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2) >
*
말레이른의 기함, 바다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요새. 수많은 보호 주문과 축복으로 감싸인 해상 최강의 함선에서, 수십 발의 포격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물보라가 치솟는다. 레이아의 기함들은 회피 기동을 시작했지만, 너무 붙어있던 탓에. 그리고 적함과의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포격에 휘말려 좌초하는 함선들이 속출했다.
해상은 다시 난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순간에도 질서정연하게 산개대형으로 흩어지는 레이아의 함선을 보며 감탄했다. 이들에게 이런 전투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말레이른과 해상에서 교전을 해봤다고 했었지.
‘그래. 대단하군.’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다. 말레이른의 기함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연신 포격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 정밀도와 장전 속도에서 레이아의 함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콰아아앙!
레이아의 함대에서 대응 사격이 이어졌다. 포격이 서로의 함선을 향해 포격이 빗발쳤다. 그러나 선원들의 숙련도 뿐만 아니라, 함선의 피탄 면적 차이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레이아가 이끄는 가이메른 함대는 단 서너 발의 포격으로도 좌초되지만, 말레이른의 기함엔 그을음만 남을 뿐, 가시적인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서펜트 킹의 기함은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그래, 물리력을 넘어선 힘. 물질 세계 자체에 간섭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필요하다.
강력한 힘의 폭발과 응축은 물질 세계에 물리력 이상의 간섭을 할 수 있었다. 레이아에겐 그 정도의 무기가 없었다. 말레이른이 걸어둔 보호 주문은 파괴했지만, 그 이상의 타격을 입히기 위해선.
-용이 필요하지.
페르난데스는 뿔나팔을 입에 물며 속삭였다.
“아벨레사스. 지금이오.”
*
번쩍, 천둥벼락이 내려 꽂히는 듯한 광휘가 한 차례. 함대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말레이른의 선원들은 성가퀴 위에서 섬광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인가?”
“함선의 대마법 보호 주문 복구까지 이제 30% 이상 남았습니다.”
“마법사들. 전원 대마법을 준비하라. 함포에서 떨어져.”
성가퀴에서 저 멀리, 아래를 내려보며. 선원과 와일드프린스들 그 누구도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기함의 방어력은 해상 최강이며, 물질 세계에서 이 보호를 파괴할 방법 따윈 없었다.
레이아의 병력은 재빠르고 귀찮았지만. 그뿐이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하나씩 찍어 누르다보면, 놈들의 자원엔 반드시 한계가 온다.
-고오오오···.
섬광이 터진지 다소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런 공격이 없었다. 심지어 적함의 포격조차 멎었다. 와일드프린스가 마법사들을 바라보자, 마법사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문에 실패했나?”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분수를 넘어서는 주문을 시전하는 와중에 백래시로 사망하는 마법사들은 흔하다면 흔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격전 한복판에서 그렇게 무능하다고?
비록 적들의 포격이 요새의 성벽을 허물 수는 없었지만, 운 나쁘게 성벽을 넘어 곡사로 내려 꽂히는 포환이 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함선의 승무원들은 갤러리의 총안 근처에 엄폐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말레이른의 주문이 회복될 때 까지 이제 50%. 성가퀴의 마법사들은 함선을 감싸는 마력 회로에 상처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서펜트킹이 직접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저 깊은 구중궁궐 속에서.
“하, 무능한 것들. 시간을 버릴수록 승기가 멀어질 터인데.”
와일드프린스는 가이메른의 어린 여왕을 비웃으며 손짓했다. 성가퀴에 엄폐하고 있던 선원들이 하나 둘 일어나 포대로 향했다. 포격전을 재개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왕의 주문이 완성된다면, 이제 저들에겐 승산이 없었다.
그들의 왕, 물질 세계 최고의 마법사. 천각마탑의 말레이른에겐 같은 수가 통하지 않을 테니.
-화르륵.
그때, 성가퀴의 와일드프린스는 하늘에서 쏟아지던 눈송이들이 발갛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
발갛게? 아니, 눈송이가 불똥처럼 튀고 있었다. 겨울 바다의 한기가 어느새 사라져, 땀이 날 정도로 후덥지근하게 변하고 있었다. 고도에 위치한 성가퀴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온도였다.
“눈이 불타고 있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눈은 물이야. 물이 어떻게 탄다는 거···.”
“···마법? 마법인가?”
와일드프린스가 황급히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곧 화들짝 놀라며 성벽으로 달려갔다.
“뭔가? 무슨 일이냐?!”
“···용입니다. 경, 용, 용이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대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성벽을 감싸며 천천히, 이젠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와일드프린스와 마법사들, 그리고 선원들은 곧, 그들을 열기보다 더 강하게 내려 누르는 어떤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포식자의 존재감. 준신과 반신들을 사냥하는 신살자들에겐 익숙하다면 익숙하다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감이···.
새파랗게 질린 마법사들이 멍하니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저 멀리에. 이글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대기 너머에서, 흐리게.
용이 함선 위에서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피해ㄹ···.”
하지만, 어디로? 말이 끝나기 전에, 생각이 마무리되기 이전에. 액화된 화염이 성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
-콰아아아앙!!
페르난데스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선체를 붙잡고, 튕겨나가는 키르하스를 한 팔로 끌어안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충분히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아벨로부터 뻗어 나온 화염 기둥이 바다를 증발시키고, 대기를 불태우며 말레이른의 성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성벽은 용광로에 떨어진 철괴처럼 붉게 달아오르다가, 이윽고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거듭된 충격에 바다가 흔들리고, 해일이 일었다. 말레이른의 기함마저 뒤흔들릴 거대한 충격이 기함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페르난데스의 구명정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우드득.
돛줄을 잡은 손과, 키르하스를 끌어안고 있는 팔. 그리고 이 작은 구명정 모두에서 파열음이 들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의 목에 핏줄이 솟았다. 그의 몸이 파괴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디모니카의 육신, 그리고 신성을 담기 시작한 그의 영성 덕이었다.
“은공, 파, 팔이.”
“너 때문에 부서진 거 아니다.”
아까 타륜 잡으면서 부러진 거야. 페르난데스는 겁에 질린 키르하스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영원 같았던 화염의 투사가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반 이상 허물어진 성벽은 붉은 쇳물을 흘리며 붕괴되고 있었다.
저 범위 안에 있던 이들은 아마도, 시체도 남기지 못한 채 기화되었을 것이다. 엄청난 열기를 등으로 받았던 탓에, 옷이 타들어가고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봐, 육신은 좀 괜찮나?
‘오히려 정신이 드니 차라리 낫군.’
과도한 정보와 연산으로 달아올랐던 뇌수가 고통 탓에 오히려 침착하게 식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다독이고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파도가 잦아들고 있었다.
“은공?”
“닻을 끌어 올려라, 키르하스.”
“은공은 더 싸우실 수 없습니다. 양 팔이 지금···.”
“그게 뭐?”
페르난데스는 뒤틀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디모니카의 신성이 담긴 혈액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그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릴 시간만 있다면, 하루 안에 회복할 수준의 상처였다.
하지만 하루를 버릴 수는 없었다. 아벨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 놓은 기회를 이렇게 무산시킬 수는 없었다.
-기이이잉.
그때, 말레이른의 기함에서 기이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함을 노려보았다. 놈의 함선에 마력회로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찔러 넣었던 주문 쐐기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수준이 대단하군.
‘상대는 엘프 최고의 마법사야. 저 정도는 해야지.’
단순히 체내의 마력 회로에 박힌 쐐기라면 이를 회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회로를 온전히 장악하는 것이 마법의 시작이니. 그러나 그 규모가 함선, 그것도 엘프 왕조의 기함 전체에 흩어진 회로 수준이라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 놈에게도 한 수가 있다 이거지.’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회로의 회복이 생각보다 빨랐다. 놈의 보호 주문이 활성화 될 때 까지 앞으로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주문이 완성된다면, 설령 성벽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도함은 불가능했다. 놈은 더 철저하게 대비할 터였으니.
본디라면,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었다. 남은 일은 군대와 군대의 접전 뿐이었다. 이제 같은 수준으로 내려온 기함을 향한 공성전이 이어질 차례였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말레이른이 품고 있을 신성을 강탈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렇게 편안하고 쉬운 길을 택할 여지가 없었다.
‘좋아. 손은 움직이는군.’
한 없이 약한 수준이었지만, 간신히 일반인 수준의 힘까지는 복구되었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 저 성벽에 접근해야 한다.”
“레이아 여왕의 군대를 기다려야 합니다. 홀로 도함해서 승산이 있겠습니까.”
“계산이 앞설 시기가 아니다. 이건 시간 싸움이야. 함께 하겠느냐.”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됩니다. 은공.”
키르하스는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바다, 열기로 걷힌 구름에 겨울철 밤하늘의 달빛이 내리 쪼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를 잡았다.
-끼이익.
반쯤 부서진 구명정이, 녹아내린 성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아타일라틀. 먹음직스러운 신성이로군.”
새하얀 머리칼이 바닥까지 물결쳐 흘러내리고, 그 위로 뿔과 나뭇가지를 복잡하게 얽어 만든 관이 올라가 있다. 머리칼처럼 새하얀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찡그렸다.
“폐하, 함선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피항하심이···.”
“쉿.”
사내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로 올렸다. 그 행동에, 어전 아래에 몸을 굽히고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왕의 손가락, 그리고 흘러내린 소매 자락 안으로 보이는 하얀 팔에 보라색 문신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빼곡하게 그려진 문신들이 음울한 빛을 띄며 번들거렸다. 왕은 옥좌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꺼져가는 것이 둘,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 하나. 하, 훌륭하군.”
왕은 노래하듯 속삭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두쿵.
어전 너머, 빛조차 닿지 않는 깊은 내부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메아리쳤다. 달과 별이 부조된 화려한 어전 아래에서, 사내는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재밌어. 신성을 부풀려 여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
“신들이 개입한 것이 아닐런지요?”
대신의 의문은 타당했다. 신이 아니고서야 이 위대한 서펜트 킹의 마법에 도전할 수 있는 필멸자가 있을까. 왕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구나. 내 저 아타일라틀이 낯이 익다. 아벨레사스. 그래. 인간들의 수호룡. 그녀가 엘프를 돕는다면, 그 사이에 그녀의 간택을 받은 인간이 있으렸다.”
“용이 어떻게 이 시대에 살아있을 수 있는지···.”
“그녀의 죽음은 먼바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살아있던 것이 아니라, 살아난 것이겠지. 저 마법사에 의해서. 재밌군. 승산이 있다 여겼으니 여를 불러낸 것일 터. 그 수가 무엇인지 흥미가 있다.”
-두쿵.
왕은 속삭이듯 말하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다시 심장 박동 소리가 홀을 울렸다.
“적들이 도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동부 외벽이 완전히 파괴되어, 함상 백병전을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전하. 병력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예?”
“가이메른의 어린 여왕이 도선을 시작하기 전에, 여의 주문이 회복될 것이다. 너희는 그저 단 한 인간을 막아라.”
왕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회백색 불길이 타오르는 눈이 대신을 훑었다. 대신들은 시선이 닿자 움찔 떨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놈에게 어떤 수가 있는지 파악해라.”
“그러한 마법사가 있다 한들, 감히 홀로 기함에 도선하려 들겠습니까?”
“그럴 것이다. 놈 또한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왕은 피식 웃었다. 즐거운 유흥이지만, 왕은 결코 도박을 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설계된 판도 위에서, 오로지 승산 높은 수만을 착수할 뿐.
“놈이 생각하는 시간조차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까지.”
-두쿵.
홀에 심장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신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텅빈 어전에서, 왕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왕은 도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흥은 필요하니. 최대한 발버둥쳐 보거라.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왕은 픽 웃고는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두쿵.
어전의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자리 부조가 심장 박동에 따라 보라색 빛을 띄며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