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군왕의 황혼 (2) >
*
대검이 보이지 않는 벽을 내려 찍으며, 불똥이 튀었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이 가로막히자마자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피했다.
-콰지지직!
단단한 바닥에서 돌연 얼음창이 솟아 올랐다. 놈이 수인을 맺고, 그와 동시에 놈의 팔뚝에 그려진 루네글리프 문신에서 빛이 스멀거리는 것이 보였다.
수인의 결합, 마력의 매듭, 그리고 마법의 발현. 말레이른 수준의 마법사라면 거의 숨쉬듯 간단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공정이지만—
‘숨을 쉬듯 한다 해서, 그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호흡 마저도 찰나의 빈틈이 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빈틈. 산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그 빈틈이!
-카드드득!
대검이 휘몰아쳐 다른 방향으로 내려 꽂힌다. 거친 불똥이 성성한 눈발 사이에 난반사하고, 공격이 막히자마자 이미 페르난데스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 자리에 다시금 얼음창이 날아와 박혔다.
반 박자. 반 호흡. 그가 놈의 공세에서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단지 그 뿐이며, 고작 그 찰나의 번뜩임 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했다.
-콰득!
연신, 대검이 공중을 내려 찍는다. 그와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눈이 놈의 수인을, 그리고 마력의 매듭을, 이 함선 전체를 휘몰아치는 거대한 일종의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다.
뇌가 미친듯이 달아올랐다. 복잡한 연산과 정교한 움직임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일반인이라면 이미 과부하했을 수준의 가혹한 두뇌 활동이 강제되고 있었다.
-카득!
다음 공백을 친다. 말레이른은 연신 손을 휘두르며 공세를 막고, 반격을 넣고 있었다. 서로의 공격은 정교하게 합을 맞춘 두 무예가의 비무처럼, 서로의 몸에 단 한 차례도 닿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말레이른이 안광을 터트리며 고함쳤다. 놈의 방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단순한 손짓 만으로도 발현되는 수십 겹의 보호 주문이 그의 몸을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하는 행동은 단순히,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의 것과 다르지 않으나.
-쾅! 쾅! 쾅!
심장 박동 소리인지, 또는 방벽을 내리치는 대검의 소리인지. 이제는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머리가 달뜨고, 시야가 붉게 타올랐다. 검이 나아가고, 벽을 치고, 다시 물러나고, 그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돌리는 순간까지.
일련의 모든 순간이 한 호흡 안에 이루어지며, 단 한 차례의 머뭇거림조차 없었으니. 페르난데스는 양 손에 틀어쥔 대검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방벽을 칠 때마다 되돌아오는 탄성을 느꼈다.
무아의 경지에 다달은 검격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검술의 정교함을 추구할 여력이 없었다. 그의 두뇌는 상대의 마법과 주문, 그리고 그 발현에 온전히 집중되고 있었다.
그 완벽한 평정, 그 완전한 집중 상태에서. 페르난데스는 강철로 만들어진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쾅! 쾅!
조금만 더. 페르난데스의 안광이 짙푸르게 타올랐다. 대검으로 방벽을 치고, 곧장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 다른 위치로, 또 다른 위치에서 다시 대검을 후려치고—
-카득
방벽의 사이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이다. 페르난데스의 눈이 빛났다. 그는 허리를 숙이며 양손을 수평으로 맞춰, 두 대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이, 이런?!”
방벽이 깨어져 나갔다. 말레이른이 주문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그는 뒤로 몸을 튕겨 멀어졌다. 그는 공중에서 연신 수인을 짚으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어떻게 주문을 파괴했지? 물리력으로 파괴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었을터.’
말레이른이 수인을 짚으며 새로운 방벽을 준비하고, 다시금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천장에 매달린 심장이 거칠게 맥박치며 끈적한 마력을 그의 주문에 흘려 넣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마법의 신과 다름 없었다. 당장 복잡하고 초월적인 마법을 구사할 시간은 없었어도. 무한한 마력과 연산을 대신할 수많은 보조 연산장치들이 천장에 걸려 있는 이 자리에서는!
-콰아아앙!
그러나, 방벽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말레이른은 뒤로 물러서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의 주문을 이리도 쉽게···.
“마법사!”
그 순간, 말레이른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두 자루의 대검. 마치 야만성과 기사도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한 저 젊은 청년은, 저 어마어마한 무력에선 상상할 수 없었지만. 마법사였다.
주문의 매듭, 수인의 결합, 마력의 흐름, 마법의 구현. 놈의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은, 공격과 회피의 모든 간합, 그 모든 순간에서 오로지 자신의 손가락 만을 보고 있었다!
주문의 약점을 파악하고, 반 박자 빠르게 주문 쐐기를 박아 넣는 방식. 너무나 거칠고, 너무나 투박했지만.
“이···노오오옴!!”
말레이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로서는 시도할 수도 없는 섬세한 작업이라는 것에. 그 행간에서 그의 재능, 그의 노력, 그의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감각에.
자신이 절대자가 아니며, 저 어린 필멸자가 펼치는 마법전이 자신의 것에 비해 우월하다는 그 믿기 어려운 사실에. 말레이른은 공포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 힘은 무한하다! 고작 칼을 든 무부 주제에, 네가 감히 수천 년의 신비에 칼 두 자루로 대항하려 드느냐!”
“수천 년의 신비라.”
칼날과 땀, 열기와 강철로 만들어진 폭풍 한 가운데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수천 년을 이어온 그 장구한 타락. 너, 그리고 너와 비슷한 것들. 네놈들이 벌이는 각자의 이기적인 개짓거리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그 총화.”
-콰아아아앙!
방벽이 산산조각나며, 말레이른의 몸이 그 충격에 밖으로 튕겨 나갔다. 놈의 긴 은발이 허공에 너울지고, 곧 바닥에 힘 없이 주저 앉았다. 말레이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가오는 페르난데스를 노려 보았다.
“나는 그 모든 사건들의 종말 너머에서 왔으니. 말레이른 왕. 네가 이룩한 수천년, 네 백성들을 갈취하고 네 자식들을 흡혈한 그 수천년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너는 실패할 것이다.”
“너 또한.”
“아니!”
-후우우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창 없는 어전에서도, 눈송이와 바람이 휘몰아치며 거친 북해의 폭풍을 자아내고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에서 말레이른의 안광이 이글거렸다.
“나는 무한한 힘을 손에 넣었다. 나는 말레이른, 천개의 누각이 선 마탑의 탑주이며, 수천 비술의 마스터,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사슬을 끊고, 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
-콰지지지직!
얼음창이 사방에서 솟아 올랐다. 눈송이들이 일제히 얼어붙은 얇은 바늘로 변하며 페르난데스를 향해 몰아쳤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휘두르고, 달리며 공세를 피했다.
거의 본능적인 영역에서의 움직임이었다. 달아오른 페르난데스의 전투감각이 일깨운 경종. 어떤 전조도 없었던 위치에서 돌연 튀어나온 공격에, 페르난데스는 그 짧은 순간에 수십 개의 자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마력 흐름 자체가 안 보였는데.’
-마력 매듭이 없었어. 마법이··· 아니군. 그냥 갑자기 생겼다.
‘원인을 넘어서 결과를 만들었다고? 그건··· 권능의 영역인데.’
대검이 허공을 찢으며 눈발을 갈랐다. 거의 동시에, 그의 허벅지에 얼음창이 틀어 박혔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찰나, 페르난데스의 다른 팔이 대검을 휘둘러 바닥을 치고 몸을 튕겼다.
-콰득! 콰직!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수십 발의 얼음창이 내려 꽂혔다. 멈춰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점점 몸에 상처가 늘고, 몸의 균형감각이 엉망이었다.
생존본능이, 그리고 백척간두의 순간에서 달아오른 그의 재능이 개화하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도, 그의 본능, 어쩌면 육감이라 불릴 만한 전투감각이 그의 목숨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대검 또한. 눈과 강철로 만들어진 두 개의 폭풍이 마주쳐 대기를 찢어 발기고 있었다. 그의 전신 근육이 한계를 넘고, 임계점을 돌파해 삐걱이고 있었다. 인대가 끊어지고, 동시에 다시 이어붙으며. 오로지 디모니카의 육체 능력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순간으로.
-놈이 갑자기 어디서 권능을 깨우쳤거나, 지금까지 쌓은 힘이 경지에 도달해 신의 영역에 다리를 걸쳤을 수도 있고···.
‘신을 사냥해 모은 신성을 격발시킨 것일 수도 있고.’
현상을 파악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놈의 목을 딸 칼 한 자루 뿐. 페르난데스는 눈보라를 돌파하며 말레이른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고 있었다.
-콰아아앙!
이제 한 발자국, 놈이 그의 검에 닿을 그 거리에서. 말레이른과 페르난데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페르난데스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대검을 휘둘러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콰드드득!
그러나, 놈의 팔이 움직이며 허공에 방벽이 만들어졌다. 열쇠검이 방벽에 틀어 박히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그 짧은 순간. 그러니까, 한 호흡. 찰나와 같은 그 순간에.
“필멸자, 끝이다!”
말레이른의 눈이 승기를 확신하며 빛났다. 격전 속에서 반 박자 빨랐던 페르난데스가 그 호흡을 놓치고, 그 짧은 간합 속에서 말레이른의 마법이 빛을 발했다. 수십 가지의 저주와 파괴마법이 그 순간에 맺어져 페르난데스의 몸을 향해 쏟아질 준비를 마치고, 이제 이를 막아내기엔 너무 늦어 고작 팔 한번 휘두르면 놈의 목숨은 끝—
-콰득.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다른 팔이, 공중에 잠시 멈추어 있던 그 팔이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대기에서 유리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드드드득!
그리고 곧, 대기가, 공간이. 묵빛 대검이 검은 궤적을 그리며 대기를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공간이란 물질 세계를 이루고 있는 환상과 현상의 경계면. 그 사이를 갈아낸다는 의미는, 비단 물리적인 실체 뿐만 아니라. 마력적인 실체에게조차 힘을 투사할 수 있으니.
다인왕의 공간참. 정확히 명명된 기술은 아니었지만. 그래. 페르난데스는 팔에 가해지는 엄청난 부하에도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 순간에 중요한 것,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따위 이름이 아니라.
놈의 목을 딸 수 있는 단 한 자루의 칼 뿐.
-콰드드드득!
공간이 갈려나가고, 마법이 박살나고, 주문의 흐름이 깨어지며. 말레이른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놈이 몸을 피한 것은 수천 년에 달하는 삶에서 익힌 어떤 본능적인 회피였을 것이다. 그러나 놈의 루네글리프가 가득 새겨진 팔이 공중에 비산했다.
“끄으아아악!!”
한 팔을 잃은 말레이른이 분노와 공포, 고통과 광기에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뛰어 물러났다. 눈보라가 점차 잦아들고, 땀과 피에 절은 놈의 머리칼이 내려 앉았다.
“후.”
페르난데스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칼을 바닥에 박고 섰다. 이제 놈을 끝낼 시간이다. 수천 년에 이어진 놈의 아집과 욕망을 끊어낼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백성들, 그들의 생명과 재능을 먹이로 삼던 고대의 거미를 죽일 시간이었다.
“종교 재판 사법권. 이단 즉결 처형권. 구마용 군이양지권. 교단성사 대리지권. 만신전이 보장하는 위 권한으로 이단 재판을 시행하겠다. 말레이른 왕.”
-드르르륵.
대검을 끌고 나아가며, 페르난데스는 격통에 비틀거리는 말레이른을 향해 걸었다. 말레이른은 혼란과 공포로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민족의 어버이다.”
“어떤 아비도 제 자식을 먹잇감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비의 역할은 자식의 성장이며. 그 역할이 다한 이후엔 장성한 자식의 뒷모습을 보며 축복하는 것 뿐.”
“나는 그 따위 역사 속 늙은이들이 아니야!”
말레이른이 분노에찬 고함을 내질렀다.
“신을 죽이고 쇠사슬을 끊었다! 오로지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대양을 떠돌 때에도, 용이 활개치고 악마가 속삭이고 난쟁이들의 포대가 불을 뿜던 그 비참한 순간에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해선, 내가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네가 말한 너희 민족의 자유가, 저 꼴이냐?”
페르난데스가 천장을 가리켰다. 격전 속에서 말라붙어 시체가 된 엘프들이 천장의 마력선들을 따라 과일처럼 열려 늘어져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에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 종족의 신을 살해하고 그 영성을 강탈한 죄, 제 자식의 목숨을 취하고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한 죄. 왕 된 자로서 백성들의 영과 육을 착복한 죄!”
“나의 죄악은, 오직 패배 뿐이다!”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피고의 죗값은 사형이다.”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솟아 올랐다. 그가 대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취하려는 그 순간, 말레이른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서 패배하지 않는다. 너는 실패할 것이다!!”
“···뭐?”
섬광이 터졌다.
*
격전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전조도 없이 폭발한 섬광에 페르난데스의 시야가 한 순간 차단되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지만, 손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후우우웅!
바람 소리가 들렸다. 놈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곧 시야가 회복되자, 드넓은 텅빈 어전과, 저 멀리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보였다.
박살나듯 열린 문 사이로, 동이 터오는 수평선이 보였다.
“창을 깨고 도망쳤다고?”
-바다 한 가운데로···. 무슨 꿍꿍이지?
‘엘프 왕이 자신의 기함을 버리고 도망을 쳐? 그게 가능한가?’
-뭐, 배가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았나보지?
‘아니, 서펜트 킹의 기함은 저들에게 목숨보다 더 가치가 커.’
페르난데스는 박살난 선체의 너머를 노려보았다. 바다엔 레이아의 함선들이 떠 있었다. 이 기함을 빙글 둘러 포위하고서, 재건된 주문 보호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 한 가운데로 뛰어내려서 살아날 방도가 있나? 페르난데스는 말레이른을 쫓아 뛰려다가, 천장에서 여전히 맥박치고 있는 심장을 바라보았다.
‘쯧.’
-휘이잉.
한 차례 혀를 차고선, 열쇠검을 들어 집어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열쇠검이 직선으로 깨끗하게 틀어 박히며, 심장의 한 가운데에 말뚝처럼 박혔다. 곧 탁하게 고인 저주를 띈 신성과 끈적한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져 함선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그러나 그 사이로, 베이타서스의 성검이 그 독기를 중화시키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는, 페르난데스가 소리쳤다.
“키르하스!”
“예, 은공!”
문이 열리며 키르하스가 뛰어 들어왔다. 그 틈 사이로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고 있던 엘프들이 보였다.
“저들을 내려라.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해.”
키르하스는 잠시 서서 허공에 매달린 엘프들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녀의 얼굴이 분노와 경악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레이른 왕의 짓입니까?”
“그래.”
“저들을 구하려 하십니까?”
“적어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면.”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자, 키르하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잠시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여전히 어전의 한 구석에 난 거대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놈을 쫓겠다.”
“여기서··· 저기로? 뛰어내리려고요?”
“놈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지금 놈을 놓치면 우리에게 다음 기회 따윈 없어.”
“은공에겐 이번 삶도 다음 기회 따윈 없습니다. 차라리 잠시만, 아주 잠시만 레이아 여왕의 도선을 기다리는 것이···.”
“그럴 시간이 없다, 키르하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한 차례 쓰다듬었다. 키르하스가 눈을 살짝 내려깔며 그르렁거렸다.
“저들을 구하고, 이 함선의 모든 이들에게 항복을 권해라. 일족 전체의 힘을 차지하던 말레이른이 도주한 이상 전쟁은 무의미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불필요하다. 레이아에게 이 기함을 넘기고 종전을 알려라.”
“은공···!”
“나는 내 판결문에 마무리를 해야겠구나.”
페르난데스는 그리 말하고, 북해가 넘실거리는 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