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북부의 이방인 >
*
항해가 닷새째 되던 날 밤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교단에 제출할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잠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며칠 간에 이어진 연회로 달뜬 도시를 식히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가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차를 홀짝였다.
-똑똑.
그때,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간 손님이라곤 전혀 없었던 탓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오.”
“사제님, 여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레이아 여왕이?”
페르난데스는 그 말에 망토를 두르며 일어섰다. 항로상 이틀은 더 항행이 이어질 터였고, 레이아는 한창 말레이른 일족과의 병합에 밀린 행정업무로 밤잠을 지새우고 있었을 터였다.
-끼이익.
페르난데스는 나무문을 열고 문 앞에 선 종사를 바라보았다. 종사는 차가운 겨울바람 탓에 코가 발갛게 떠 있었다.
“어전인가?”
“예, 외지인이 찾아왔습니다.”
망망대해 위에서 움직이는 도시에 외부인이 찾아왔다고?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사를 따라 거리로 나섰다.
*
어전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레이아는 옥좌에 앉아 턱을 고이고, 눈 앞에 서 있는 인간을 내려보고 있었다.
밤중에 찾아온 외지인은 긴 로브자락과 더러운 더벅머리,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서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어전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만상과 사해의 위대한 대왕, 서펜트 퀸 레이아 핀 가이메른 만세! 베이타서스의 사제가 입궐을 청합니다.”
“···저 빌어먹을 수식어들은 줄이라 하지 않았더냐? 들라 하라.”
레이아가 투덜거리자 어전의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신과 귀족, 장군과 제독들이 일제히 어전에 들어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벅.
묵직한 발걸음.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는, 당당한 보폭. 곧게 선 허리와 잘 단련된 몸이 드러나는 로브. 음울하게 빛나는 피로에 가득한 눈빛. 가이메른 일족을 두 번 구한 인간, 귀족들이 작게 속삭였다.
“아, 어서오게. 친구.”
“레이아 여왕. 외지인이 찾아왔는데 나를 불렀다 했소?”
“이 인간이 하는 말을 들어보겠나?”
레이아가 턱짓하자, 외지인이 기이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엘프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고? 외지인은 인상을 구기며 천천히 말했다.
“서펜트 킹의 약속. 우리는 지킨다. 어째서 없다.”
“···북부인이군.”
페르난데스는 그 기묘한 발음에서 북부인들의 언어 특유의 비음을 들었다. 레이아는 외부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공용어도, 서부 왕국언어도, 엘프 말도 하지 못하는데, 무슨 거래를 했다며 우기더군. 서펜트 킹을 만나야 한다면서. 말레이른을 언급하길래 내 병사들이 포박해 왔었네.”
“칼타르 페아쉬?”
“사르칸.”
간단하게 의사를 건넨 페르난데스가 레이아를 바라보자, 레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페르난데스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북부인이 여긴 어쩐 일이지? 이쪽은 안전한 해안가가 아닌데?”
“말레이른 왕이 우리와의 계약을 준수했는지 묻기 위해 왔다.”
“놈은 죽었어. 이젠 저 엘프 여자가 이 나라의 왕이다.”
“그래. 그런 것 같군. 이제 우리 부족은 끝났단 뜻이지.”
노인은 자조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운명도 여기서 끝일 수 있어. 북부인. 레이아 여왕은 말레이른을 증오하고, 너는 말레이른과 손을 잡지 않았나.”
“내 운명은 중요하지 않아.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은 것 자체가 내겐 수치스러운 일이지.”
노인은 탁한 눈으로 비틀거렸다. 그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을 메마른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하지만 하자트 팔렌의 멸망은···. 이제 막을 수 없게 되었어. 이제 뱀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더 없을 테니.”
“···무슨 소리지?”
“그걸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지? 날 내버려 둬. 아니면 저 미개한 요정들 손에 죽게 놔두거나. 그것도 아니면, 내게 칼 한 자루를 빌려주게. 적어도 싸우다 죽는다면, 적어도 선조들에게 부끄러운 삶은 아닐테니.”
노인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곧 옥좌에 앉아 지루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는 레이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이아 여왕. 이 자와 독대해도 좋겠소?”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말레이른 왕과 이 자의 부족이 거래를 했던 모양이오. 그걸 밝히고자 하는데, 위치가 좋지 않군.”
“우리가 들어선 안될 이야기인가?”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이 자가 그대들 앞에서 입을 열 것 같지 않군.”
레이아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말레이른과 거래를 했던 놈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지만, 당장 죽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곧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 이후 내게 꼭 그 빌어먹을 자식의 거래 내역도 알려주고. 자자, 제군들. 퇴청하게. 회의는 내일 아침에 다시 하지.”
레이아는 흔쾌히 페르난데스를 보내주었다. 페르난데스는 노인에게 짧게 속삭이고는 그와 함께 어전을 빠져나갔다.
*
방에 들어서자마자 노인은 모닥불 앞에 앉아 손을 비볐다. 페르난데스는 그에게 찻잔을 내어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노인은 코를 쿨쩍이며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사이에 배는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물어보지. 말레이른과 무슨 거래를 했다는 건가?”
“남부인에겐 상관 없는 이야기야. 그냥, 이제 이 세상은 끝났다는 소리지.”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데 말이지.”
“빌어먹을. 날 내버려 둬. 별빛이 기이해서 황급히 왔는데, 너무 늦었군.”
“말레이른이 무슨 세상을 구할 대단한 영웅이었다는 개소리는 하지마. 그 놈에겐 그럴만한 힘도 없었고, 설령 힘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너희 북부인들이나 이 세상을 위해 쓰진 않았을 거니까.”
“그 교활한 늙은 요정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놈도, 우리도. 서로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야.”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홀짝였다. 잠시 침묵이 감돌고, 노인은 체념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혹시 세계뱀이라고 아나?”
“아니. 너희 부족 신화인가?”
“그래. 언젠간 일어나서 신들과 세계를 집어 삼키는 거대한 뱀에 대한 이야기지. 종말의 순간이 오면 놈이 일어나 몸을 뒤틀고, 바다가 뒤집어지고, 산이 허물어질 거란 이야기.”
“뭐, 세계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지.”
종말의 순간에 대한 언급은 전세계 어떤 종교에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진다거나, 해수면이 치솟는다거나, 태양이 사라진다거나···.
페르난데스가 생각하기엔, 그 모든 것들이 다 웃긴 이야기였다. 그가 본 종말은 어떤 예언서에도 적혀있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이 열리고 세계가 마력에 오염되어 뒤틀리는 것.
세계의 종말은 인류의 내분과 종족 내부의 배신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추종자들과 타락한 마법사들에 의해. 그 선봉에 있었던 페르난데스로서는 전세계의 종말론 신화들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페르난데스가 피식 웃자, 노인의 인상이 구겨졌다.
“남부인들은 허약한 주제에 오만해서 별 사이의 멸망을 읽지 못하지. 그건 놀랍지도 않아. 하지만 너희는 그 오만함 때문에 멸망할거야. 이미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었으니.”
“그래. 세계의 종말은 엊저녁에 시작된지 오래야. 그래서, 말레이른이 그걸 막아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했나?”
“신들이 세계뱀에게 굴복했어.”
“···뭐?”
노인을 비꼬던 페르난데스가 한순간 멈칫했다. 노인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결국 에인헤랴르가 패배했어. 발키리들은 더 이상 전사들을 전당으로 인도하지 않고, 길 잃은 전사들의 영혼이 망령이 되어 겨울 산맥 사이를 흘러다니지. 그리고 세계뱀의 추종자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어.”
“헛소리 집어치우고 말해. 신이 뭐라고?”
선신 만신전은 봉문했고,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만신전의 대신들은 아직 건재했다. 그들이 힘을 잃었다면 그 누구보다 페르난데스가 가장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노인이 말하고 있는 신은 그들의 신이 아니었다.
“늑대가 달을 삼키고 태양을 물어 뜯기 시작했지. 세계뱀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대적자의 목젖을 찢어 발기려 하고 있어. 요르문간드, 그 저주 받을 괴물이 일어났다고.”
“그딴 동화는 손주에게나 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해봐. 너희 신 말이야?”
선신 만신전,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명 사회의 대신들. 그들을 제외하고도 세계엔 소신이나 준신, 또는 반신의 신위를 얻은 신들이 더러 있었다.
전생 시절, 엘프들이 자신의 영역 안의 소신들을 사냥하고 다녔던 것처럼. 만신전의 문턱 위로 올라서지 못한 신들은 세계 곳곳에 숨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북부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계가 멸망하던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존재를 드러낸 적 없어 자세히 알수는 없었지만.
칠흑의 에리크가 침공하던 당시, 놈들에겐 독자적인 종교관이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턱을 괴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잠시 쿨럭이더니 입을 열었다.
“몇 해 전부터 신들과 정령들의 소통이 끊겼어. 마을의 무녀들이 몇 차례 강신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지. 그 와중에 계시가 내려왔어. 종말이 찾아올거라는 계시가.”
“그리고.”
“그리고, 세 달 전에 신왕을 섬기던 카잘다르 씨족이 돌연 세계뱀의 선지자라는 놈에게 복종하겠다고 선언했어. 씨족 회의 때 다른 부족장들을 모조리 족치고 전쟁을 시작했지.”
노인은 탁한 눈으로 차를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놈들은 신화 시대부터 잠들어 있던 세계뱀이 깨어났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 미치광이들이었어. 이제 곧 종말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고, 신들은 더 이상 우리를 영광스런 회랑으로 이끌지 못할 거라고.”
“···세 달이라고 했나?”
“그래. 세 달쯤 전.”
우연이 아니라면,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 대황야에서 뭄토가 죽은 시기가 그 쯤이었다.
“카잘다르 씨족의 부족장은 죽었고, 놈의 어린 아들이 야를이 되었지. 애송이 에리크. 그 놈은 괴물 같은 힘으로 전장을 휩쓸고 다녔어.”
“···에리크?”
“그래! 그 빌어먹을 꼬맹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가 손도끼로 다른 부족들 최고의 전사를 하나 하나 으깨고 팔다리를 부수며 싸워댔다고!”
에리크가 남부로 진격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십 년쯤 뒤였다. 그럼 지금쯤 정복 전쟁을 벌여 북부 통합을 이루어냈다고 가정한다면···.
“그 와중에 우리 야를이 계시를 받았어. 엘프 왕이 신을 사냥하는 것을 도우라고. 카잘다르 씨족들보다 먼저. 신들의 힘이 놈들에게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만이 세계의 멸망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예언은 누가 했지?”
“그건 몰라. 그 뒤로부터 야를은 더 이상 계시를 받지 못했거든.”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정보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에리크, 북부인, 아직 통합되지 못한 부족들···.
신과 정령들. 아마도 만신전의 신들이 아니라, 북부와 그 인근에 잠들어 있는 소신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신성을 모으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세계뱀의 선지자’들. 뱀. 왜 하필 뱀이지? 세계를 멸망시키는 거대한 뱀.
우스운 종말론. 악마. 세 달 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뭄토가 죽은 이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맙소사. 그녀로군.’
-사다르켈리사···.
뱀의 여제. 타락한 용. 다섯 대악마의 일석을 차지하고 있는 고대의 존재. 비늘 덮인 종족들의 신이자, 지옥의 여군주.
천상전쟁 이래로 봉인되어 잠들어 있던 그녀가 때마침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대악마의 죽음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대적자를 죽이려 하고 있다고 했지.’
-천상룡 카라드펠린. 그 녀석이 대전쟁 전까진 사다르켈리사의 봉인을 지켰어.
‘사다르켈리사의 하수인들이 신의 힘을 모으고 다닌다면···.’
-그 힘으로 봉인을 뚫고, 카라드펠린을 죽인다면.
‘물질 세계의 휘장을 찢고 지옥의 관문을 열겠군. 그래. 이 늙은이의 말이 맞아. 그럼 종말이 시작되겠지.’
전생과 전혀 다른 시간선. 아직 진정한 종말은 멀었고, 미래를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여겼건만.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이름을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인의 눈을 노려보았다.
“북부인. 너희 야를을 만나 보아야겠군.”
“···네가 말레이른 왕을 대신해 우릴 돕겠다는 뜻이냐?”
“아니, 신을 사냥하고 다니진 않을 거야.”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작업을 하던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작성을 끝낸 보고서를 펼쳐 뒷장을 찢었다.
곧 그는 그 자리에서 새 종이를 한 장 꺼내고 펜을 들었다.
“분야가 전혀 다르지. 나는 남부 종교의 사제야. 북부인.”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추가 임무 제안.
페르난데스는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는 양초 끝에 인장을 찍고는 종이 위에 눌렀다. 그의 인장이 그려진 밀랍이 동그랗게 퍼졌다.
-이단을, 악마를, 그리고 마녀를 불태우리라.
“우리는 악마를 사냥하지.”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밀랍 봉인이 된 서류봉투를 노끈을 묶었다. 복귀까지 다소 시일이 걸릴 것 같군.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보고서의 테두리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