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57화 (158/388)

< 157. 밤이 깊다. >

*

비가 그치자, 다시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젠 마법사들이 폭죽까지 하늘로 쏘아대고 술에 절은 엘프들이 비틀거리며 마주치는 이들과 산발적인 웃음을 터트려댔다.

페르난데스는 그 인파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요란한 축제였지만 이해할 법 했다. 일 년간 희망 없이 떠돌던 가이메른 일족은 새 터전을 찾은 것이고, 수 세기간 자신의 왕에게 이따금씩 제물로 끌려가던 말레이른 일족은 마침내 자유를 찾은 것이니.

다행히도 대부분의 엘프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채도 너무 취해서 그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페르난데스는 빠른 걸음으로 내성의 안, 레이아의 집무실로 향했다.

*

-똑똑.

“들어오게.”

화려한 음각이 그려진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대한 해도와 나침반, 컴퍼스 등이 널려 있는 테이블 앞에 선 레이아가 보였다. 그녀는 한 손에 갈색빛 도는 술을 들고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아는 들어서는 페르난데스를 힐끔 바라보고는 크리스탈 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내 백성들이 기꺼이 술을 나누어 주더군. 왕 노릇도 할만하긴 해.”

“난 하래도 못하겠소.”

“후후, 그대의 눈에 왕 자리가 들기나 할까. 마시게. 연회가 한창인데 자네도 즐겨야 하지 않겠어?”

레이아는 응접실로 걸어가며 웃었다. 그녀는 보라색 벨벳 소파 위에 몸을 길게 누였다. 그녀는 원목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궁중 법도니 뭐니 다 지겨워. 우리 모두가 뱃사람이 된 지가 천 년인데 아직도 전통주의자들이 남아 있다니까.”

“전통을 빼고 보더라도 체통에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니오만.”

“그대가 나보다 어리지 않아? 친구, 우리 그런 늙은이들 같은 소린 하지 말자구.”

레이아는 술을 홀짝이고는 창 밖에서 터져나가는 폭죽을 바라보았다. 형형색색 폭죽이 터질 때 마다 방 안이 화려하게 물들었다.

“좋은 계절이야. 올 해 겨울은 따듯하겠어.”

“승전을 축하하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날, 황무지의 작은 마을에서 그대를 만난 것이 나와, 우리 민족의 큰 복이 되었군.”

레이아는 고개를 돌려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마력등으로 은은한 빛이 감도는 방, 끈적하고 독한 술을 머금고 입 안에서 굴리는 레이아의 표정은 고혹적이었다.

“그러니, 그대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지. 교회에 내가 건넬 진상품 말고, 그대가 바라는 것을 말해봐.”

레이아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페르난데스를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는 술잔을 살짝 내리며 테이블 위에 얹은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부주의한 몸짓에 흘러내린 옷가지 따위는 바라보지도 않고, 레이아의 눈을 보며 말했다.

“북부에 데려다 주시오.”

“음 곤란···. 뭐?”

“북부 말이오. 북부인들의 땅으로.”

레이아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내렸다. 그녀는 의관을 살짝 정돈하고는 술잔을 옆으로 치웠다.

“아 그래. 그 이방인과 이야기를 나눴지. 북부에 볼일이 생겼나? 내게 들려줄 수 있겠어?”

“북부에서 대악마의 징후가 포착 되었소. 정확히 놈이라 판단하기엔 자료가 부족하지만, 적어도 그 배후에 악마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 그리고 나는 악마사냥꾼이오.”

“그 이방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놈이 말레이른과 무슨 거래를 했다고 하던가?”

“신의 사냥을 지원했다 하더군.”

페르난데스는 술잔을 손에서 굴리며 말했다.

“릭터가 북해의 대공, 키안의 처소를 말레이른에게 속삭였고, 북부인들은 말레이른에게 해신을 포획할 주문을 전수했소. 실제로 말레이른은 북부인 특유의 마법 체계를 사용하더군. 마음에 든 모양이지.”

“신을 사냥할 방법이 있다면 어째서 북부인들이 직접 하지 않았지?”

“글쎄, 제약이 있었거나. 백래시가 너무 강한 주문이었거나. 이유는 많겠지. 그리고 차도살인은 성공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뒤탈이 없는 계략이 아니겠소. 키안을 죽이면 맥라렌의 진노를 살 텐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겠지.”

북해의 대공 키안은 선신 만신전에 입전하지 못한 수많은 소신격 중 하나였다. 그는 북해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고, 말레이른의 주문에 의해 신성을 강탈당했다.

말레이른이 북해상의 한 지역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이유, 키안을 포획해 신성을 강탈하려는 주문은 그들이 이미 도착하기 전에 완성되었다. 놈은 강탈한 신성을 믿고 ‘너흰 이미 패배했다.’라는 둥의 소릴 하며 설쳤다.

페르난데스는 그 허술함이 우스웠다. 차라리 기함에 깔린 마력회로를 이용해 마법전을 벌였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력 쐐기로 허무하게 자신의 마법을 파괴한 페르난데스에게 지레 겁을 먹고 악수를 둔 것이었다.

‘다른 신의 신성을 온전히 몸에 체화시키기 위해선 대단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신성을 사냥했던 악마, 뭄토조차도 자신이 삼킨 신의 파편들을 온전히 녹이지 못했다. 그가 가장 처음 삼켰던 카단이 천 년이 지나는 긴 시간동안 여전히 독립체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대악마조차도 그럴진데, 하물며 필멸자가 그 짧은 시간에 신성을 얻어 신으로 각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세상은 온갖 잡신들로 넘쳐났을 것이다.

“놈들이 말레이른의 신 사냥을 도운 이유가 뭔지도 들었어?”

“북부신들이 악마와 그 추종자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 힘을 자신의 주인에게 공양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악마가 충분한 힘을 얻기 전에, 차라리 엘프 왕을 도와 선수를 치고 싶어하던 모양이오.”

“신과 신 사냥. 하, 얽혀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신을 죽인 죗값으로 영원히 대륙에서 쫓겨난 종족의 왕이 슬픈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북부에 데려다 주지. 그 외에 필요한 것은?”

“교단에 이 보고서를 전달해주실 수 있소?”

“그야 간단하지. 우선 근처 항구에 정박해 물자를 보급할 계획이야. 그때 인편으로 보내주지. 그리고 곧장 북부로 출발하자고.”

페르난데스는 레이아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을 벌컥 들이켰다. 씁쓸하고 끈적한 독주가 식도를 달구며 흘러내리다가, 곧장 몸 안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취기 따윈 올라오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폭죽이 터지는 창 밖을 한번 힐끔 바라보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감사히 마셨소.”

“그래. 밤이 늦었군. 푹 쉬어. 가는 길에 축제도 좀 즐기고.”

레이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

페르난데스는 데인 왕의 검을 꺼내어 기름 먹인 천으로 칼날을 닦고 있었다. 고대 드워프의 기술과 기사왕의 업적, 신들의 축복과 가호. 그 총화로, 이 검의 칼날을 결코 상하지 않았지만, 서늘한 칼날을 닦아내는 것은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되었다.

데인 왕의 검술은 공간을 통째로 갈아버린다. 마법으로도 펼치기 어려운 수준의 현상을 고작 검술로 구현해내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다.

수차례의 노력 끝에, 페르난데스는 그 기술이 오직 이 검으로만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칼날이. 공간을 갈아버리는 순간 일반적인 장검들은 칼날 채로 갈려 나갔으니.

그의 천이 칼날에 묻은 이물질과 먼지들을 닦아내다가, 돌연 멈췄다. 그곳엔 삐뚜름한 옛 용언으로 ‘다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뜻은 ‘연민’이라.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라. 네 서원이 무엇이든, 그 길에 스러진 자들을 연민하라.]

그의 귓가에 그날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기사도, 막연하고 멍청한 서원과 불투명한 명예를 위해 목숨을 내거는 머저리들의 헌신. 전생에 그라면 그렇게 비웃었을 수도 있다.

그런 꽉 막힌 기사들의 기사도를 따르진 않지만, 페르난데스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비웃지 않았다. 그들의 숭고함을 찬양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들을 괄시하지도 않았다.

-똑똑.

그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칼날을 닦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칼을 칼집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살짝 젖은 머리칼이 빛났다. 아벨이 문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칼을 돌려주러 왔다.”

아벨은 품에 안고 있던 대검을 내밀며 말했다.

“너희 교단의 성물이 아니냐. 아녀자의 손에 있기엔 과한 귀물이구나.”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손에서 대검을 받아 쥐었다. 그 순간 저릿한 신성이 칼자루를 타고 그의 핏줄 안으로 스며들었다. 칼날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페르난데스는 곧 칼집에 칼을 납도해 벽에 세워 두었다.

“몸은 괜찮소?”

“덕분에 아주 편하구나. 과연, 네가 용으로 변하지 말라는 이유를 알겠다. 아주 피곤하더구나.”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녀는 뒤집힌 빈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님에게 차 한잔 건네지 않을 요량이더냐?”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맞은편에 앉았다. 향후 여정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으니. 차라리 잘 되었지 싶었다.

“밤이 깊어, 오랜 자리가 적합하진 않을 것 같소만.”

“용은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고 너 또한 그렇지 않느냐?”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뭐, 시간을 절약하면 좋기야 하지.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펼쳐 테이블 위에 깔았다.

“당장 복귀하진 않을 것이오. 다소 긴 여정이 될 수도 있소. 내일 키르하스가 있을 때 설명하고자 했는데, 마침 이렇게 된 것. 간단히 여정을···.”

“아니. 그런 것들은 네 뜻대로 하거라.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투두둑.

아벨은 테이블 위에 있는 필기구들을 팔로 쓸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무슨 짓이지? 페르난데스가 인상을 찌푸리자, 아벨이 몸을 깊게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아느냐? 용은 알을 낳는다. 나는 낳아본 적이 없다만, 그렇다고들 하더군.”

“···그래서?”

“그럼, 용이 인간으로 변했을 땐 무엇을 낳을 지 궁금하지 않더냐?”

“술을 하셨소?”

“술 대신 샤워는 했는데.”

“그럼 술을 좀 마시고, 눈을 붙이시오.”

“진심이냐? 용이 술을 마시고 취할 성 싶더냐?”

“그건 할 말이 없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뒤로 빼내며 말했다. 용의 예리한 공간 감각으로, 정확히 그 거리만큼 아벨이 가까이 다가왔다.

용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의 시간은 길고, 느긋하다. 장생족 특유의 여유로움이었다.

“나는 내 별자리 바로 곁에 너의 것을 마련하고 싶다고 했었다. 기억 하느냐?”

“그렇소.”

“무슨 뜻인지도 알겠지?”

천구의 별들은 엉겁의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한다. 어떤 존재도 진정코 불멸할 수는 없지만, 별의 시간은 필멸자의 시간 감각과는 전혀 다른 길이의 수명을 가진다.

그러므로, 별자리의 곁에서 함께하자는 말은 아벨이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았다.

-뭘 고민하는 거냐?

‘너는 괜찮나?’

-글쎄, 사실 나도 잘 모르겠군. 아리아, 그 아이에 대한 정절? 애정? 의리? 글쎄···. 내가 너였다면, 나는 저 여자를 품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페르난데스.

페이자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내가 아니지 않느냐? 너와 나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 시간에 아리아는 이제 막 태어났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너의 길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이 길의 끝에, 우리의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도. 너와 내가 다른 존재일까?’

-글쎄. 그러길 바라지만, 아닐 수도 있지. 내가 사라질 수도, 네가 사라질 수도.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그건 페이자쉬나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거야.

그만큼, 과거와의 간극이 벌어졌으니. 과거의 페이자쉬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그에게 있어서, 이제 과거는 기억이자, 경험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도피다. 아니, 일종의 방황이나 여흥이 될 수도 있겠지.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벨이 초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보며 입술 끝을 잘근 씹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울렸다. 이젠 편린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다인 왕의 영혼 탓이 아니다. 이 고동은 그의 것이었다. 젊은 피, 젊은 육신과 본능이 외치는 고함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오히려 픽 웃었다. 이런 철 없는 감각이 낯설고 즐거웠다.

“후회할 거요.”

“내가? 아니면 네가?”

“우리 모두가.”

“후회는 지나간 선택에 대한 미련이다. 페르난데스. 그리고 나는 세상에도, 운명에도. 큰 미련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용은 욕심이 많지. 아벨이 조심스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디모니카는 사흘간 잠을 자지 않아도 활동할 수 있소.”

“재밌구나. 협박이더냐?”

“경고요.”

페르난데스는 초의 심지를 손가락으로 눌러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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