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하자트 팔란의 생존자들 (1) >
*
자욱한 해무 속으로 들어선 것이 두 시간 전이었다. 새벽 안개 치고도 과도한 밀도 탓에, 마치 먹구름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안개로 젖은 갑판 위에서 항만이 있을 위치를 노려보았다.
“해가 떴소.”
“그런 것 같군.”
레이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안개의 입자에 햇살이 난반사하여 사방이 온통 희뿌옇게 떠 있었다. 태양이 어디쯤 올라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마력의 잔향은 없소. 기상현상이란 뜻인데···.”
“이 이상 접근하는 건 위험해. 페르난데스.”
“하는 수 없군.”
“돌아갈 텐가?”
“고속정 하나를 내어 주시오. 직접 가겠소.”
페르난데스는 바다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자트 팔란의 위치는 레이아의 해도로 이미 파악했으니 방향을 잘못 들어설 리는 없었다. 그러나 레이아의 기함은 피오르드의 협만 내부로 입항하기엔 과도하게 거대했다.
레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항만 깊숙한 곳까지 안전하게 바래다 주는 것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그녀의 기함은 아벨의 숨결로 반파한 것을 간신히 다잡은 것이 고작이었다. 멀쩡했을 때라면 몰랐으되, 이 상황에 내륙에 충각이라도 한다면 기함에 가해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엘프 종족의 구원자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아는 고개를 돌려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건 어떻겠어? 안개가 이 정도로 심하다면 항구에 등대를 켜놓는 것이 일반적이야. 지금은 등대 빛조차 보이지 않아. 위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안개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란 뜻이지.”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가 보아야겠소. 협만에 이리도 인접했고, 안개가 이다지도 짙은데 초계함이 단 한척도 없소. 레이아 여왕, 이 뜻을 아시겠소?”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지.”
북부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 정보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아군이 될 수 있을 부족에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짙은 안개는 방어자에게 불리한 법이다. 특히 항구 도시의 경우, 물안개가 짙은 날엔 반드시 초계함을 항만 인근에 배치하기 마련이다. 전쟁 위협이 목전에 닥친 항구 도시에서 초계함 한 척도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페르난데스는 가야 했다. 저 지역에 도사리고 있을 위협은, 달리 말해 어떤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전생에 사다르켈리사가 현신한 것은 전쟁의 최후반이었고, 전생과 시간선이 틀어진 지금. 이 북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강림의 과정에 진척을 확인해야 했다.
최소한의 실마리라도 급박한 상황에서 그가 다시 북해를 건너 남부 대륙으로 향하는 것을 선택할 턱이 없었다. 레이아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일이 그르치면 반드시 바다로 나와. 그리고 남쪽을 향해 그대로 항행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그대를 구하러 올거니까.”
“말이라도 고맙소.”
그녀가 가진 가이메른의 해도는 극도의 정밀함으로 인근 해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적어도 바다 위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 그녀의 말은, 페르난데스의 임무가 끝날 때 까지 이 인근 해역에 머물겠다는 의미였다.
어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생산 활동이 불가능한 바다 한 가운데에서, 무역과 행상. 또는 전쟁과 노략 등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은. 그 기간만큼 국력을 고스란히 소모해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호의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레이아는 하, 하고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레이아는 호쾌하게 등을 돌리고 소리쳤다.
“쾌속정을 하선해라! 은인이 출항한다!”
*
-끼이이익. 끼익.
쾌속정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은 목조선에 불과했다. 바람 한점 없는 항만 수역에서 돛을 펼칠 수야 없는 노릇이니, 항해는 전적으로 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노가 해면을 가르고 선박이 전진한다. 페르난데스는 안개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 내부에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상 현상일 텐데···.
‘항구가 멀지 않을 텐데.’
-그림자를 봐.
페이자쉬의 말에 고개를 들자, 안개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피오르드의 장엄한 협곡이 아침 햇살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내항에 도달했는데 등대가 보이지 않는군.’
-끼이이익, 쿵.
그때, 무언가가 선미에 가볍게 부딪쳤다. 키르하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일어나 선미로 달려갔다.
“은공, 파편이 있습니다.”
“파편?”
“배···. 배의 파편이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와 해수면 사이 어딘가에서 그림자들이 연신 일렁거렸다. 점점 더 다가갈수록 확실해졌다. 부서진 선박의 파편들이 온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선박에 탑승해 있던 이방인이 입술을 깨물며 불타는 눈으로 배의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재빠른 손짓으로 나무판자를 들어 올렸다. 판자엔 삼각형 눈이 그려진 문양이 있었다.
“투란다르···. 동맹 씨족인데···.”
“서두르지.”
-끼이이익.
페르난데스는 힘을 끌어올려 노를 저었다. 배가 전진하는 속도가 한결 더 빨라졌다. 그 탓에, 선박에 부딪치는 표류물들이 점점 더 잦아졌다.
쿵, 쿵. 배에 판자가 부딪칠 때 마다. 일행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 멀리, 항구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그리고, 그 실루엣 너머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이었다.
*
“으아아아아!!”
이방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체를 뒤집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이나 공포에 의한 것이 아닌, 순수한 분노에 의한 괴성이었다.
그런 것이 수차례였다. 페르난데스는 울부짖는 사내를 뒤로 하고 가도를 걸었다. 불에 탄 시체, 불에 탄 민가, 그리고 급조된 바리케이드와 그 사이로 얽힌 피와 살점들이 너저분하게 보였다.
안개가 너무나 짙은 탓에 후각이 무뎌진 것일까. 전장의 악취가 생각보다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가도를 가로막은 반파된 바리케이드를 옆으로 치웠다.
-익숙한 광경이군.
‘그러게. 오랜만에 보네.’
이런 파괴된 마을의 전경은 전생, 대전쟁 시절에 흔한 광경에 속했다.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게 오른 담장이 없음에 주목했다.
그것이 불에 탄 탓이든, 직접적인 물리적 파괴로 인한 것이든. 이 마을의 모든 건축물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붕괴되어 있었다.
그 덕에 그는 지금 마치 잔해만이 남은 평원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을의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이곳은 시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즈음이 광장에 속할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마력 한 점 느껴지지 않던 이 안개 속에서, 유일하게 마력의 잔향이 느껴지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의 눈높이보다 높은 실루엣이 안개 속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붉은 안광이 타올랐다.
‘악마로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
짙은 유황 냄새와 함께 지옥의 존재가 뿜어내는 마력이 느껴졌다. 이 마을에 닿는 순간부터 흩어져서 주위를 살피며 돌아다니던 키르하스와 아벨, 또는 북부인과는 달리 페르난데스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걷고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너는 누구냐.”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북부어로 말을 걸어왔다. 페르난데스는 등 뒤로 손을 돌려 칼자루를 쥐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방인. 하자트 팔란에 무슨 용건이 있어 왔느냐.”
“너 말곤 아무도 없나?”
“그렇게 만들었지.”
-스르릉.
안개 너머에서 금속성이 들렸다. 흐린 시야에도 불구하고, 디모니카의 청력과 공간감각, 그리고 페르난데스 특유의 마력 감응이 놈과의 거리를 정확이 잡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칼을 뽑았다. 거의 어떤 소음도 없이 칼날이 뽑혀 나와 그의 손에 단단히 감겼다.
놈의 안광이 점점 더 높게 올라갔다. 거의 거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위치였다. 기마기병의 눈높이까지 올라간 안광이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에서 번들거렸다.
“네 공포가 느껴지는구나. 이방인.”
“잘못 느낀 것 같은데.”
“입은 그렇지 않고.”
-쏴아아악!
대뜸 칼질부터 하는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젖혔다. 풍압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칼날이 그의 머리 위치를 치고 지나갔다.
-스칵!
거의 동시에, 페르난데스는 바닥을 짚고 반바퀴 굴렀다. 또 다른 칼날이 그가 있던 자리를 찍었다. 안개로 젖은 땅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흙을 터트렸다.
“쥐새끼처럼 재빠르군.”
“하하, 이런···.”
페르난데스는 악마의 거친 속삭임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칼날이 안개를 가르고 돌아, 그의 목을 향해 찍히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를 초월한 인지감각.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안개가 일렁이는 촉감, 마력이 흐르는 감각. 그 모든 것이 얽히며 만들어지는 일종의 육감.
눈을 가리고 싸우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체 모를 적과 싸우는 것도, 그리고 악마와 싸우는 것도.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그 탓에, 페르난데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쥐새끼라.
“건방진 새끼.”
-스겅.
놈의 칼날이 목을 치기 직전에, 페르난데스의 허리가 급격히 꺾이며 그대로 대검을 반바퀴 돌렸다.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힘의 배분이었다. 놈의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보라색 손이 허공을 날았다.
“끄윽?!”
“내가 아주 궁금한게 많아.”
-스겅.
놈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다른 팔이 곧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한바퀴 돌리며 일렁이는 안광을 향해 몸을 던졌다. 농밀한 마력과 안개가 그의 몸에 부딪쳤다. 곧 놈의 얼굴이 보였다.
당황과 분노가 반쯤 뒤얽힌 표정. 비늘에 덮인 보라색 피부. 놈은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며 샤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데미드라코로군.
‘이거 또 익숙한 놈들인데.’
네 개의 다리가 달린 도마뱀의 하체와, 인간의 상체. 그리고 도마뱀의 머리를 가진 개체였다. 놈은 성체 데미드라코였다. 양 팔이 잘린 놈이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인···간 주제에 감히!!”
“악마 주제에 감히.”
페르난데스는 북부어로 짧게 대답하고는 놈의 다리를 박차고 등허리 위로 올라탔다. 마치 말을 타는 것처럼 걸터앉아서, 놈의 갈비뼈 틈 사이로 정확히 대검을 박아 넣었다.
데미드라코의 단단한 비늘에도 불구하고, 대검은 두부를 써는 것처럼 수월하게 박혀 들어갔다. 놈의 근육이 수축하고, 장기가 터져 나가는 것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커흑, 하고 놈이 핏물을 흘리며 주저 앉았다. 페르난데스는 놈의 뒷목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갈비뼈 사이에 틀어박힌 대검을 콱 틀었다.
“이단심문관 앞에서, 쥐새끼라고?”
“베이타서스의 개···!! 남부인이 어떻게 여기에?!”
“질문은 내가, 대답은 네가.”
-콰직.
놈의 흉곽이 거의 반쯤 개복되어 장기가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나 악마는 반쯤 마력으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며, 놈들의 육신은 현상과 수육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악마에게도 이런 상처는 물론 치명상이었지만—
‘죽을 수 없어?!’
강제적인 마력화, 즉 육신을 잃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육신에 고정된, 필멸자들의 상태와 같았다. 악마는 고통에 허덕이며 침을 흘렸다.
“그렇게 쉽게 보내줄 수는 없지.”
당장 역소환되어도 할말 없을 치명상. 그러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아니. 페이자쉬는 악마학의 달인이며, 그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해부해본 이들 중엔 데미드라코도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허물어져 헐떡이는 놈의 등허리를 밟고 천천히 칼날을 돌렸다. 커흑, 컥, 놈이 경련을 일으키며 피거품을 흘렸다.
“고작 네놈 혼자서 이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지. 나머지 놈들은 어디에 있지?”
“내가··· 컥, 내가 대답할 것 같나?”
“할 것 같군.”
-콰드득.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돌려 상처를 벌린 후에 속삭였다.
“비협조적인 데미드라코가 처음이 아니거든.”
페이자쉬도, 그리고 페르난데스도. 비협조적인 악마에게 협조를 얻는 것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물질 세계 유일의.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픽 웃었다.
*
시체를 뒤집거나 건물의 잔해물을 뒤적이며 고통과 분노에 허덕이던 북부인의 눈 앞에, 피에 젖은 머리가 굴러왔다. 북부인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도마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곧, 안개 너머에서 페르난데스가 나타났다.
“아직 너희 야를이 살아있다더군.”
“이 놈이 저지른 짓인가?”
“그들 중 하나지.”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될 거다.”
시신으로 확인된 그의 형제들과 가족들, 친구들이 물경 서른 명이었고, 안개가 걷힌다면 그 배는 더 많은 시체들을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상황에서 북부인이 미치지 않은 것은 오직 복수심, 그리고 아직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늙고 피로한 눈을 부릅뜨며 손도끼를 꺼내어 도마뱀의 두개골을 내려 찍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의 얇은 팔과 떨리는 근육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여기서 네 가족들을 수습하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우리 민족에게 전해지는 오랜 속담이 있지. 남부인.”
-콰직.
다시 한 번, 도끼가 악마의 두개골을 찍었다. 퍽, 하고 죽은 피가 튀었다. 북부인은 그 피를 얼굴에 찍어 바르며 기이한 도형을 그렸다.
“누구도 영원히 살수는 없다.”
“너희 신앙은 알고 있어. 하지만 에인헤랴르가 이미 악마의 손에 떨어졌다면 네가 싸움터에서 죽어도 발할라로 갈 수는 없을텐데?”
“적어도 수치스럽지는 않겠지.”
사내는 도끼를 허릿춤에 차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선 더 이상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잘 갈무리된 분노만 감돌 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