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52화 (153/388)

< 152. 군왕의 황혼 (1) >

*

-쿠구구궁···.

거대한 문이 먼지를 떨어내며 밀려나갔다. 엘프들은 당황하며 문의 입구에서 몸을 돌렸다. 곧, 바람이 휘몰아치며 눈송이가 흩날렸다.

페르난데스는 얼굴에 달라붙는 굵은 눈송이들을 한 손으로 막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흑요석처럼 검게 반짝이는 매끄러운 석재 장판이 드넓게 깔려 있고, 보라색 비단으로 장식된 화려한 테피스트리가 사방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들어오라.”

옥좌의 위에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엘프가 말했다. 그의 새하얀 머리칼이 바닥까지 흩어져 있었다. 아주 조용히 말한 것 같았는데, 들리는 것은 이 건물 전체를 쩌렁하게 울렸다.

-철컥.

그가 속삭이자, 엘프들이 거의 동시에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엘프들은 덜덜 떨며 말레이른의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단순한 카리스마나 지배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기괴한 복종에 눈살을 찌푸리며 걸어갔다.

엘프 검사들의 검격 범위에 들어갔음에도, 검사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바닥에 박고 덜덜 떨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사이를 걸어 어전으로 들어갔다.

-쿠구구구궁···.

그의 등 뒤에서 어전의 문이 닫혔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내려보며 미소 짓고 있는 말레이른을 향해 걸어갔다.

“오라, 용사여. 인간의 영웅이여 기꺼이 어전에 들라. 여는 너희의 입궐을 흔쾌히 허하노라.”

“허락?”

허락한 것 치고는 허수아비들을 좀 많이 죽인 것 같은데. 페르난데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말레이른이 큭, 하고 웃었다.

“그래, 허한다 한다면 우습긴 하지. 인간. 놀라운 무위를 보이더군.”

“보고 있었나?”

“그러리라 생각했지 않았나. 여는 너희 중에 마법사가 있으리라 예상했거늘, 너희에게선 마력도, 회로도 느껴지지 않으니. 다만 빈 그릇과 새로 차고 있는 그릇만 보이더구나. 너희는 누구더냐? 그리고 너희를 이리로 이끈 마법사는 어디에 있느냐?”

말레이른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끊임 없이 꿈틀거리며 무언가를 조율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마력 매듭이 순식간에 수어 개씩 새롭게 자아지는 것을 보았다.

‘의식을 하고 있었군.’

-의식을 진행하면서 외부에 마력을 투사하고, 동시에 우리와 대화를 한다고? 터무니 없이 위험한 짓거린데.

‘딴에는 자신 있는 모양이지.’

페르난데스는 보라색 비단을 밟고 천천히 말레이른을 향해 나아갔다. 철컥, 등에 걸린 고리를 풀고 대검의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걸쇠가 풀린 대검이 당장 뛰쳐나올 듯 부르르 떨렸다.

“인간, 너희는 어째서 우리 종족의 사사로운 내전에 개입했느냐?”

“널 꼭 만나고 싶었거든. 말레이른.”

“기개가 넘쳐 오히려 만용처럼 보이는 사내로다. 하하하.”

말레이른은 너털웃음을 짓고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소매가 스륵 밀려 내려가며 그 사이로 하얀 피부와 그 위를 온통 덮고 있는 보라색 문신들이 보였다.

-루네글리프.

‘루네글리프···. 베레일데 학파가 아니라, 루네글리프를 배웠다고?”

페르난데스는 소매 사이로 잠시 보였던 문신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루네글리프, 북부인들의 전통 마법 체계. 엘프식 마법 구사 기술은 아니었다.

“여를 만나고자 했다라···. 결코 고운 이유는 아니겠지. 어디 말해보거라.”

“가이메른은 영생을 위해 육신을 바꿔가며 목숨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놈은 명백히 퇴화했지. 마법도, 힘도 소실한 채로.”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옥좌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말레이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감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랬겠지. 여와 그 치가 견뎌야 했던 시간은, 필멸자에겐 가혹한 시간이었으니.”

“하지만 이 함선 외벽의 주문. 그리고 그 주문을 회복하고 재구축하는 마법. 그건 단순히 감각이나 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건 실제하는 마법사, 그것도 아주 뛰어난 마법사의 소행이지.”

엘프들이 대양으로 쫓겨난 것은, 세 명의 서펜트 킹이 그들의 신을 죽이고 그 신성을 강탈한 이후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기함은, 엘프 만신전이 무너진 이후에 탄생한 것이란 뜻이다.

가이메른의 경우처럼, 말레이른의 마법과 힘 또한 세월 아래에서 삭고 무뎌졌을 것이다. 천여 년이 흐르며 천천히 낡아갔을 것이다. 늙은 핏줄 아래에서 마력 회로는 점차 희미해지고, 근육은 부스러지기 시작했을 터.

진정한 의미의 탈각. 불멸자로 거듭나지 못했다면. 말레이른은 반드시 가이메른의 경우처럼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의 수명을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너무 젊어.

페르난데스는 그것에 주목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른의 외형은 너무 젊다 못해 어린 수준이다. 가이메른처럼 육신을 갈아탔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있다. 육신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마력 회로는 퇴색하기 마련이다. 기존 육신의 회로를 뜯어 이식할 방법 따윈 없으니, 그 세월 속에서 지식을 흐려지고, 마법은 소실되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함선의 주문은 너무나 견고했다.’

세월의 흐름을 정면으로 받아냈다고 하기에도, 이 함선의 주문 체계가 너무나 정교했다. 그리고 그 주문을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센스 또한 압도적이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필멸자가 자신의 힘을 유지한 채 수천 년을 견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호오, 그래. 계속해 보거라.”

“어떻게 그 세월을 건너서 마력 회로를 유지했지? 어떻게 육신을 바꾸고 살아남으면서도 마법을 유지할 수 있었나?”

페르난데스는 옥좌로 올라서는 연단 바로 아래에서 천천히 칼을 뽑아 올리며 말했다. 말레이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싱긋 웃었다.

“너였구나. 여의 주문을 파괴한 마법사가. 여 또한 흥미롭다. 너에겐 어떤 주문의 흔적도 없을진데, 어찌 여에게 대항할 수준의 마법을 구사했는지 말이다.”

말레이른은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흥얼거리더니,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팔뚝 전체에 감싸인 보라색 문신이 마력을 받아 번쩍거렸다.

“새로운 지식은 발전의 모태가 되지. 자, 여가 먼저 네 질문에 답을 내리겠다.”

말레이른이 딱, 손가락을 쳤다. 동시에 어둠에 감싸인 어전이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두쿵, 어딘가에서 둔중한 심장 박동이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오오···.

바람이 거칠어졌다. 창도, 문도 없는 이 거대한 어전에 눈보라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보라 사이로, 점차 밝아지는 천장 너머에.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어전을 밝히고 있는 광원이 눈에 들어왔다.

-두쿵.

그것은 심장이었다. 거대한, 보라색 심장. 음울한 광휘를 사방에 흩내리는 심장. 핏줄 대신 마력선이 이어져 있었고, 핏방울 대신 마력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심장이었다. 아마도, 신의.

-화르륵.

심장이 맥박칠 때 마다 그것에 연결된 마력선으로 끈적한 마력이 흘러내렸다. 긴 관을 따라 여과기들이 늘어서 있었고, 마력선들이 거미줄처럼 그 사이를 얽어 마치 핏줄 같았다.

‘하···.’

페르난데스는 짧게 웃었다. 유쾌하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를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마른 눈으로 마력선 사이에 걸려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건, 유해였다. 또는 유해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삭은 고치였다. 백발을 늘어트린 엘프들, 남녀노소를 막론한 엘프들이 천장에 매달려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페르난데스는 저들이 밤하늘 별자리를 묘사하는 주술적 심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말레이른의 힘의 원천을 깨달았다.

‘어쩐지, 병력의 질이 너무 저급했어.’

-종족의 모든 힘과 가능성이 한 사람에게 잡아먹혔다면.

‘그래. 그건 일종의 신이나 다름 없지.’

페르난데스는 메마른 눈으로 옥좌 위에서 웃고 있는 말레이른을 바라보았다. 말레이른은 자신감과 오만이 흘러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화르륵.

감긴 눈이 뜨이자, 새하얗게 타오르는 동공이 이글거리며 나타났다.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 마법사여. 이제 보이느냐? 여의 방법을 알겠느냐?”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힘을 온전히 유지하는 방법. 그래, 잘 알겠군.”

“아니, 아니다. 마법사. 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쌓는 방식이었다. 내 백성들이 곧 나의 힘이니.”

말레이른은 당당하게 웃었다. 만일 다른 군주들이 저런 말을 입에 담는다면, 그건 성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의 모습에서 거미가 떠올랐다.

맥박하는 신의 심장,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그의 먹잇감들. 그의 생과 젊음, 그리고 마력을 위한 먹잇감들. 그 깊은 거미줄 한 가운데에 도사린 거미.

-후웅.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빙글 돌려 거꾸로 꽂았다. 그는 폼멜에 손을 얹고 천천히 말레이른을 바라보았다.

“너희 종족의 취미쯤 되는가?”

“무엇이?”

“제 자식들, 제 부하들로 개짓거리를 하는 것.”

“개짓거리라. 마법사가 이 광경을 보고 한다는 말 치고는 재미있구나. 이 위대한 마법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화르륵.

말레이른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천장에 매달린 엘프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꿈틀거렸다. 천장 한 켠의 심장이 크게 울렸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여과기를 지나, 엘프들의 사이를 스치며 함선 너머로 흘러갔다.

페르난데스는 천장의 엘프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파악했다. 저들은 일종의 생체 마력 회로였다. 말레이른은 자신의 몸에 마력회로를 심는 대신, 자신의 백성들을 회로로 삼고, 자신의 군함을 육신으로 삼아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신의 심장이 그에게 마력을 공급하고, 백성의 육신이 마력을 조성하며, 이 함선 전체가 그의 마법을 구현했다. 말레이른 씨족의 다른 백성들은 그 몸에 기생한 기생충에 불과했다.

낯선 기법이 아니었다. 썩 유쾌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각 종족의, 그리고 각 학파의 마법 차이가 여상했음에도, 정점에 도달한 장인의 작품엔 어떤 종류의 공통점이 있다.

만류귀종? 아니, 차라리 수렴진화라 해야 마땅하리라. 페르난데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엘프 희생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으스러지도록 어금니를 물었다.

‘하.’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빠르게 육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휴식은 충분했다. 컨디션이 정상에 가깝게 돌아오고 있었다. 디모니카의 압도적인 회복력 덕에, 잠시간의 교전을 이어갈 출력은 충분했다.

“자, 인간 마법사. 지난 천 년간 여의 보호 주문을 파괴한 첫 필멸자여. 여는 엘프들의 지배자로서 그대에게 흥미가 있다. 여의 기함에 머무르며, 여의 말벗이 되겠느냐?”

말레이른이 잔혹하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왕.”

“마력이 느껴지진 않지만···. 너는 마법사가 맞다. 여는 네 방식에서 노련한 마법사의 것을 느꼈노라.”

“나는 이단심문관이다.”

-스르릉.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들며 칼을 바닥에서 뽑았다. 대검이 부르르 떨렸다. 열쇠검. 베이타서스의 성검이 피를 바라고 있었다. 천 년의 시간을 넘기 위해 자신의 종족을 수없이 희생한 거미의 피를.

-스르릉.

다른 한 손으로, 등에 걸린 다른 대검을 뽑아 올렸다. 연민검. 기사왕 다인의 검이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처형인의 검처럼. 제 백성의 업을 집어 삼키며 생을 위해 발버둥친 추한 아귀의 목을 원하며.

“그러니, 기도해라. 말레이른 왕.”

“우리 종족에겐 간구할 신이 없다. 여가 그들 모두를 죽였으니.”

말레이른이 웃으며 말하자, 페르난데스는 잠시 칼을 돌려 몸을 도사렸다. 당장이라도 뛰어 오를 자세로, 그는 말레이른을 향해 씹어 뱉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네 변론의 시간은 끝났다.”

“여는 변명하지 않는다. 인간. 고작 그 따위 칼 두 자루로 여에게 대항하려 드느냐?”

-콰지지직!

한 순간, 페르난데스가 사라졌다. 말레이른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곧, 그의 바로 오른편에 나타난 페르난데스가 보이지 않는 장막에 칼을 휘둘러 내려 찍고, 말레이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단을, 악마를, 그리고 마녀를 불태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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