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승전 연회 >
*
땀에 절어 헐떡이는 아벨의 곁에서, 페르난데스는 열쇠검을 역수로 박아 넣고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마력석 가루에서 스며나오는 마력이 청동 옥좌와 반응하며 허공에 주문을 자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걸리겠나?”
“닷새 정도 걸릴 것이오.”
“충분하겠군. 내 안 그래도 네게 편안한 크루즈 여행을 제안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참 미안하던 차였어.”
레이아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법진을 섬세하게 수정하던 페르난데스도 레이아를 힐끔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번엔 확실하시오?”
“확실하다마. 어디,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나? 황금항, 삼각항, 샤드펄 만? 온갖 명승고적이 다 우리 손 아래 있지. 북해와 서해 모두가 이제 나의 영역이니.”
“그거 참 부럽군.”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마법진에서 손을 빼냈다. 녹색 마력이 열쇠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며 기묘한 주술 문자를 허공에 그려내고 있었다.
가이메른과 말레이른, 두 엘프 왕들이 사용한 마법의 변주였다. 신의 힘을 빼내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 열쇠검이 머금은 신의 힘을 이용하여···.
“···여신께서는···.”
“그녀는 죽었소. 남은 것은 잔재와 타락하고 썩은 육신 뿐이었지.”
“하지만 너는 멜리실두르 님의 심장에서 그 분을 다시 부활시키지 않았나?”
“이번 경우는 다르오. 가이메른은 그녀의 영혼을 용의 유해에 심으려 했으니 영혼을 보호하는 데에 신경을 썼지만. 말레이른은 여신의 유해를 마력 심장으로 쓰기 위해 뒤틀었거든.”
말레이른의 어전, 그 천장에 걸려있던 거대한 심장. 이 함선 전체에 끊임 없이 마력을 불어 넣으며 고동하던 그 썩고 뒤틀린 심장이 바로 말레이른이 사로잡은 여신의 잔재였다.
말레이른에 의해 타락하고 뒤틀린 심장에 인퍼머르 때처럼 여신을 부활시키는 주문 따위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천 년간 자신의 백성을 양분으로 빨아먹으며 유지된 인공적인 신성이었다.
말레이른이 그것의 지배력을 잃고, 심장 한 가운데에 틀어박혔던 열쇠검에 그것의 신성이 스몄다. 군신의 가장 강력한 성유물이 심장의 독기를 정화했고, 남은 것은 잘게 조각난 신성의 편린들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열쇠검에서 여신의 신성을 추출하고, 필멸자의 육신에 심어도 무리가 없도록 여과하는 마법진을 그렸다. 무너져가는 아벨의 영혼을 지탱하기 위한 처치였다.
“고맙소. 레이아 여왕.”
“되었다. 우리가 신의 잔재를 더 이상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어.”
레이아는 복잡한 눈으로 열쇠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엘프 만신전의 세 여신. 그녀의 부산물과 유해는 모두 엘프의 소유물들이다.
엘프와 전혀 상관 없는 외지인에게 이를 전달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아는 페르난데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더 큰 것을 얻었으니. 네 덕에 우리 일족이 다시금 해상에서 안전히 살아갈 터전이 생겼어. 이 기함은, 그래 말 그대로 우리의 요람이니까.”
“말레이른 일족은···.”
“이제 더 이상 말레이른 일족은 없어. 그 아래에 수탈당하던 그 불쌍한 백성들 또한 나 가이메른 여왕의 자식이 되었으니.”
레이아는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왕의 성격을 전혀 잇지 않고, 올곧게 자라난 성군의 자세였다.
“힘들었을텐데 가서 쉬도록 해. 며칠간 눈도 붙이지 못했잖아.”
“나는 사흘에 한 번씩 자도 충분하오.”
“그게 인간이냐?”
“···아직은.”
“하하!”
레이아는 깔깔거리며 웃고는 페르난데스의 등을 때렸다.
“아벨 님은 걱정 말고 들어가서 쉬어. 이젠 적도 없고, 여긴 나의 가장 강력한 기사들이 지킬거야. 닷새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 시간 동안 매일같이 연회가 열릴 테니 마음 놓고 즐기라고!”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
페르난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아벨을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레이아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아벨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상쾌하게 웃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그녀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 내려 앉았다.
“여신이시여, 용서하소서. 당신의 자매를 구원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제가, 저희들이 조금만 더 이르게 움직였다면···.”
-너의 잘못이 아니다.
고개를 숙인 레이아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레이아는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 앞에, 굳게 박힌 열쇠검 위로 빛이 어려 있었다.
-너희를 돕지 못한 너희의 여신이 못난 탓이다.
“어떻게···. 어디에서···. 저희를···.”
-너희의 여신은 언제나 너희의 곁에 있었다. 다만 직접 손을 뻗기에 힘이 닿지 못해 미안하구나. 너희는 무능한 이 여신을 원망하느냐?
“그럴리가 있겠사옵니까. 여신이시여, 저희는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나의 자매, 황혼의 딸. 너희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아느냐?
레이아는 여신의 말에 머뭇거렸다. 그녀의 눈 앞에 흔들리는 빛무리에서 따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혼의 여신 탈리아나르. 세계수의 꽃망울을 비추던 석양. 나의 두 자매 중 가장 아름답던 아이가 이젠 그 흔적만 남았구나. 한때 위대했던 우리와, 그리고 너희의 나라들이 이젠 흔적만 남아 있다.
“여신이시여, 이는 저희의 과오이니. 저희가 반드시 바로잡겠습니다.”
-나의 남은 자매를 구하라. 이는 명령이 아니오, 다만 너희의 여신이 너희에게 바라는 부탁이니라.
“그저 하명하십시오. 저희가 당신을 섬기겠나이다.”
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와 잠시 그녀의 머리를 흐트렸다. 아, 하는 순간. 여신의 존재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레이아는 잠시 눈을 감고, 곧 다시 떴다. 그녀의 눈엔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신이 돌아왔고, 그녀의 민족에겐 아직 구원의 길이 남아 있다.
*
말레이른의 기함은 거대한 도시다. 왕의 어전과 내성을 중심으로 복잡한 구조의 거리들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고, 때때로 선실 내부로, 또는 갑판 위로 고층의 가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내성 아래에 위치한 복도를 걸으며, 창 밖 거리 아래로 백성들이 환호하고, 떠들고, 술을 마시거나 뛰어다니는 모습을 내려 보았다.
말레이른 일족은 자유와 안전을 얻은 것에, 가이메른 일족은 새로운 터전을 얻은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즐겁게 웃고 노래 부르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저녁놀이 내리며 건물과 사람들 사이에 긴 그림자가 너울졌다. 흥겨운 축제 음악이 거리마다 녹아 넘쳐 흘렀다.
“은공께서 이루신 광경입니다.”
“여기 모두가 만들어낸 광경이지.”
페르난데스는 창에서 눈을 돌리며 다가오는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곁에 다가와 섰다.
“은공이 아니었다면 이들 절반은 여전히 노예로 살았을 것이고, 남은 절반은 바다 아래에 수장되어 흡혈귀가 되거나, 흡혈귀의 식량으로 전락했을 겁니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두 민족이 해상에서 부딪치지도 않았을 거야.”
“은공이 아니었다면 저도, 이들도, 그리고 이 세계도 없습니다.”
키르하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페르난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푸른 눈이 따듯하게 일렁거렸다.
“은공이 되살아나시기 전의 세상이 어땠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은공께서 하시는 속죄는, 의미 없는 감정 소모에 불과합니다. 은공의 업적은 과거의 속죄나, 미래를 위한 포석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이들에겐, 그리고 저에겐 구원이었습니다.”
“나를 너무 띄워주는구나 키르하스. 나에겐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럼 영웅께선 무엇이 필요하신지요?”
“영웅이라···.”
페르난데스는 장난기 어린 키르하스의 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영웅, 대황야의 방패, 서부 호족 연합의 대족장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한낱 악마 추종자이자, 찢어 죽일 흑마법사에게 보이기엔 과도한 호의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호의가 의도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건 그가 만들어낸 감정이다.
흑마법사들에게 수감되었던 그녀는, 결국 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났을 것이다. 서부 호족 연합은 언젠가 그녀의 힘 아래에 그녀에게 복종했을 것이다. 키르하스는 영웅의 씨앗이었다.
그것을 그가 거두고, 그의 의도대로 조각해, 그의 입맛대로 분재했다. 그러니 키르하스가 그에게 보이는 호의는 그에게 보여 마땅한 감정이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그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혐오한다 하더라도. 페르난데스에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뺨에 얹어진 그녀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는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한번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저들 사이에서 축제를 즐겨라. 키르하스.”
“명령인가요?”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요.”
뒤를 돌린 페르난데스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의 균형감각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키르하스는 아주 정교하고 교묘한 손길로 힘의 얽힘을 풀어내며 페르난데스의 몸을 뒤로 끌었다.
페르난데스의 몸이 다시 균형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머리칼이 커튼처럼 펼쳐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숨결과 눈물 어린 눈이 그의 바로 앞에 있었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입술에 닿기 직전에 멈춰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는 진심입니다.”
“키르하스 하트테이커.”
“저는 진심입니다. 은공.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절 피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생의 ‘키르하스’를 저에게 대입하지 마세요. 저는 그녀와 다른 존재입니다. 제 삶은 저의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 속의 그 묘인족 여인의 것이 아니라.”
페르난데스는 훌쩍이는 키르하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위로나 포옹을, 무엇이든 그의 따듯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 남짓의 여린 묘인족 여자 아이에 비해서 적어도 네 배는 더 오래 살았던 늙은 마법사는 그녀의 속마음을 너무나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된 호의를 보여주지 않은 쌀쌀맞은 주군, 자신에게 자유와 권력과 힘, 그 모든 것들을 안겨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주군에게.
때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녀에겐 페르난데스에게 무언가를 해줄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슬프게 하고 있었다.
-사륵.
페르난데스는 잠시 코 앞에서 아른거리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다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입술 끝에 촉촉하고 짭짤한 맛이 남았다. 키르하스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 나쁜 남자.
‘닥쳐.’
-하하, 어리석은 놈. 삶에 후회를 더하는구나.
‘···닥쳐.’
페이자쉬가 싱글벙글 웃으며 속삭였다. 페르난데슨느 쯧, 하고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키르하스는 멍하니 입술을 더듬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