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3) >
*
자욱한 해무와 열기로 성벽 위엔 병사들이 감히 발을 딛지 못했다. 아벨의 입김이 쏟아질 때에, 성채 위에서 전투를 준비하던 대기 병력 전원이 증발한 탓이다. 항해사들도, 심지어 와일드프린스들 조차도 성벽 위로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 적들의 도함이 코 앞에 닿았거늘, 망루를 지킬 용사 하나가 없단 말이냐!”
“하, 하지만 경. 요, 용이 있습니다!”
“선조님들이 통탄하시겠구나. 그 시절엔 심지어 용이 흔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 시절에도 천하를 호령했단 말이다!”
그렇게 자신이 넘치면 네가 올라가던가. 항해사들은 고래고래 소리치는 와일드프린스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침묵이 감도는 성벽 위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촤르륵. 탁.
성가퀴에 사슬이 걸리는 소리였다. 엘프의 예민한 청각에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와일드프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눈을 가늘게 뜨며 해무 사이를 노려보았다.
“놈들이 도함했다. 전투를 준비해라!”
“마법사들, 마법사들은 무엇 하는가! 함상 방어벽은 얼마나 남았지?”
“9할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법사들의 외침을 들으며 와일드프린스는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도함을 시도한 잡병들만 물리치면 기함이 없는 놈들에겐 승산이 없었다.
-피리릭.
곧 파공성이 들리기 전까지, 와일드프린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탓에 그는 웃는 낯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 한 가운데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덜렁거렸다.
“무, 무, 무슨!”
“전원 전투 준비!!”
날선 소리와 함께 항해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마법사들은 황급히 바람을 불러 일으켜 해무를 밀어냈다. 거친 바람이 불고, 자욱한 안개가 잠시 걷히자 그 사이로 한 쌍의 남녀가 걸어 오고 있었다.
*
단검 투척은 거의 본능의 영역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 숙련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얼얼한 어깨 근육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일반인 수준의 근력으로 구사하기엔 너무 거친 움직임이었다.
‘이거 익숙해지질 않는군.’
-하하,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겠어?
‘그래. 옛날 느낌이 물씬 나네.”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를 따라 웃으며 걸었다. 수많은 적들이 창칼을 쥐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함선 전체에 흐르는 마력이 농도를 한층 더 끌어올려 이제는 눈에 그 흐름이 보일 지경이었다.
수많은 병사들, 강대한 마법사, 위협적인 적수···. 그 옛날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피로하고 약해진 육신까지도.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겐 과거의 찬란했던 마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불패의 영웅이 함께 있다는 점이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방인! 너희의 우군은 도착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지.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한 발자국 더 내딛었다. 적들이 시위하듯 칼을 절그럭거렸다. 그 와중에 칼날을 뽑은 병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들 모두가 엘프 검술을 익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걸음을 이어 나가며 속삭였다.
“나는 지금부터 힘을 비축하겠다. 키르하스. 내 몸에 닿는 칼들을 너에게 맡긴다.”
“제가 은공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그 말을 들으며 달렸다. 엘프들의 칼이 빠르게 뽑혀 나와 그에게 쏘아지듯 날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챙!
다섯 자루의 칼날이 허공에서 끊어졌다. 키르하스가 그의 곁을 따라 달리며 연신 팔을 휘둘렀다. 칼을 튕겨내고 창을 부러트리며 단 한 번의 공격도 페르난데스에게 닿지 않도록.
-챙! 카드드득!
칼을 튕기고 부러트리고, 적의 팔을 자르고 배를 차고, 빠르게 자리를 바꿔 다시 칼을 세 번 휘두르기까지. 키르하스에겐 고작 십여 초의 시간만 필요할 뿐이었다.
‘대황야의 방패. 과연 명불허전이군.’
-더 대단한 건, 저게 끝이 아닐 거란 거야.
그녀에게 불패자 키르하스의 영혼이 깃든 것이 고작 수 개월 안팍이다. 그 기간 동안 그녀의 성장은 놀라울 지경이었다. 키르하스의 눈이 빛날 때 마다 적들이 허물어지며 길을 열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키르하스는 말 그대로 엘프들을 도륙내며 길을 열고 있었다. 손목 어림이 뻐근하고 격한 움직임에 몸이 달아올라 후끈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푸른 길이 보였다. 승리를 향한 길이. 과거엔 단순히 ‘페르난데스를 향해 뻗은 길’이라 생각했던 그 본능적인 감각은, 대황야에서 호족 연합을 이끌며 발달해 이젠 승리로 이어지는 궤적이 되었다.
어떻게 뽑아 어떤 방향으로 휘두르는 것이 최선일지. 어떤 움직임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적의 공격을 피해야 안전할지. 그녀의 선천적인 재능과 본능적인 감각,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혼에 쌓아 올린 경험이 만들어내는 최적의 해법이 보였다.
전장에서, 그리고 전투에서. 키르하스는 지휘관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인류 최고의 야전사령관이 될 재능이 있었다. 그녀의 눈엔 이제 격전 속의 흐름이 보였다.
-챙!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칼날을 비틀어 튕기며 바로 지척에 다가온 다른 병사의 목젖을 치고, 몸을 반바퀴 돌려 페르난데스에게 다가오는 창날을 꺾는 것이 단 한 동작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아니야···. 저, 저 계집은 인간이 아니다!”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지금까지 신을 사냥하며 느꼈던 어떤 종류의 막연한 불안감을 체감하고 있었다. 언젠간 이 모든 일들이 업으로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챙!
부러진 칼날이 핏방울과 섞여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폭풍과 같은 칼날이 사방을 난도질해 강제로 전장에 길을 열어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이제 갑판을 지나 선체 내부로 진입하는 대문을 볼 수 있었다.
‘훌륭하군.’
여기에 닿기까지 정말 단 한번도 칼을 뽑아 휘두르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동분서주하며 헐떡이는 키르하스를 바라보며 짧게 감탄했다. 영웅의 재능이라.
밀집된 병사들을 뚫고 나가 무력화시키는 것은 마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오히려 더 간단했다. 그러나 한낱 육신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이는 것은, 오히려 마법보다 기적에 더 가까운 일.
신들의 축복, 노력의 산물, 지독한 운, 또는 수 천년간 지속적으로 진화한 생물종의 정점.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심지어는, 그런 그녀가 이 물질 세계에서 저 홀로 ‘최강자’라 자부하지 못하는 시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피와 살점, 내장 조직들이 난무하는 협로를 따라 걸으며 웃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다가오는 엘프 병사들은 없었다. 모든 병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키르하스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맹수의 눈처럼, 어두운 겨울밤 속에서도 저 홀로 빛나고 있었다.
‘황혼이라 부르고 싶군.’
이토록 뛰어나고, 이토록 강력한 영웅. 한 세대에 단 한 사람이 탄생하기도 어려운 이 빛나는 영웅. 그러한 영웅들이 날뛰고, 그 영웅들의 앞을 가로막는 강대한 적들이 횡횡하는 이 시대를.
문명 사회가 쌓아 올린 산물들의 정점. 그 어떤 시대에도 이렇게 많은 인재들, 이토록 많은 영웅들이 나타난 시대가 없었다. 그러므로, 페르난데스는 이 시대를 황혼이라 여겼다.
가장 강렬하고 아름답게 타오르는 석양처럼. 페르난데스는 저 먼 하늘에 어린 달무리를 힐끔 바라보고는, 선실 내부로 저벅, 걸었다.
‘황혼의 끝엔 밤이 찾아오니.’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가 막아낸 멸망의 단초는 그 일부에 불과했다. 진정한 적, 거대한 악이 여전히 이 세계 배후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멸망까진 시간이 남았고, 그것이 내일이 아니리라 믿으며. 페르난데스는 선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저벅.
발걸음에 수십 가지 소리가 얽혔다. 화려한 그림이 음각으로 벽면 가득 꾸며져 있고, 색색 유리알에 마력등이 난반사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엄한 홀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단단한 석조 벽돌을 밟으며 나아갔다. 그의 군화 굽에 바닥이 닿아 둔중한 소리를 냈다. 그 걸음 한 번에, 키르하스의 걸음 소리가 섞였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들. 그의 뒷편 십여 미터를 두고 천천히 따라오는 엘프 병사들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기습을 기다리는군.
‘소용 없어.’
할거면 진작 했어야 했다. 키르하스가 충분히 지쳐서 반응이 둔해졌을 때. 그러나 속도를 낮춰 걸으며 놈들은 키르하스에게 회복할 시간을 준 셈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천장의 석벽과 샹들리에, 그리고 복잡한 문양의 들보들 사이로 암살자들이 숨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벅.
길을 잘못 들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이 앞에 무언가 다른 암수가 있는 것일까? 페르난데스의 예민한 감각에 그런 것 따윈 잡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이 함선의 마력을 읽으며 그 중추로 거침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엘프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을 도륙내고 피로 길을 터버린 전사, 그리고 그 전사를 부리는 기이한 사내가. 마치 제 집인양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이 똑바로 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말레이른의 기함이 가진 별명은 구중궁궐이었다. 수많은 문과 통로가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단 한 차례도 길을 잃지 않고 그저 똑바로 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페르난데스는 멈춰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홉 개의 가지가 돋아있는 거대한 나무의 부조가 그려진 장엄한 문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상고 엘프어로 온갖 축복과 전설이 새겨진 문이었다.
그가 멈추자, 그를 따라오던 병사들과 암살자들도 함께 멈춰 섰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문 앞에서 창을 들고 있는 두 거한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두 엘프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갑주를 입고 있었다.
“이 이상 접근을 불허한다. 이방인.”
“그렇게 나왔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두 번 묻진 못하더군.”
“이번엔 다를 것이다.”
-스르릉.
두 엘프가 거의 동시에, 같은 자세로 몸을 낮추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멋스럽게 납도했다. 칼날이 칼집 안으로 들어서고, 두 사내의 검지 손가락이 칼자루에 얹어졌다.
완벽한 엘프 검술 기수식이었다. 그들은 반개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하더군. 너희 씨족의 병사들, 그리고 심지어는 와일드프린스라는 녀석들까지도. 하나같이 너무 질이 떨어졌어.”
페르난데스는 한 걸음 나아가며 말했다. 방금 놈들이 칼을 뽑고 있었을 때, 놈들의 검신을 이미 보아 두었던 덕에. 그는 정확히 엘프 검사들의 거리 바깥에서 멈췄다.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그 위대한 고대의 마법사가 이룬 사병들과 그에게 직접 사사한 마법사들.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약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의 수족을 망쳐놓은 것처럼.”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굳게 닫힌 어전의 대문을 노려 보았다.
“무슨 꿍꿍이냐. 말레이른.”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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