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공성과 수성의 경계면 (2) >
*
와일드프린스들은 일당백의 용사들이다. 물질 세계 최강의 기사단을 꼽으라면 반드시 호명되는 이들이며, 장생족 특유의 긴 세월을 온전히 무예와 구도에 전념한 무도가들이었다.
-스르릉.
번쩍이는 갑주를 차려 입은 와일드프린스들이 일제히 칼을 뽑고, 거의 동시에 납도했다. 엘프 특유의 거합 검술이었다. 일격, 다시 일격. 무수히 올라오는 구울들의 손목과 뎀드원의 머리통이 그 칼날 앞에서 흩어졌다.
“갑판을 사수하라! 박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마라! 민선을 사수해! 목숨을 바쳐라!”
레이아는 그 사이를 벼락처럼 누비며 소리쳤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눈 앞에 솟아 있는 거대한 요새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의 예민한 감각들이 전황을 시시각각 전달하고 있었다.
-스겅.
그녀의 머리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뎀드원이 입을 벌리자마자, 그녀의 칼자루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놈의 머리를 날렸다. 걸쭉하고 검은 핏물이 갑판 위로 쏟아졌다. 레이아는 칼을 한번 털고 다시 납도했다.
“갑판을 지켜라! 여명의 자식들이어, 위치를 사수하고, 백성을 지켜라!”
해가 뜰 때 까지! 레이아의 외침은 다분히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동이 터오르는 여명, 흡혈귀가 약해지는 그 시간까지. 또는 그들의 신. 여명의 여신이 그들에게 미소 지어줄 때 까지.
그러나 그녀는 그리 외치며 회의적인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릭터의 박쥐 구름은 거의 완벽하게 태양빛을 가린다. 이 전장은 단순히 햇살이 비춘다고 완화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거함. 가이메른의 기함은 존재 자체로 여신에 대한 모욕과 다름 없었다. 산산조각난 여신을 수천 년간 억압했던 영원왕의 광기가, 흡혈귀의 타락에 절어 부활한 셈이었다.
저 배는 저 스스로 흡혈귀가 되었다. 피 대신 희망을 빨아먹는, 되살아난 언데드. 레이아는 북해상 최강이라 불렸던 저 거함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백성을 지켜라!!”
그러니,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 진실된 단어는 이것 뿐이었다. 백성을 지켜라. 동이 튼다 하더라도, 희망은 너무나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명령, 유일한 바람은 그것 뿐이었다.
*
반파된 탑의 가장자리에 서서, 릭터는 피부를 얼리는 북해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얼어붙은 바닷물에 빳빳하게 섰고, 붉게 빛나는 동공은 전장을 오만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놈들의 발악이 하찮군.”
저 아래에선 볼 수 없는 시야다. 릭터가 내려보는 이 위치. 영원왕의 상징과 같은 지고한 상공에서 내려보는 이 위치에선, 레이아와 그녀의 함대가 죽은 자들의 격랑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선히 보였다.
놈들은 공성과 수성 사이에 끼어 고사하고 있었다. 압착판에 으스러지는 과실처럼, 놈들은 붉은 과육을 흘리며 흡혈귀들의 위장을 덥히고 있었다.
영원왕의 기함을 향한 공성, 그리고 해저에서 솟구치는 구울들을 상대로 함선을 지키는 수성. 놈들은 바다 위에 고립된 채로 천천히 소모되고 있었다. 이미 놈들 사이에 죽음의 두려움이 짙게 깔리고, 그 달콤한 공포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대공, 박쥐들이 부족합니다.”
여인이 쉭쉭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릭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도사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구울을 더 보내라. 피 주머니들에게도 흘릴 피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야. 쓰레기들 같으니.”
고작 일년 사이에 충분한 수준의 흡혈귀들이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인퍼머르의 손실은 수십 년간 보충해도 모자랄 양이었다. 저급한 병정들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고위 흡혈귀들의 손실이 일년 안에 보충될 수는 없었다.
릭터는 그토록 하찮았던 그의 혈족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 버러지들은 단 한 순간의 빛도 견디지 못하고 스러졌다.
그 빛. 멜리실두르의 지독한 섬광. 릭터의 인상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릭터라고 할지라도 그 저주받을 빛에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릭터는 반사적으로 그 빛을 소환했던 인간을 찾았다.
“어디에 있느냐.”
놈이 이 함선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완전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뜻밖의 소득이었다. 복수는 어느 순간에 하더라도 달콤하고, 기왕이면 이르게 하는 편이 더욱 기꺼우니.
인퍼머르에서 보였던 놈의 행태에 따르면, 놈은 어디에서 싸우든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릭터는 그 인간에게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용을 타고 가이메른의 기함을 일격에 파괴했던 마법사. 이 전황의 유일한 비대칭전력이 있다면 놈일 것이다. 그러나,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릭터는 그것이 불안했다.
*
그 시각, 페르난데스는 북해 상공을 잇고 있는 마력의 흐름에 접촉하고 있었다. 그의 몸 주위를 감도는 암녹색 마력석 가루들이 일정한 리듬에 따라 박동하며 그의 마법을 보조하고 있었다.
‘말레이른.’
페르난데스가 수인을 짚을 때 마다, 그의 등 뒤에 솟아 오른 영체 손들이 동시에 제각각 다른 수인을 짚었다. 길게 이어지는 수인들. 그 사이를 타고 흐르는 마력. 마법을 맺어내기 위한 손짓이라기보단, 저 먼 거리를 관통해 건네는 수화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정점에 도달한 마법사들간에 보내는 등불이자 수신호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하루 거리에 떨어진 존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말레이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위장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천각마탑의 말레이른과 같은 뛰어난 마법사에게라면 더욱이. 그러나 존재하는 것을 과대포장 하는 것이라면, 정보의 교란을 유도해 적을 격동시키는 술책이라면.
오히려 그의 주력 분야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수인을 짚었다. [신], [존재], [격랑], [나침반].
같은 주문을 연신 반복해서, 끊임 없이.
끊임 없이.
두 시간이 흘러, 이제 세 시간. 자정이 넘어 다시 늦은 심야의 새벽. 별도 달도 비추지 않는 지독한 박쥐 구름 너머로, 그의 마력이 신호를 담고 거대한 천공의 흐름을 자극했다.
‘말레이른.’
내가 여기에 있다.
*
-화르르륵.
함선 하나가 불길에 휩싸이며 타올랐다. 그 함선 내부에 승선해 있던 엘프들 중 누구도 바닷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떨어져봐야 구울들의 한끼 식사가 될 것이 뻔했으니, 엘프 전사들은 차라리 살아있는 장작이 되기를 각오했다.
레이아는 칼을 휘두르며 이를 깨물었다. 엘프들의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구울들은 지칠 줄 몰랐고, 끝이 없었다. 그들의 전략이 그저 몸으로 들이받는 것일 뿐이라 하더라도,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격전, 퇴로 없는 공성전에서 엘프들이 더 여유롭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신이시여!”
레이아는 목청 높게 고함치며 칼을 휘둘렀다. 벌써 두 번째 검이었다. 칼날이 흡혈귀와 구울들의 핏물에 엉켜 무뎌지고 있었다. 근육과 뼈 사이에서 뒤틀리는 감각이 생경했다.
“키르하스!”
“조금만 더!”
키르하스의 상황 또한 더 낫다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전선에 뛰어들어, 밀리는 전장을 해소시키는 소방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와일드프린스가 쓰러지고 그 시체 위로 구울들이 기어 오를때마다 키르하스가 나타나 그들을 도륙내고 빈 자리를 채웠다.
그런 격전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었다. 엘프 마법사들의 화력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흡혈귀 마법사들에게 묶여 마법전을 벌이고 있었다.
양측의 마법 전력이 길항을 이루고 있었다. 레이아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마법사는 키우기 까다로운 병력 중 하나다. 릭터에겐 고작 일 년이 있었을 뿐이다. 대체 이 자가 어디서 이 정도의 병력을 양성했단 말인가.
‘믿기 싫어도 현실이다.’
릭터의 하찮은 재주와 심계에 휘말려 사지로 기어 들어왔다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자신의 동포들을 수없이 갈아 넣는 죽음의 전장으로. 북해상 최강 전력. 황금 함대. 그 이름에 취한 것이었다.
-끼이이익···.
불타던 함선의 용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와 함께 물에 빠지는 소리도. 마치 상어들이 덮치듯이 첨벙거리는 해수면과, 불타는 함선 아래로 비쳐 보이는 살점, 핏물, 시체들이 보였다.
‘놈들의 병력에 끝이 없을 리가 없다.’
그 인구가 만 명이 채 되지 않아, 사실상 그저 큰 도시국가 수준이라 할지라도, 그들 하나하나는 장생족이었고 백병전의 전문가들이었다. 이곳이 만약 단단한 대지였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대륙의 저주가 없었다면. 그들이 아직 대지를 호령하는 일족이었다면.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찬란한 문명을 피우던 그 시절, 엘프들의 황금기로 돌아간다면.
레이아는 어금니를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만약이란 없다. 지금은 차가운 현실 뿐이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괴물들의 괴성과 그 아래 헐떡이는 동족의 신음소리가 가득한 전장이었다.
-퍼드드득.
전장에 그림자가 깊게 졌다. 그녀의 함선 메인 마스트 바로 앞 간판에 박쥐들이 뭉치며 그림자를 피웠다. 천천히, 그림자 사이에서 강철 갑주를 걸친 거한이 나타났다.
레이아는 허리를 낮게 숙이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칼은 두 자루 뿐.
“너희 민족의 끝이 보이는구나.”
붉은 눈을 빛내며, 릭터가 입술을 핥았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어금니가 번들거렸다.
“찬란하던 문명의 종말이 보이는구나. 강대한 종족의 최후가 보인다. 오만한 피 주머니들. 너희의 필멸성이 눈에 선하구나.”
“닥쳐라 박쥐.”
“레이아. 가련한 공주. 영원왕의 망토자락 아래에서 아늑하게 지내던 그 시절이 그리우냐? 내 너를 친히 거두어 줄 수도 있다.”
릭터가 끈적하게 웃었다. 그의 동공이 잔혹하게 일렁거렸다.
“한때 이 해상 최강이라 자랑했던 시절이 있었지. 너희 종족은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제 그 종지부에 이르렀다. 너는 네 선조들에게 부끄럽겠구나. 너희 ‘위대하신’ 일족의 마지막 서펜트 킹이여.”
“지금이 우리 모두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의 자랑이다.”
레이아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릭터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거리를 잡고 있었다. 단 반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그녀의 칼날이 닿는 공간이다.
릭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레이아를 보고 벙긋 웃었다. 급할 것 따윈 없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으니.
사방에서 불타는 함선의 괴성과 타들어가는 엘프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페라를 듣는 심정으로, 그는 그 비명을 만끽하며 흥얼거렸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여신을 되살렸다. 우리는 서서 죽는 것을 선택해 불길 속을 걸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저주를 끊고, 과오를 되잡으려 스스로 일어섰노라.”
“그래서 너희의 여신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응? 너희 민족 모두가 죽고 난 뒤, 그 시체 위에서 강림하기라도 하려나? 시신들의 여신이라. 차라리 흡혈귀들의 신이 된다면 내 기꺼이 신봉해주마.”
레이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옆을 노리며 흡혈귀 하나가 날아들었다. 벌써 갑판 한 가운데까지 전선이 밀려 있었다. 레이아는 급히 몸을 틀어 몸을 보호하려 했다.
-쒜에에엑.
그 순간, 무언가가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흡혈귀의 몸이 반토막나며 내장을 흩뿌렸다. 레이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흡혈귀가 꿈틀거리며 공중에 비산했다.
-투우웅.
날아든 것이 마스트의 한복판에 꽂혀 진동했다. 묵빛 검신을 가진 대검이었다. 레이아는 천천히 그 낯선 대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날아와 흡혈귀를 토막내고 정확히 마스트 한복판에 꽂히는 힘이라니.
“왔구나. 내 너를 기다렸다.”
“내 준비가 늦었군. 레이아 여왕. 고생 많았소.”
중저음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의 등 뒤에서 나타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반백의 곱슬머리 사이로 짙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걸어오며 등 뒤에 걸어둔 대검에 손을 뻗었다. 새하얀 빛과 함께 은백색 대검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무시당해 자존심이 상한 릭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너 하나가 나타난다고 바뀔 전황이 아니다. 인간. 너는 이 피 주머니들과 함께 영원히 해저 아래에서 날 위해 노역할 것이다.”
“그래. 나 하나가 바꿀 수 있는 전황이 아니지.”
페르난데스는 릭터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대검을 곧게 세워 얼굴 앞에 두고는 검신에 기도를 올렸다. 베이타서스의 성검이 그의 기도에 반응해 빛을 내뿜었다.
그 빛에 릭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성유물이다. 분명히 위협적인 무장이다. 하지만 개인의 병기인 이상 이 전황을 뒤집을 열쇠가 될 수는 없다.
“페르난데스, 이미 늦었다. 네가 준비한 것이 너의 탈출 수단이라면, 나는 기꺼이 허락하겠다. 살아서 도망쳐라. 네가 죽을 필요는 없는 전장이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리요. 레이아 여왕.”
페르난데스는 검신에서 얼굴을 떼며 웃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팔뚝을 저며 피를 흘렸다. 핏물이 대검의 검신을 타고 흘러 바닥에 방울졌다.
*
선실의 밑바닥, 암녹색 마력석 모래들이 스스로 휘몰아치며 기이한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모래들이 매 순간 전혀 다른 문양의 진법을 그려냈다.
현대 마학의 정수. 페이자쉬가 이루어낸 삶의 업적이 녹아 있는 주술진이었다. 살아있는 마법진. 매순간 다른 문양의 주문을 스스로 자아내는 마법진.
정해진 알고리즘 내에서 마력을 조율하는, 일종의 인공 정령과 같았다. 트리거는 페르난데스의 혈액. 드넓은 천공, 저 하늘 높이 직조된 북방의 마력 흐름. 변화무쌍한 마력의 소용돌이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생체 퍼즐.
-스르르륵.
하늘의 마력이 소용돌이친다. 박쥐 구름을 이루는 릭터의 마법,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엘프 마법사들의 주문과 이를 견제하는 흡혈귀 마법사들의 역주문까지. 마력의 흐름에 개입하는 수많은 주문들이 이 전장의 상공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든 개입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며, 마력석 가루들이 다시 마법진을 뒤틀고, 새로운 진법을 만들어낸다. 모든 상황, 모든 조건들에 맞춰 스스로의 형태를 변화시키며—
-파지지직.
그 주문 한복판에 놓인 청동 왕좌에 불똥이 튀고,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문을 소화하지 못한 백래시를 온전히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가 감당하고 있었다.
-똑.
그 위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페르난데스의 핏물이 한 방울.
*
-부우우우우!!
동쪽 멀리 수평선에서, 둔중한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평선 너머의 박쥐 구름이 흩어지며 새파랗게 질린 밤하늘이 언뜻 비쳤다.
전장의 모든 이들이 한순간 멈춰, 소음이 들리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이 수평선 너머에서 비추고 있었다.
-두우우웅, 두우우웅, 두우우웅.
묵직한 전고 소리, 다시 들려오는 둔중한 나팔 소리. 그리고—
“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박쥐 구름은 자연현상이 아니다. 실제하는 구름이 아니라, 그 아래를 덮고 있는 박쥐들이 만들어내는 마법적인 기상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 아래에선 눈비가 내릴 일이 없었으나···.
“대공! 대공, 영원왕이 오고 있습니다!”
릭터는 자신의 곁에 다가와 속삭이는 흡혈귀의 말을 들으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법이 깨어지며 구름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눈이 흩날리며 전장까지 닿고 있었다.
“···말레이른. 이건 약속과 다른데.”
릭터는 매마른 입술을 열어 속삭였다. 그는 곧 매섭게 타오르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네가 저지른 짓이냐? 말레이른을 끌어들인 것이? 나와 놈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몰랐더냐? 아니면, 그가 너희를 고작 ‘동족’이란 이유로 도우리라 기대했느냐?”
“너나, 나나, 그 엘프 왕이나. 비슷한 부류라고 볼 수 있지.”
“뭐?”
“이기심, 욕망, 목적. 우리는 그런 것들에만 움직이니까.”
페르난데스는 칼을 곧게 세웠다. 피가 흐르던 팔뚝이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곧장 다시 떴다.
“그런 이들일수록 목적 앞에선 단순해지는 법.”
“개소리를. 후회해라. 너흰 스스로 더 승산 없는 전장에 몸을 담군 것이다!”
“혀가 길다.”
페르난데스는 곧 눈을 치켜 뜨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