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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49화 (150/388)

< 149.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1) >

*

수평선 저 너머. 고요하게 펼쳐진 그 광대한 경계면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다. 대지 위로 쏟아지는 눈과는 달리, 바다 위의 눈송이들은 덧없이 사그라든다.

해수면에 나리는 눈보라는 생명의 필멸성을 암시하는 장절한 낙화다. 레이아가 보기에 이는, 죽어간 엘프들을 위한 헌화였다. 거친 북풍에 흩날리며 산란하는 그 사이로, 빵틀을 찍어내듯 균열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또 다른 포환이 허공을 찢어 발기며 날아와 릭터의 외성에 틀어 박혔다. 외성은 이미 반파되고, 누더기를 기운 듯한 그 거대한 요새는 박살나 흩어지고 있었다. 릭터는 타오르는 붉은 눈으로 포격을 연발하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노려보았다.

레이아는 부서져 내리는 그녀의 고향을 보며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비록 시체나 다름 없었지만, 과거의 영광에 기댄 그림자와 같은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나고 자란 그녀의 고향이었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다신 재건할 수 없을 동족들의 고향. 레이아는 광기와 증오, 혼란에 휩싸인 릭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이른 감상이로군.”

“페르난데스.”

“우리의 목적은 애당초 릭터가 아니었소. 레이아. 칼을 꺼내고, 병사들을 준비하시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니.”

“방도가 있느냐?”

레이아는 점점 더 거대해지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놈의 기함을 멀리서 보았을 때, 놈과 해상전을 벌일때와 달리. 지금 그녀에겐 거리를 잡고 공격을 회피하며 장기전을 치룰 자원이 부족했다.

말레이른과의 지난 교전은 일방적이었다. 말레이른은 거의 움직이지도, 반격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함선의 압도적인 방어력만을 믿고 견뎠고. 레이아의 함대는 그저 수 차례 견제 사격 후 퇴각을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 난파된 함선의 잔해들, 정면을 가로막은 릭터의 기함. 후방에서 접근하며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말레이른의 기함. 그 사이에 온전히 가로막혀서, 그녀의 함대는 천천히 위축되고 있었다.

“방도가 없었다면 내가 저 자를 불러들이지는 않았겠지. 그대가 내게 약속한 것이 있지 않소? 필요한 모든 자원을 지원할 테니, 그저 말레이른의 기함에 작은 균열 하나만을 내달라고.”

“필요한 바를 말하라.”

“키르하스.”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기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낮게 말했다. 그의 곁에 키르하스가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임무를 완수했더냐?”

“예, 은공.”

“좋군. 따라오겠느냐?”

“제가 아직 필요하다면 응당.”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마스트에 박혀 있던 다인 왕의 대검을 뽑아들어 등 뒤로 돌려 찼다. 두 자루의 대검이 교차해 묵직하게 어깨를 눌렀다.

“뿔나팔을 빌려주시오. 전 함선의 포대를 말레이른의 기함에 겨냥하고, 신호를 내리면 단 한 순간의 오차도 없이 발포해야 할 것이오.”

“이미 수 없이 시도해 보았다. 놈의 물리 보호 주문은 완벽에 가까워. 어떤 포환에도 상하지 않았다.”

거대한 함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표적이다. 방향만 잘 잡고 발포하면 어디를 노리고 쏘아도 거의 반드시 기함의 외벽 어딘가엔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레이아는 지난 교전을 통해 말레이른의 보호 주문이 완벽하다는 것만을 입증하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레이아의 손에서 뿔나팔을 받아 들며 말했다.

“포환에 주문 쐐기 주술을 걸 수 있는 마법사들은 충분하겠지?”

“당연히 그 또한 시도해 보았다.”

“그땐 내가 없었지.”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바라보며 웃었다. 끼이익, 함선에 적재된 구명정이 해상에 내려서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명정을 향해 뛰어 내렸다. 키르하스가 그의 곁을 따랐다. 아벨이 함교에서 뛰려 할 때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는 여기에서 해줄 일이 있소.”

“이번에도 나를 버리고 가려느냐?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지난번과 같은 이유였다면 키르하스 또한 두고 갔을 거요. 하지만 이번엔 정말,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소.”

“···말해 보거라.”

“사태가 끝나고 말레이른의 보호 주문이 파괴되면, 그 뒤에도 문제가 남소. 서펜트 킹의 기함을 파괴하기 위해선 보호 주문 뿐만 아니라, 저 내구성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물리적 파괴가 필요하니까. 함포 사격으로는 불가능할 것이오.”

엘프 왕의 기함을 파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물질 세계에 셋 있으니. 대악마의 저주, 드워프의 화력, 그리고 용의 숨결이라.

물질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용이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웃었다.

“네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하겠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뒷일도 고려하고 부탁하는 것이니. 전력을 다하진 말고, 다만 작은 틈만 만들 수 있으면 족하오.”

“내가 어찌 삶에 미련을 가지겠느냐.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이 아니냐.”

“그대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전장이 아닐 뿐더러, 나는 그대가 그대의 삶에 보다 미련을 가졌으면 하오.”

페르난데스는 아벨의 크게 뜨인 눈을 한번 바라보고는 구명정의 키를 잡았다. 기함에 걸린 줄을 끊자, 거친 바람에 돛이 찢어질 듯 펄럭이며 구명정이 쏜살같이 바다 위로 나아갔다.

*

키르하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돛줄을 쥐었다. 눈보라 속에서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오른 돛을 감당하는 것은 설령 능숙한 항해사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돛이 찢어지거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난파된 함선들, 또는 엘프의 군함들에 처박힐 위기였다.

-우드드득.

돛대가 바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활처럼 휘고 있었다. 키르하스의 양손바닥에서 핏물이 스며나와 돛줄을 적셨다. 상처를 입는 것은 상관 없었다. 그러나 피로 인해 미끄러워진 줄이 손아귀에서 자꾸 벗어나려 들었다.

‘죽는다.’

죽음이 보였다. 정신없이 내달리는 구명정과 사방에 흩어진 난파선의 조각들, 빠르게 가까워지는 엘프의 군함들, 그리고 눈보라 사이에 몸을 묻고 있는, 실루엣만으로도 성벽을 보는 것 같은 거대한 말레이른의 기함까지. 사방에 죽음이 가득했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키르하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키를 잡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거친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는 꼿꼿이 선 채 그저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조타 실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디모니카의 근력이 압도적인 탓일 것이다. 구명정은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하게 잔해물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내가 실수하면 은공께서 위험하다.’

페르난데스가 키르하스를 굳이 데려온 이유. 고작 돛줄을 잡을 손이 필요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의 계획에 그녀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자신의 주군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역할이 아닐 것이다.

키르하스는 있는 힘껏 돛줄을 당기고, 이따금 풀어내며 바람을 감당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페르난데스는 그저 말레이른의 기함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돌고 있군.”

레이아는 거의 폭주하는 듯한 속도로 내달리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잔해물과 군함 사이를 스치듯 움직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모든 위협들을 용케 피해내며 달리고 있었다.

그저 바람에 몸을 싣고 내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레이아는 그 사이에서 어떤 규칙성을 보고 있었다.

“말레이른의 함선을 중심으로 돌고 있어.”

*

-재미있군.

페이자쉬가 속삭였다. 만일 고개를 끄덕일 여력이 있었다면, 페르난데스는 보다 적극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륜을 쥐고 있는 손아귀가 당장이라도 꺾일 것처럼 욱신거렸다. 사실 그의 손목 힘줄과 근육들은 수 차례 파열되고 다시 이어 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디모니카의 육신, 그리고 독자적인 신성을 구축해가는 그의 영육이 상처를 수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양손이 터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기함에 걸린 주문을 파악하고, 함선의 잔해물들을 피하며, 기함을 겨냥한 레이아의 군함들을 파악했다.

‘남남동 총 30문.’

바람과 함께 군함의 지척을 스쳐가며, 페르난데스는 군함이 겨냥한 함포의 수와 각도, 피격했을 때 닿을 위치를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뇌가 달아올라 뇌수가 들끓는 감각이었다.

그의 예리한 감각, 초월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반응속도가 수많은 정보들을 입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고의 층을 넓혀 전장의 모든 함선, 모든 함포, 그 모든 함포의 각도, 그리고 말레이른의 기함과 그 변수까지 덧칠해나갔다.

일종의 로드맵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주 구체적이고, 동시에 입체적인 지도가 그의 뇌리에 뚜렷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중추절 3번항에 변주를 더했군. 가변항이 다섯 묶음이야. 그것까진 그렇다 쳐도, 각 가변항에 위치한 난수발생적 회로구성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총···.

‘계산상 113가지.’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드넓은 도서관, 수많은 서고에서 단 하나의 책을 꺼내 한 페이지를 펼치고 보지 않은 채로 다섯 번째 단어를 맞춰야 하는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물질 세계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 모든 순간에 당사자조차 예측 불가능한 패턴으로 변하는 다섯 겹의 보호 주문을 동시에 파괴해야, 그의 기함에 물리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이것은 입방체 퍼즐을 푸는 것과 같았다.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고안한 삼차원 퍼즐을, 양손을 묶은 채로 풀어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피리리리릭···. 펑!

저 멀리에서 노란 폭죽이 하늘 위로 터졌다. 모든 함포에 정렬이 끝나고, 이제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천천히 한 손을 뗐다.

-우드득.

한 손으로 타륜을 제어하려 들자, 오른손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압력을 받는 오른손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는, 다른 손으로 뿔나팔을 입에 물렸다.

*

[북북서 32번함 우현 3번포 발포]

-콰아아아앙!

*

포성이 울리는 것을 들으며, 페르난데스가 키를 살짝 꺾었다. 그의 구명정이 크게 반원형을 그리며 말레이른의 기함 근처를 선회했다. 그의 요청대로, 레이아는 모든 포환에 주문 쐐기 주술을 입혀 두었다.

주문 쐐기가 박힌 포환이 말레이른의 보호 주문을 때렸다. 놈의 보호 주문엔 어떤 생체기도 나지 않았지만—

[정동향 2번함 좌현 5번포 발포]

-콰아아아앙!!

첫 포성이 울린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포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기함을 바라보며 연신 속삭였다.

[남서 12번함 우현 8번포 발포]

[남남동 7번함 좌현 1번포 발포]

빙글, 기함을 중심으로 다시 선회하며.

[북북서 31번함 우현 5번, 12번, 15번포 발포]

-콰아아아앙!

멈춤 없이, 페르난데스의 명령이 각 함선에 전달되고, 곧장 포성이 울려 퍼졌다. 포환이 끊임없이 날아 말레이른의 기함을 두드렸다. 모든 포환은 공중에서 보호 주문에 막혀 바스라졌지만.

-1번 가변항 파괴 성공. 좋아. 재밌군.

마법의 사용이 불가능하고, 적의 마법이 유적 규모라. 직접적인 파괴는 어림도 없고, 활용할 수 있는 팻감은 극히 제한적이며, 적은 그의 두 배가 넘는 기물을 다루는. 비대칭적 체스판 위에서.

[북북동 3번함 4번포 발포]

-콰아아앙!

반드시 자신의 마력 회로를 사용하고, 스스로 수인을 짚어 맺어낸 마법만을 ‘마법’이라 할 수는 없다. 마법이란 마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상 현상의 총체를 의미하며. 그것이 설령 포환과 화약으로 자아올린 저급하고 물리적인 현상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거칠고 투박한 도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장인이 쥐고 휘두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충분히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칼이 되는 법이니.

-콰아아아앙!

다음, 또 다음. 포격이 말레이른의 기함을 두드렸다. 끊임없이 변하는 놈의 보호 주문, 그 패턴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매 순간 다른 방향으로 주문 쐐기를 박아 넣으며.

마법전이란 상대의 마법을 파훼하는 스펠카운팅을 기본 골자로 둔다. 상대의 주문, 어절, 패턴. 그 사이의 가장 약한 부분에 쐐기를 박아 강제로 멈춰 세우며 주문을 파괴하는 것.

단순히 적의 마법에 반대항의 마법을 때려 박아 무효화 시키는 것은 너무나 저급하고 단순한 방식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선호하는 마법전은 보다 세련된 기술을 요구했다.

-콰아아앙!

가장 적확한 타이밍을 잡는 센스, 마력의 흐름을 읽는 시야, 회로와 어절의 약점만을 정교하게 노릴 수 있는 지식까지.

수십 년간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에 달했던 마법전에서. 생사를 오가는 그 치열한 모든 순간에서. 페이자쉬는 단 한 차례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콰아아앙!

흩날리는 눈보라 사이로, 말레이른의 주문이 천천히. 실금이 거미줄처럼 얽히듯이. 알이 깨어져 나가는 것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눈보라를 품은 바람이 전장을 휘몰아쳤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어 마치 악단의 지휘자처럼 흔들었다. 포격, 포격, 다시 포격. 그 모든 포격이 정확히 보호 주문의 약점에 틀어박히도록. 완벽한 타이밍과 패턴으로.

-아주, 아주 즐겁군.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펄펄 끓는 뇌수, 과열된 동맥을 절절히 느끼는 이 순간에도.

단 한 번도 같은 패턴으로 변하는 법이 없는 지독하게 정교하고 복잡한 주문을 하나하나 파훼하며, 그 정밀한 입체 퍼즐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이 모든 순간들이 더 없이 짜릿하게 느껴져서. 그는 달뜬 머리를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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