저면을 밝게 비추며, 마치 어둠을 살라내는 횃불처럼. 릭터가 서 있는 나무 판자부터 그 아래로, 그 아래로. 점차 그가 있는 곳의 윤곽을 그리며—

이윽고 거대한 함선이 붉게 빛나며 명멸하기 시작했다. 나무와 태양이 부조된 윤곽, 요새와 같은 둥근 외형, 삐죽 솟은 탑과 열주들, 그 아래로 펼쳐진 가도와 민가들까지. 나무로 직조한 도시가 나타나고—

-화르르륵.

붉은 불길이 그 사이를 달린다. 심해의 물고기들이 놀라 흩어진다. 해저면 한복판에 잠들어 있던 도시가 불타오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더기에 불과하지만. 이를 이루고 있던 보호 주문과 술식, 마법은커녕 그 어떤 것들도 구현하지 못했지만. 간신히 구한 널판지 한 장 한 장을 이어 붙인 조악한 모조품에 불과하지만···.’

릭터는 그럼에도 짙게 웃었다. 그의 구울들, 사냥꾼들의 의심과 영웅들의 추적, 엘프들의 경계를 뚫고 하나씩 모은 그의 병정들. 물 속에서도 상하지 않고, 죽지 않고, 멈추지 않는 영원한 일꾼들.

지금 저 해상에 올라가 죽어나가는 그의 인형들은 그의 병력이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병력, 인퍼머르에서 간신히 수습한 그 한 줌에 불과한 그의 정예병들은 결코 엘프들의 앞에 나선 적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놈들이 방심하기를, 그의 모든 병력이 사그라들었고, 그의 모든 힘이 다했다고 생각하기를. 이 위치까지 다가오기를. 그의 병사들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기다렸다.

‘진정한 복수란 적의 칼로 적의 목을 치고, 그 피를 핥을 때 의미 있는 법.’

악단의 지휘자처럼 그의 팔이 과장되게 움직였다. 동시에 그가 디딘 판자가 뒤흔들렸다. 그의 피에 반응한 수많은 병사들이 힘을 얻고 일어나 발을 구르고 지렛대를 들고 톱니바퀴를 밀어내고 있었다.

-끼이이익.

그가 서 있는 곳은 이 가라앉은 요새의 가장 높은 첨탑이었다. 한때 위대한 영원왕이 자신의 백성들을 굽어보던 그 위치에서. 이제 반파되어 형체만 간신히 남긴 그 석주의 꼭대기에서.

“가이메른, 네 성은 기어코 내 것이 되었다.”

영원왕의 요새가 해상을 향해, 다시 한 번 부상하기 시작했다.

*

-쿠르르릉!

“무슨? 무엇이냐?”

레이아는 갑작스레 뒤흔들리는 함선에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함선의 벽면을 타고 오르던 구울들이 그 충격에 바다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곁으로 노인이 헐떡이며 다가와 소리쳤다.

“해면에서 거대한 마력의 준동이 느껴집니다. 여왕님!”

“나도 느끼고 있다. 하수인들을 보내라! 놈들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 파악해!”

“모두 죽었습니다. 한순간에요!”

“놈들이 우리의 추적을 눈치채고 있었군. 우리가 놈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왜, 왜 지금이지?”

-쿠르르릉!

다시 한 번, 해면이 뒤흔들렸다. 해저에서 시작된 진동이 해상을 흔들고 있었다.

“하수인들을 한 순간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릭터 뿐이다. 놈이 오고 있어.”

“놈들은 경계에 내몰린 겁니다. 여왕님.”

함장이 다가와 부복하며 말했다.

“놈들의 병력은 이제 저급한 구울들 뿐입니다. 이게 릭터의 마지막 발악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소서. 우리는 거의 어떤 병력도 잃지 않았습니다. 놈 홀로 가이메른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

-쿠르르릉.

선실 내부에서 명상하던 페르난데스가 진동을 감지하며 눈을 떴다. 어느새, 밤하늘엔 달빛조차 없이 시커면 구름뿐이었다. 박쥐 구름. 프란츠리트 흡혈귀들이 전장으로 나설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릭터로군.

‘그래, 오늘이었어.’

마력이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해저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인퍼머르를 재현하고 싶어하는군.’

인퍼머르 당시, 릭터는 용을 일깨워 가이메른의 기함을 파괴하려 했다. 이 해상에서 릭터는 말레이른의 힘으로 레이아를 상대하고자 했다. 놈의 전략은 일관적이었다. 더 강한 외부의 존재로 적을 압도하는 것.

‘놈이 준비한 수단이 뭘까? 파도의 대공 키안?’

-아니, 키안이 릭터에게 타락하는 존재였다면 전생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

‘그럼 키안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굴 수 있는 병기가 바다 아래에 또 뭐가 있었지?’

페르난데스는 바다 아래에서 솟아 오르는 마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온전히 흉계를 드러냈다는 뜻은, 저 늙고 교활한 흡혈귀가 이젠 이 종족 전체를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말레이른의 수법은 아니었다. 이건 오로지 놈의 계책이다. 페르난데스는 멈추지 않고 연신 수인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가이메른 일족은 지금도 북해상 최강이야. 기습이라면 모를까, 바다 위에서 이 엘프들 전체를 상대하겠다고?’

-그 수법이 뭐가 되었든. 전황이 혼란해지면 우리에겐 오히려 이득이지.

‘그거야 그렇지만. 좋지는 않군.’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던 암녹색 모래들이 꿈틀거렸다. 한 시간.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전황이 교착되고 있어야 했다.

-엘프들 전체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흡혈귀가 무슨 또 다른 용을 불러낸다 하더라도.

‘한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바깥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더라도, 그의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다시 눈을 감고 수인을 짚는 것에 집중했다. 마력석들이 뿜어내는 진득한 마력이 그의 팔뚝을 휘감고 손끝으로 나아가 주문을 맺어내기 시작했다.

*

흔들리던 선박이 다시 균형을 되찾았다. 들끓던 해상이 고요해졌다. 충격에 바다 아래로 처박힌 구울들은 다시 올라올 생각 없이 그대로 심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온다.”

레이아는 돛줄을 잡고 한 손을 칼자루에 얹은 채로 바다 한 복판을 노려보았다. 온다, 놈들이 온다.

무엇을 준비했더라도, 마지막 발악에 불과할 것이다. 레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이 들끓는 바다 한 가운데를 노려보았다. 마력이 솟구치는 위치를 중심으로 함선들이 늘어서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놈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즉시 황금 함대의 일제 사격이 이어질 것이다. 레이아의 손이 긴장감과 짜릿함 속에서 작게 떨렸다.

-두우우웅···.

해저면에서 둔중한 진동이 이어졌다. 레이아는 뿔나팔에 입을 대고 외칠 준비를 마쳤다. 또 다시···.

-두우우웅···.

파도가 작게 일고, 솟구치던 마력마저 잠잠해졌다. 고요가 내려 앉은 밤바다, 별빛도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둠 속은 마치 심해처럼 무겁고, 유일한 조명은 배 위에서 서로를 밝히는 마력등 뿐.

-두우우···.

이젠 파동마저 희미하게 끊겨, 그저 잠잠해지고. 뿔나팔을 쥔 레이아의 손에 힘이 살짝 풀렸을 그 때에—

-콰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

그들의 정면, 황금 함대의 함포가 노리고 있는 해상 그 위로 폭포가 이듯 물길이 솟구치고—

-쏴아아아아!!

치솟은 해수가 다시 쏟아져 파도를 만들고, 배들이 힘없이 휘몰아치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돛을 잡아라, 닻을 내려라, 조타, 정신 차려라! 수 많은 명령어들이 레이아의 머릿속을 감돌았다. 격랑 속에서 응당 내려야 하는 그런 명령들이. 그러나.

-쏴아아아아···.

레이아는, 그리고 황금 함대의 엘프들은 그저 멍하니 바다 위에 솟아오른 부서진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외벽, 파괴된 부조, 그 너머로 보이는 반파된 석주와 탑들···.

레이아의 반평생을 보냈던 그 도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고대의 유적.

“···왕의 기함!!”

레이아는 멍하니, 그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해수를 맞으며 바다 한 복판에 솟아오른 요새를 바라보았다. 저건, 인퍼머르 근해에 수장되었는데···.

인양 작업도 불가능했던 함선이다. 끌어 올려서 다시 건조한다는 계획 자체가 입안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노력, 재화가 들든 상관 없이. 문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흡혈귀와 구울들은 바닷속에서 활동할 수 있다.’

‘프란츠리트는 지난 일년간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인퍼머르 근해는 데인 왕국의 손에 넘어갔다. 해당 해역을 감시하는 일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때, 그녀의 기함을 중심으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창을 치는 둔탁한 소음들··· 구울들이었다.

“전군···.”

어찌 해야하는가. 레이아는 뿔나팔에 입술을 대고 철수를 외치려다가 멈췄다. 가이메른의 기함이 복구되었다면, 가이메른 엘프로서는 포기할 수 없다. 왕의 기함은 그들의 요람이요 집이자, 영토였다. 지금과 같은 방랑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함은 반드시 필요했다.

엘프 와일드프린스들이 선체를 기어올라오는 구울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다시 전장의 소음이 터져나왔다.

“여왕님! 명령을!”

“전군···.”

레이아는 멍한 얼굴로 가이메른의 기함을 바라보았다. 기함의 외벽에서 구울과 흡혈귀, 그리고 뎀드원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흡혈귀와 엘프들의 해상전은 공성전과 같은 양상을 띈다. 흡혈귀들은 마치 성벽을 공략하듯 선체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제 역할이 뒤바뀌어—

‘공성의 입장이 되었구나.’

이제 저 거대한 성체를 두드리는 것은 엘프들이 되었다. 적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막아내며, 저 요새를 향해 진격하라고. 레이아가 감히 자신의 동족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정병들이 소모되겠는가.

차라리, 레이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조차 이보다는 호의적인 상황일 것이다. 폭포는 연어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니. 그러나 쏟아져 내려오는 흡혈귀들은 명백히 엘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스르릉.

그때, 그녀의 곁에 금발이 너울졌다. 아벨이었다. 그녀는 칼을 뽑고 레이아의 손에서 뿔나팔을 건네 받았다.

“아이야, 너희의 신은 ‘여명의 여신’이다. 무릇 여명이란 것은 가장 어두운 밤 직후에 터오르는 빛인 바. 여신의 종족이며, 그 종족을 이끄는 너는 그 어둠을 살라먹는 가장 첫 샛별이 되어야 한다.”

“아벨레사스···.”

“키르하스. 승산은 어디에 있느냐?”

아벨의 말에 차가운 얼굴을 한 키르하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날아드는 흡혈귀를 일도양단하고, 칼날처럼 서늘한 눈동자로 전황을 살폈다. 그녀의 한 손이 품 안에 들어가고, 곧 담뱃대가 그 손에 들려 나왔다.

그녀가 오만하게 턱짓하자,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엘프 기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엄청난 위압감과 존재감이었다.

후, 짧게 담배 연기를 뱉고. 키르하스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망토를 벗어 그 기사에게 건넸다.

“버티는 것 뿐입니다.”

“언제까지 버티면 되겠느냐?”

“놈들의 병력은 무한하지 않고, 엘프 전력과의 교환비는 압도적입니다. 지금은 놈들의 공세를 버텨내는 것 뿐, 공세를 전환하기엔 시기상조입니다.”

키르하스는 담배를 마저 피우고 미련 없이 담뱃대를 갑판 위에 떨어트렸다. 잿불이 흩어지는 것을 발로 비벼 끄며, 그녀는 선실로 향하는 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은공이 나오실 때 까지. 그 분께선 이미 이 상황을 대비하고 계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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