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차도살인지계 >
*
릭터는 달려오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장검을 뽑았다. 섬뜩한 회백색으로 빛나는 강철검이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첨단이 날카롭게 솟아 있어, 짐승의 송곳니처럼 보이는 검이었다.
-채앵!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휘둘러 그대로 내리 그었다. 엄청난 충격력이었지만, 릭터는 그의 검세를 손쉽게 막아낼 수 있었다.
-채앵!
대검이 빙글 돌아 회전력을 더한다. 페르난데스의 몸이 물 흐르듯 파고들며,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긴 잔상을 남겼다. 짙은 어둠 속, 마력등의 빛을 반사하는 굵은 눈송이 사이에서. 릭터와 페르난데스의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챙! 챙!
한 번, 두 번. 그리고 이어서.
-카앙!
릭터의 장검 크로스가드를 물어 뜯으며,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파고들었다. 치열한 힘겨루기. 릭터는 페르난데스를 노려보며 팔에 힘을 주었다. 수많은 생명을 삼키며 쌓은 그의 힘은 인간의 것을 초월했으나—
“순수한 인간이 아니구나. 네 정체를 밝혀라.”
-카드득.
릭터의 검이 공중에서 페르난데스의 대검과 맞물려 불똥을 튀었다. 그의 눈이 붉게 타오르며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일반인이라면 오금이 저리고 몸이 돌처럼 굳을 마안이었다. 고위 흡혈귀 특유의 마력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는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움직였다.
“이단심문관 안젤로.”
“이단심문관이라. 베이타서스의 개들이로구나. 이 힘. 그래. 내가 아는 종류의 것이다. 디모니카더냐.”
-카앙!
릭터는 힘을 주어 대검을 뿌렸다. 디모니카들은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이용해 싸우는 이들. 기예와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바라보는 페르난데스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카앙!
그러나 칼이 한 차례 더 부딪치고. 다시 한 번 더. 빙글, 대검이 공중을 선회하며 매처럼 꽂히고, 다시 튕겨나갈 때 마다. 릭터는 손목어림에 뻐근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캉! 캉! 캉!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회오리치는 폭풍우처럼,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회전력을 더하며 원을 그리고, 위, 아래, 그리고 좌우에서 연신 몰아쳤다. 가볍게 막던 일격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튕겨낼 때 마다 반탄력을 더하여—
-카드드드득!!
릭터의 장검을 빗겨 혈조를 따라 미끄러지며, 위로 튕겼다!
“이런···!”
“실전은 오랜만이라.”
페르난데스는 자세를 낮춘 채로 속삭였다. 억눌린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대검이 곧 다시 빛을 반사했다. 이젠 잔상만 보일 정도로 빠르고 강맹한 일격!
-카앙!
릭터의 긴 삶, 그 시간을 통해 이어온 어떤 본능적인 방어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 릭터는 두 걸음 뒤로 밀려나며 자세를 다잡았다. 그를 뒤쫓지 않고 그저 노려보며,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군. 죽음의 위협이라는 것 말이야.”
그 전까지, 그의 백병전 전술은 아주 단순했다. 디모니카의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분쇄하고,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공세는 무시한다. 뼈와 살을 내어주고, 적의 목숨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겐 불사의 축복이 없었다. 이제 삶이란 죽음이 그와 함께 내달리는 기나긴 경주와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수습하며 자세를 잡았다.
이것은 축복을 잃은 후 첫 실전이었다. 이제 그는 반격, 방어, 그리고 기예의 영역에 스스로 발을 딛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만을 추구하던 기존의 검술과는 결이 다른, 진정한 의미의 검술이었다.
-우드득.
페르난데스는 뻐근하게 굳은 손목을 풀었다. 몸이 충분히 달아올랐고, 심장이 맥박치며 근육이 떨렸다. 죽음의 위협이었다. 아무리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칼날이 심장이나 목젖에 틀어박히고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런 종류의 위협이 그의 감각을, 촉각이나 시각, 후각 따위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여섯 번째 감각을 일깨웠다. 사선을 건너며. 말 그대로 ‘죽음’ 자체를 건너며 쌓아 올린 경험의 총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탓.
페르난데스가 숙인 자세 그대로 내달렸다. 성검의 빛이 긴 잔상을 남기며 갑판 위를 비췄다. 릭터는 이제 간신히 검격을 막아내는 것에 그쳤다. 다시 불똥이 튀었다. 사방에서, 사방으로.
-캉! 캉! 캉! 캉!
강철로 만들어진 폭풍과 같았다. 페르난데스의 대검은 결코 멈추지 않는 소용돌이와 같았다. 검격을 튕겨낼 때 마다 더 크고, 더 강한 원심력으로 다시금 릭터의 목, 심장, 팔과 다리를 향해 내리 꽂혔다.
“이···노오오옴!!”
릭터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생사의 기로에 선 격전, 릭터 또한 수많은 전장을 건너며 살아남은 고위 흡혈귀였다. 살아온 세월도, 그로부터 익힌 기술과 기예도 밀릴 턱이 없었으나—
그 경험의 격이 달랐다. 페르난데스는 말 그대로 수 없이 죽음을 건너며 걸어왔다. 필멸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떤 경지가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든 필멸자들에게 죽음이란 단 한 순간,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감내하는 일종의 종착지였지만.
-카아아앙!
페르난데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죽음이란 그저 관문에 불과했으니. 그 경험의 질이, 생과 사의 간극을 넘는 간합.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단련된 삶의 경험이. 스스로의 생명을 그저 소모품이라 여기며 아낌없이 투자해 쌓은 그의 경험이 그의 재화가 되어 흘러 넘쳐—
-콰드드드득!
공간이 갈린다. 릭터는 그 사이에 갈라지는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장검을 쥐고 있던 손이 허공을 날고, 그 사이에서 빛나는 페르난데스의 군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은, 사신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평생 회피하고 있었던 죽음의 표상이었다.
“이···노오옴!! 누구도, 그 누구도 감히 이 나를. 프란츠리트의 송곳 대공을 죽일 수는 없다! 나는 너희 필멸하는 피 주머니들과 격이 다른, 나는, 나의 이름이 곧 죽음이다!”
“그렇게 말했던 녀석이 하나 더 있지.”
-콰드드드득!
다시 한 번, 대검이 공간을 갈아내며 긴 궤적을 남기고.
“죽음의 신조차 죽음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흡혈귀.”
릭터의 몸이 세로로 갈려나갔다.
*
“군신(軍神)의 사자 답구나.”
레이아는 폭풍처럼 대검을 몰아치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단심문관, 베이타서스의 사자들. 군신의 전사들 다운 무예였다. 처음엔 동수를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릭터는 갑판의 끝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머무를 사내가 아니다.”
그녀의 곁에, 흡혈귀의 핏물로 옷과 뺨, 머리칼을 잔뜩 적신 아벨이 나타났다. 그녀는 장검에 엉킨 피를 털어내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군신 그 자체가 될 사내야.”
아벨은 페르난데스의 검술이 ‘경지’라 불리는 경계선을 부수고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물리적 기예로 펼치는 일종의 마법과 같았다. 전사란, 경지를 넘어 그 끝. 정점으로 달하는 긴 험지를 나아가는 구도자다.
페르난데스는 그 스스로의 재능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벨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는 전생에 수많은 영웅들을 마주했고, 그들과의 싸움으로 검술과 재능의 영역을 가혹하게 잡고 있었다.
아벨이 보기에, 그의 재능은 오히려 무예에 더 가까웠다. 마법? 놀라운 성취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그 성취는 긴 삶, 투쟁과 추격, 도주의 기나긴 삶. 그 전반을 걸쳐 쌓아 올린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재능 또한 뛰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들었던 전생의 삶, 그 전반기에 걸쳐 그는 그저 살아남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단검 투척과 암습, 독살과 책략. 모든 흑마법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그들 중 진정코 천수를 누릴 때 까지 살아 경험을 쌓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벨이 보기에, 그 과정을 지탱한 것은 그가 가진, 선천적인 무예의 재능 덕이었다.
-카아앙!
릭터의 팔이 날아가는 것을 보며, 아벨은 이 순간 확신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스스로의 재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지만. 불사의 축복이 사라진 지금, 본능의 영역에 박혀 있던 그의 재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처음엔, 다인의 영혼이 그의 몸에 녹아 내리며 남은 재능의 잔상이 그의 검술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다. 만일 전생의 페르난데스가 살기 위해 검을 잡았다면. 그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조금만 더 나은 스승을 만나고, 보다 나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그랬다면···.
‘안타깝구나.’
아벨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그의 삶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 모든 순간이 안타까웠다. 그에겐 더 영광스러운 결말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모두의 인정을 받고, 만인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 될 수도 있었다.
비참한, 한탄과 후회만을 안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심장 대신, 그가 응당 가져야 했을 권리들. 어떤 악의적인 운명이 그의 삶을 뒤틀지 않았더라면.
‘내가 너의 곁에 있었다면.’
전생에 내가 너의 곁에 있었다면. 너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는 아벨은, 그 사실에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이젠 내가 네 곁에 있다. 페르난데스.’
-콰드드드드득!
릭터의 목을 갈아내는 대검을 바라보며, 아벨이 눈가를 훔쳤다. 그녀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운명이 없다 했느냐. 아니, 아니다. 네게 주어진 권리, 네가 가진 재능. 그것은 너의 운명이었다.
‘나 또한.’
그러하길 바란다.
*
-퍼드드득.
릭터의 몸이 갈려 나가자마자 그의 몸이 박쥐떼로 변해 흩어지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뭉쳤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릭터가 연신 거친 숨을 헐떡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몇 번이나 더 그런 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보자고.”
페르난데스가 대검을 크게 한 바퀴 돌리고는, 그를 향해 걸어나갔다. 릭터는 발작적으로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막아, 놈을 막아라!”
-퍼드드득!
그의 외침과 함께 박쥐들이 페르난데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들 하나하나가 흡혈귀로 변하며 그에게 칼과 창, 도끼 따위를 휘둘렀다.
-카아앙!
페르난데스의 고양된 정신, 죽음의 위협으로 한껏 예민해진 감각이 그 모든 공격을 감지해 최선의 궤적을 그려냈다. 그는 그 선을 따라 대검을 휘둘렀다. 반쯤 본능적인 반격이었다.
-콰드드득!
칼날이 부러지고, 창이 박살났다. 한 획에 한 명씩, 어쩌면 셋 이상. 흡혈귀들은 단 한 걸음도 그의 전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불똥이 튀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베고, 찍고, 후려치고, 튕겨내고, 휘둘러치는. 그 모든 공격이 한 차례도 끊김 없이 이어졌다. 일격 일격이 사지를 박살내는 충격을 담고.
그는 그 순간, 강철로 만들어진 폭풍처럼 전진했다. 범위 이상으로 파고든 적에게 팔꿈치를 찍고, 그 자세 그대로 대검을 크게 휘둘러 둘의 목을 따고, 다음 적의 정수리를 찍어 갈랐다.
신성의 실마리를 품고, 무예의 길을 나아가는 이 순간에, 페르난데스에게 이런 저급한 흡혈귀는 구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릭터에겐 고작 일 년이 있었을 뿐이고, 그가 준비할 수 있었던 고위 흡혈귀는 충분하지 않았다.
릭터는 그 모습을 보며 어금니를 사려물고는, 곧 박쥐로 변해 흩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다가오는 적들을 도륙하며 도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놈은 기함의 외벽을 타고 올라, 그 끝. 외성의 첨탑에 올라서서 외쳤다.
“놈! 그 따위 칼질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생각하지 마라!”
그래 그러시겠지. 페르난데스는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흡혈귀에게 대검을 박아 넣고는 피식 웃었다. 놈은 물론 흡혈귀 특유의 마법에 통달했을 것이다.
놈에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페르난데스에게 마법은 오히려 검술보다 더 익숙한 분야였다는 점이며—
-부우우우!!
다시 뱃고둥이 수평선을 울렸다. 어느새 눈보라가 더 거칠어지고, 말레이른의 기함이 이젠 충분히 육안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왔구나.’
-드디어.
또, 릭터의 패착이라 한다면. 릭터와의 칼부림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며—
-콰아아앙!
말레이른의 기함에서 거친 포성이 들렸다. 쒜에에엑, 대기를 찢어 발기는 포환의 파공성이 들리고. 곧.
-콰지지직!!
“무, 무슨?!”
릭터가 서 있는 외성에 직격했다. 연이은 포격이 릭터의 기함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외성을 포환이 연신 두드리며 점점 더 균열이 커졌다.
“왜, 왜 나를 공격하느냐. 말레이른!”
“신성을 가진 존재를 사전 통보 없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서, 신 사냥꾼이 무슨 생각을 할 거라고 예상했나?”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말레이른의 목적은 신을 사냥하는 것이었고, 안타깝게도 이 함대엔 신성을 품은 존재가 셋이나 된다. 아벨, 페르난데스, 멜리실두르.
아벨과 멜리실두르는 거의 존재감마저 희미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페르난데스는 수 시간의 준비를 통해 신성의 존재감을 과대포장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은 말레이른을 끌어당기는 미끼였다.
“그리고, 영원왕의 기함을 보고, 말레이른이 무슨 생각을 하리라 생각했지?”
가이메른의 기함을 본 말레이른은 반드시 릭터에게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자신 몰래 신을 사냥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당연히—
“어부지리, 차도살인, 내분획책. 뭐든간에.”
-내 분야지.
페이자쉬가 킬킬거렸다. 적의 칼로 적의 목을 치는 것. 전생에 가장 즐겨 사용하던 전략 중 하나였다.
-콰아아아앙!
다시금, 말레이른의 기함에서 포성이 들렸다. 릭터의 기함, 가이메른의 요새는 과거에 응당 있었던 그 어떤 보호 주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외관만 그럴싸하게 꾸민 누더기였다.
본디라면 저런 물리적인 포격엔 결코 파괴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놈의 기함은 지금 실시간으로 박살나고 있었다.
흡혈귀들이 혼비백산해 전장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릭터의 지배력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말레이른의 포격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빙글 돌려 칼집에 찼다.
“이제 저 개자식만 처리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