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북부 만신전의 손님 >
*
겨울철 북해는 항해자에게 친근하지 않다. 거친 풍랑, 살을 에이는 추위, 시계를 어지럽히는 돌풍과 눈보라까지. 그러나 레이아의 기함은 바닷바람에 상하지 않고, 가이메른의 해도는 어떤 해역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디모니카의 육신은 자연적 추위에 기능성이 손상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가벼운 튜닉 위에 로브만 걸친 사제복 채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밤이었다. 창에 난 작은 틈으로 북해의 칼바람이 흉흉한 소리를 내며 들리고 있었다. 막 흩날리기 시작한 굵은 눈송이가 창살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쌓여갔다.
그리고, 선실 내부엔. 침상 위엔 아벨이 잠들어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도발하던 그녀는 새벽이 오기 전에 잠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문가에 기대에 놓은 대검을 쥐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후우우웅···.
거친 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그의 몸에 들러 붙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이 정도가 좋았다. 어중간하게 달뜬 몸과 머리를 차갑게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아벨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페르난데스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
그는 선미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눈보라로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눈보라를 무시할 수 있는 육신 덕에, 최고의 밤 산책이 되고 있었다.
한바탕 칼을 휘둘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법한 공터에 이르러서, 페르난데스는 대검의 검집을 풀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적당히 풀린 몸이 차게 식었다. 페르난데스는 서늘한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칼날을 뽑았다.
눈송이가 흩날린다. 광풍에 가까운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렸다. 어둔 밤, 마력등마저 희미한 심야였다. 인적은 드물고, 사위엔 바람 부는 소리 뿐.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행복감? 일종의 성취감? 글쎄, 철없는 육신이 만들어낸 환각에 가까운 감각이다. 방탕한 유열이다.
그는 다른 사제들처럼 무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쾌락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욕망은 보다 먼 곳, 보다 희미한 곳에 있었다.
그의 모든 욕망은 그의 목적의식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것은 그의 참회이며, 그 길은 구도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아야 했다.
-후회하나?
‘아니.’
-그럼 상관 없지 않아?
‘그것도, 아니.’
칼이 뻗는다. 대검의 넓은 검신이 바람의 저항을 받아 배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디모니카의 육신은 이 정도 무게를 무게로 느끼지 않는다.
-후우우웅!
대검이 가볍게 흔들리고, 크게 돌아 반원을 그었다. 마력등의 빛이 검신의 날에 맺히고 난반사했다. 눈송이가 화려하게 빛났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처음 결혼했을 때 그랬어.
‘네가 나야. 페이자쉬. 적어도 그 때는 그랬어. 웃기는 소리하지 마.’
칼을 치켜들고 잠시 멈춘다. 그의 눈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동체시력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인지하고, 바람의 결에 따른 그 움직임을 헤아린다.
말레이른과의 일전에서처럼, 그의 감각이 그 지평을 넓혀갔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의 움직임, 동체의 물성을 파악하며. 뇌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디모니카의 육신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후우우웅!
다시금 칼이 춤춘다. 허공을 그으며, 눈송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좌로, 우로, 다시금 반바퀴 돌아 단 한 번의 머뭇거림 없이. 온전히 한 획의 움직임으로—
-후우우웅!
대검이 눈을 가른다. 다섯 번의 검격이 호흡의 끊김 없이 이어진다. 대검 검술이란 회전과 연환에 근간을 두는 법. 단 한 차례의 강격에 전념하는 엘프 검술과는 그 궤가 다르며—
‘물론 즐겁지. 행복하고, 기쁘지. 이 세계, 그 어떤 누군가가. 내 과거를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당연히 기쁘지.’
-그런데 왜?
‘저 호의가 내가 만들어낸 계획이란 점이. 지금의 판도, 사람들의 호의, 내 주위의 관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짜두었던 판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호의를, 단순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페르난데스는 끝없이 의심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모든 타인을.
그는 아내를 지키지 못했고,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으며, 수 많은 영웅과 선인들을 장대에 매달았고, 끝내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에 일조한 악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떤 호의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상대가 아무런 심계 없이, 순수하게 호의를 비추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의도한 결과가 아닐까.’
자신을 좋아하도록, 그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도록. 그렇게 그가 유도한 것은 아닐까? 키르하스의 경우처럼, 그것이 자신의 계략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그가 펼치는 계략의 대부분은 아군에게 부채의식을 심어 넣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신에게 더 깊게 매몰되도록.
그러므로, 아벨. 그리고 키르하스의 호의는 오히려 과분하다.
-피곤하게 사는군.
‘네 삶의 방식이야. 페이자쉬.’
-아니. ‘너의’ 삶의 방식이야. 과거를 반성하는 것 치고는 너무 귀찮은 방법이지. 너는 과거를 회개하고, 부정하고 싶어하는군. 그게 네 방어기제겠지.
‘그게 잘못됐나?’
-누가 잘못이랬나? 착각이지. 그리고 정신차려, 그건 자기객관화가 아니라 단순한 자기혐오에 불과해. ‘내’가 했던 짓은, 그저 생존과 욕망에 대한 투쟁에 불과했어.
‘전생.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짓 치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래서, 자살할텐가? 과거는 돌이킬 수 없어. 하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지.
그리고 다행히도 우린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회귀했다. 페이자쉬의 말을 들으며, 페르난데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눈송이가 그의 머리칼 위로 나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체열에 금세 녹아 흘러내렸다.
차가운 물이 머리칼 끝에서 방울져 콧대를 쳤다. 그와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손목이 살짝 비틀리며 대검의 방향을 틀었다.
‘그래. 바꿀 수 있지. 그 끝에 우리의 구원이 있기를.’
과거로 돌아와 미래를 바꾼다. 그 말은 곧, 페이자쉬라는 기억의 죽음을 의미했다. 페르난데스도 페이자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가 다른 차원, 다른 세상의 낡은 망령으로 사그라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이 있기를.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이 다르더라도. 이 길의 마지막에, 그 둘 모두가 함께 웃기를.
-콰드드드득!
공간이 갈려나간다. 한 번. 쏟아지는 눈송이가 반으로 갈라지고, 흩어지고, 으스러지며. 대검이 공간을, 그 사이의 눈송이를. 또는 후회와 회한과 자기반성과 혐오, 그 모든 것들을 베어내듯.
-콰드드드득!
두 번. 아래에서 위로 쳐내며, 다시. 눈이나 바람, 허공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끊어내듯이.
-으득.
손목이 급격히 반대로 돌아가고, 그 부담으로 인대가 붓는다. 상처난 근육이 달아오르고, 겨울 바람에 식어갔다. 칼날이 뒤집히고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옆으로, 또. 좌에서 우로. 대각으로 그어 올리고, 한 바퀴 돌아 다시 내려 꽂힌다. 한 차례의 검무가 반 호흡 안에서 일어나며.
바람이 끊어지고 그 결에서 새로운 바람이 치고 올라온다. 페르난데스와 대검의 동작에서부터. 천천히, 더 빨리. 더 거세게!
-콰드드드득!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땀과 눈에 젖어 헐떡이며 눈을 떴을 때.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눈도, 바람도 없는 순간. 대검이 만들어낸 완벽한 무풍지대 아래에서, 페르난데스는 반개한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머리가 식었군.’
-충분히 쉬었나?
‘다행히.’
-스르릉.
칼날을 칼집에 납도한 이후에 다시 그의 몸 위로 눈이 쏟아지듯 떨어졌다. 손목과 팔뚝의 욱신거림이 빠르게 진정되고 있었다. 심장이 맥박치며 디모니카의 혈액을 전신에 돌렸다. 찢어진 근육과 부어오른 인대가 순식간에 자리를 찾는다.
디모니카의 육신은 이 정도의 운동에 상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손목 어림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틀었다.
-짝, 짝, 짝.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발을 멈추고, 흩날리는 눈발 너머에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 희미한 마력등 탓에 어둠 속에서 박수치는 새하얀 손만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아래를 노려보았다.
새하얀 손이 아니다. 뼈였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천천히 손을 얹으며 자세를 잡았다. 곧, 저 밑. 그림자 아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전사로군. 아주 멋져.”
“누구냐?”
“오, 난 많은 이름으로 불렸지. 친구.”
그림자 아래에서 천천히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아무렇게나 뻗친 더벅머리, 화려한 문신이 그려진 벗은 몸. 디모니카를 연상시키는 거구의 근육질. 몸의 절반 이상이 뼈와 드러난 살점으로 엉성하게 이어 붙은 괴인이었다.
명백히 인간은 아니었다. 페르난데스는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존재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준신, 또는 반신이군.
사내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흘렀다. 사내는 빛 아래로 건들거리며 걸어 나왔다.
“광대, 위선자, 사기꾼, 변신자···. 나에겐 아주 아주 많은 이름들이 있어. 나도 가끔 헷갈릴 지경이라니까? 하하, 친구. 그러니, 우리 지금은 내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해보지.”
해보라는 듯,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픽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검이 닿지 않을 거리에 멈춰 섰다. 그는 눈 덮인 화단에 대충 걸터 앉아서 발을 까딱거렸다.
“나는 자네가 ‘선신 만신전’의 영역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다네. 이제 여기부터는 북해상. 만신전의 권역에서 벗어난 곳이야. 자네 신들은 자네에게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어.”
“처음부터 도움을 바라고 행동한 적 없어.”
“정말 그랬나? 뭄토를···. 오, 난 그게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도 못했지만. 뭄토를 죽일 때. 온전히 자네 힘이었나? 내가 알기로는, 자네 그 소중한 축복들을 모조리 잃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도구에 불과했어. 그래서, 넌 누구냐. 그 사건을 어떻게 알고 있지?”
“내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사내의 눈이 이글거렸다. 사내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들어 딱, 하고 부딪쳤다.
“죽음의 신성. 놈이 삼킨 죽음의 신성이 바로 나였어.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나의 힘도 있었지. 세상을 떠돌다가 갑자기 집어 삼켜지니, 참···. 기분이 더럽더군.”
뭐, 네 덕이 자유를 얻었지만! 사내는 낄낄 웃었다.
“자유를 찾았으면 그만이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지?”
“나는 북부 만신전 출신이라네. 친구. 그리고 자네와 나는 같은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목적?”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더니··· 아주 개판이더군. 너무 무서워서 발을 딛기도 전에 빠져나왔지. 자네도 관심이 있지 않나?”
사다르켈리사. 페르난데스가 눈을 가늘게 뜨자 사내가 박장대소했다.
“그래, 그래! 하나가 어렵지, 둘이 어렵겠어? 대악마도 잡아 본 놈이 더 믿음직스럽지. 이 험난한 세상, 자네도 죽이고 싶은 녀석이 하나 쯤은 있겠지. 나도 그렇거든. 다행히, 이번엔 자네와 내가 같은 녀석을 싫어한다는 거야.”
“그게 네가 아니리라 확신하나?”
“그래, 오 난 절대 아니지. 친구. 나도 자네만큼 악마를 증오하거든! 그리고 다른 ‘신’들도.”
사내는 킬킬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심지어는 그 신들을 신봉하는 녀석들도. 모두, 자네가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들만 저 북부 땅에 가득하다네.”
“그게 누구지?”
“애송이 에리크. 오, 자네 표정이 볼만 한데? 하하. 놈이 세상을 불태우고 ‘발할라’의 영광으로 돌리려는 짓거리를 막아 주게.”
에리크, 또 다시 그 이름이 나왔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천천히 납도했다. 들어볼 만한 이야기였다. 그걸 본 사내의 미소가 짙어졌다.
“대신, 내 자네가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지.”
“뭐지?”
“아나? 북부 만신전에 대해 말이야. 외눈박이 거인 보탄, 그 개자식은 자기가 최고입네 하며 기껏 죽은 용사들을 죄 끌고갔지만···. 애당초 우리 형제들 중 ‘죽음’은 내 영역이었다는 말이야.”
사내는 손가락을 딱, 치며 페르난데스의 가슴팍을 가르켰다.
“내 영역 아래에서, ‘죽음’이. 그러니까. 이 몸께서. 자네의 벗으로 남아 주지.”
사내는 천천히 일어서서 페르난데스에게 작은 물체를 던졌다. 낚아채서 보자, 어스름한 보라색 빛이 감도는 가냘픈 나뭇가지였다.
“조심해. 아주 섬세한 친구니까.”
“이게 뭐지?”
“내가 가장 아끼는 겨우살이. 그걸 품고 있는 동안은 죽음이 자네를 피할 걸세. 남부 ‘전사신’의 축복보다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야.”
사내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존재감이 희미해지더니, 곧 끊겼다.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속삭임이 들렸다.
“외눈박이가 물고빠는 에인헤랴르의 그 ‘위대하신’ 전사 양반들보다, 자네가 나아 보이는군 친구. 원한다면 나를 ‘로프트’라고 부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