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군왕의 황혼 (3) >
*
콰직, 하고 박찬 선체가 부스러진다. 극한의 상황. 생명의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친 이 순간에서, 페르난데스는 탈각의 길로 한 발자국 더 깊게 들이 밀었다.
북해의 광풍이 귓가에 선연했다. 선체를 감싸며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거친 동토의 바람이. 그리고 저 멀리 눈송이를 흩날리며 떨리는 원양의 바람이. 이 시간, 예리해진 그의 청각이 이 바다 전체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선체를 밟으며 그대로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치 대지를 달리듯 단단하고, 균형있게. 추락이라 하기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차라리 그것은 돌진이라 해야 했다.
-투두두두두!!
엄청난 속도로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은 북해의 해수면이 시시각각 눈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그 순간에도 놈을 찾고 있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던 녀석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자살하기 위해 몸을 던졌을 리가 없어.’
놈이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럴 리가 없었다. 마력 감지가 둔했다. 기함을 둘러친 보호 주문이 그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그 탓에, 그는 단지 시각과 청각만으로 놈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후우우웅···.
더 이상 낙하할 수는 없었다. 육안으로 놈을 찾는 것을 포기한 페르난데스가 제동을 위해 몸을 뒤틀었다. 대검이 선체에 틀어 박히며 손목에서 거친 파열음이 들렸다.
상관 없었다. 아예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는 이상 회복할 여지가 있었다. 디모니카의, 그리고 신성을 담기 시작한 탈각의 육신엔 회복력이 아직 충분했다
-콰드드드득!!
선체에 송곳처럼 틀어박힌 대검이 부르르 떨었다. 일반적인 강철검이라면 수십 번은 더 박살났을 충격이 대검의 검신을 타고 그의 몸을 타격했다. 저릿한 고통에도, 페르난데스는 안색의 변화 없이 대해를 살폈다.
마침내 추락이 멎어 갈 때, 그의 눈에 작은 물체가 잡혔다. 하얀 비단 조각. 물에 젖어 가라앉는 도중이고, 너무 작은 면적 탓에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선체에 박힌 칼을 뽑아 올리며, 반작용을 이용해 몸을 던졌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 말레이른!”
대검을 뒤로 크게 젖히고 비단 조각을 향해 뛰었다. 놈이 곧장 물 안으로 처박혔다면, 아직 몸을 피하기에도, 다른 수작을 벌이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놈은 아직 여기에 있었다!
-후우웅!
대검이 수면을 향해 내려 꽂힐 때, 바다 밑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정녕 여가 도망쳤다고 생각했느냐?]
-콰직.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날아들어 대검의 검신을 쳤다. 거력을 담은 대검에 짧은 빈틈이 생겼다. 페르난데스는 얼음창을 으스러트리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틀고, 다음 타격을 준비했다.
[여는 일천 누각의 탑주이며, 신을 죽여 삼킨 왕이며, 아타일라틀과 군왕, 난쟁이들의 파멸이었다.]
-쿠르르릉···.
해저 밑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곧, 해저면에 파형이 그려지며 거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이 정도로 여력이 남았다고?’
팔 하나를 잃고 동토의 바다 밑으로 추락한 필멸자가 내기엔 너무나 강대한 힘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황급히 자세를 잡고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난파선의 조각 위로 뛰어 올랐다.
[여는 우리 민족이 대지를 호령하던 순간부터, 대양을 지배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물러선 적 없는 영원왕이며.]
-쿠르르릉!!
파형이 거세어지며 얼음창들이 튀어 올라 페르난데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창을 후려쳤다. 일격 일격이 정예 기병의 돌격처럼 무겁고 강했던 탓에, 그 충격으로 그가 타고 있던 부유물이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만민의 위를 굽어 살피며, 만민의 욕망을 집어 삼키는 탐식자이며.]
-스르르륵.
바다 밑에서 튀어나오던 얼음창이 멎었다. 마력이 갈무리되듯 진앙지로 빨려 들어갔다. 오로지 눈송이가 흩날릴 뿐. 페르난데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바다를 노려보았다.
‘온다.’
-뭘 준비하고 있던 거지?
창을 던지는 것 따위는 시간벌이에 불과했다. 놈이 준비한 것이 무엇이든, 충분하지 않을 텐데. 놈 또한 이것이 발악에 불과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놈의 기함에 걸린 주문은, 놈의 백성들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레이아의 함선들이 이미 도함을 시작했다. 놈의 왕국은 이제 끝이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패가 아직 남았던가?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전생의 자신이 만전의 상태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선 그저 동반자살이 유일한 해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페이자쉬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방법 또한 아닐 텐데. 페르난데스의 상념은 그 순간 강제로 끊겼다.
-쿠우우우웅.
엄청난 존재감이 마력의 진원지로부터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순한 신성이 저 아래에서부터 들끓고, 바다가 마치 의지를 가진 양 솟구치는 신성에 스스로 자리를 비키고 있었다!
-콰드드드드득!
[여는 말레이른, 수천 주문의 지배자이자 살아 있는 꿈이며, 여가 곧 너의 악몽이다!]
바다를 관통하듯 얼음 기둥들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탑처럼. 바다 자체를 얼리며 더 높게, 더 높이···.
‘해신!’
-키안···!!
신성이 폭발하듯 사방에 흩어졌다. 눈송이가 바람에 흩날려 순간 대기가 맑게 개었다. 말레이른의 기함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하나 하나가 함선의 크기와 너비를 아득히 뛰어넘는 얼음 기둥들이 나무처럼 자라나 솟구쳤다.
-쿠르르르릉!
바다가 파도치듯 일렁이다가, 그 모양 그대로 얼어 붙었다. 바다 위에 떠 있던 모든 함선들이 얼어붙는 바다에 으깨지며 박살나고, 그 안에 승선하고 있던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얼음 위로 떨어져 내렸다.
페르난데스는 얼어붙은 바다 위에 올라 서서, 마력과 신성의 진앙지를 노려보았다. 그 자리에 얼음 조각과 눈송이들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윤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람 형상을 한 윤곽이 천천히 자리를 잡아갔다. 놈의 입이 벌어지며, 말레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 탐식자, 위대한 지배자, 군왕들의 학살자! 황혼의 힘을 갈취하고, 마침내 대해의 아들을 집어 삼켰노라. 여는 말레이른이다! 너희의 왕 앞에 무릎을 꿇으라!]
-콰아아아앙!
얼음 거인이 입을 벌리며 소리지르자, 놈의 몸 주위로 수많은 주문들이 떠올랐다. 익숙한 수법이었다. 놈을 이제 더 이상 말레이른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만, 말레이른의 주문을 사용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도사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주위를 살폈다. 엘프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뿔나팔을 꺼내 쥐었다.
[너, 인간. 이단심문관이여! 너의 신조차 여의 앞에선 잘 차려진 만찬과 다름 없도다. 여는 진정한 신이 되었으며, 이를 말미암아 천상의 만신전에 올라 그들을 지배하고, 물질 세계를 여의 발 아래에 놓아 지배하겠다. 영원히!]
“네 죄목에 신을 사칭한 죄를 한 줄 추가하겠다. 형량은 변하지 않을 게다.”
페르난데스는 뿔나팔을 입에 가져가며 웃었다. 그의 말에 거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오만한 필멸자가!]
“그렇게 말하던 놈들 중 아직까지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놈이 없는데.”
모두 죽었으니까.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뿔나팔에 입을 댔다. 곧, 그의 목소리가 모든 엘프 함선과 그 잔해에 모인 엘프들에게 울려 퍼졌다.
[전 함대, 발포하라!]
*
가이메른 왕조의 엘프들은 많게는 이백여 년, 짧게도 수십 년을 근무한 베테랑 항해사들이다. 그것은 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렇지 않은. 평생에 걸쳐 한번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콰아아아앙!!
당황과 혼란,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평생에 체득한 함대전 기술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콰아아앙! 쾅!
얼음에 파묻히거나, 충격에 박살난 포대를 제외한. 모든 포대들이 순식간에 정렬되고, 거의 동시에 격발했다. 수십 척에 달하는 전함들이 얼어붙은 바다 위에 고정되어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들이!]
거인이 손을 휘젓자 주문 보호막이 생기며 포환을 막아냈다. 거인의 몸을 중심으로 둥글게 생성된 보호 주문들에 포환들이 틀어 박히고, 짙은 폭연을 만들어냈다. 아주 잠시, 놈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거인의 몸 주위로, 얼어붙은 바다를 밟으며. 놈의 몸에 얽힌 주문을 바라보고, 또 동시에 바다에 우뚝 서 있는 함포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것은 말레이른 기함 공성전의 재현이었다. 주문 쐐기를 발라둔 포환이 놈의 보호 주문을 두드렸다. 단순히 그 뿐이라면 겹겹이 쌓인 놈의 주문을 깨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나···.
[여왕의 기함을 중심으로! 동동서 3번함 전문 발포하라!]
-콰아아앙!
주문의 약점, 회로를 타고 흐르는 마력의 빈틈, 주문과 주문이 교체되며 순환하는 그 작은 틈새를 파악하는 능력. 페르난데스의 감각이 이를 지휘하고—
[정북동 1번, 4번, 12번함! 전문 발포하라!]
-콰아아아앙!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예병들의 기술이 이를 뒷바침하여.
[이, 이··· 그만둬라! 여는 너희의 신이다! 여는 우리 민족을 다시금 부흥시킬 마지막 희망이니라!]
-콰아아앙!
놈의 주문을 정교하게 겨냥해 발포된 주문 쐐기들이. 거인의 몸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주문이 한 겹씩. 양파가 뜯겨 나가듯이 바스라지며 벗겨졌다.
놈의 몸에 타오르던 마력 회로들이 그 충격에 뒤엉키며, 거센 백래시를 만들어 놈의 영혼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얼음 거인의 몸이 덜덜 떨리며 놈에게서 공포가 새어 나왔다.
신은 관념적인 존재다. 바다의 신, 전쟁의 신, 태양의 신. 각자의 관념을 지배하며 형태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다. 그것은 곧, 자신의 관념을 잃기 시작한 순간부터 신성은 곧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간다는 뜻이며—
[그만두거라! 여, 여는 우리 민족을 위해 행했다!]
“그 변명은 너에게 잡아 먹힌 네 백성들, 네 자식들, 그리고 너의 신에게 가서 해라.”
페르난데스는 이젠 어떤 힘도 남지 않고, 오직 공포만을 흘리고 있는 거인을 향해 내달리며 속삭였다. 광기의 편린이 뒤엉킨 끈적한 마력이 얼어붙은 바다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관념을 잃어버린 탓에, 놈의 신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형태 이하의 존재로. 한낱 필멸자의 육신으로. 놈이 쌓아 올린 신성이 증발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다시 휘몰아친다. 페르난데스의 얼굴과 몸에 진눈깨비가 달라붙었다. 그는 대검을 들어 올려 거인의 다리를 찍고, 그 위로 올라서서 다시 달려 올라갔다.
[비, 비켜라! 여에겐 사명이 있노라. 여는 오직, 오직 민족을 위해. 오직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스르릉.
거인의 얼굴 한 가운데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말레이른의 몸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거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놈을 노려보았다.
평생에 걸친 마법을 분쇄당하고, 야망과 계략을 다 바쳐 얻은 신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고향과 백성을 빼앗긴 늙은 왕. 말레이른에겐 더 이상 저항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말레이른의 새하얗게 타오르는 눈이 정처없이 희망을 찾아 움직였다. 페르난데스는 어느새 뛰어 올라 거인의 광대뼈 부근에 단단히 발을 디디고 서서, 자신을 올려보는 말레이른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피고의 형을 집행한다.”
[안 돼! 너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여는, 여에겐 더 높은 이상이 있단 말이다!]
“피고에겐 더 이상, 변론의 기회가 없다.”
[기도, 기도하겠다! 사제여! 기도하겠—]
-콰드드득!
말레이른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끈적한 뇌수가 사방에 흩어졌다. 대검이 파고든 충격으로, 얼음 거인의 이마부터 턱까지 거미줄 같은 실금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부서지는 거인의 몸 안에서, 핏물을 터트리며 흩어지는 말레이른의 육신을 바라보았다.
“피고의 기도를 들어줄 신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제 종족의 신을 죽이고 그 신성을 강탈해 영생을 누리던 존재. 제 백성의 영육을 착복해 마력을 쌓아올린 늙은 거미. 말레이른은 유지 조차 남기지 못한 채 얼어 붙은 핏물이 되어 바다 아래로 흩어질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부서지는 거인의 몸에서 대검을 뽑아 등에 돌려 맸다. 얼었던 바다가 부서지며 그 아래로 검은 해수면이 보였다. 근처에 그를 구하러 올 다른 배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말레이른의 기함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함선이 전투의 여파로 반파된 상태였다.
쯧, 페르난데스는 혀를 찼다. 불사의 축복이 없이, 전신 근육을 찢어가며 무리한 대가로 몸에 열이 올라 있었다. 멍한 머리로 그는 다가오는 해수면을 바라 보았다.
“은공!!!”
-턱!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몸을 붙잡으며, 아직 녹지 않은 얼음장 위로 키르하스가 몸을 던졌다. 페르난데스는 맑게 개이며 동이 터오르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마른 기침을 토했다.
그의 곁에서 키르하스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다.”
“살려준 것 말씀이시죠?”
“전부 다.”
이제 돌아가자. 몇 가지만 더 해결하고.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품에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