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61화 (162/388)

161. 하자트 팔란의 생존자들 (2)

*

사람 머리 만한 도끼를, 사람 머리 만한 팔뚝으로 들어올린 사내들이 수십. 이런 이들이 복작이는 야영지는 으레 흉흉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것이 피난 행렬이며, ‘피난’하느니 죽는 것을 선택하는 편을 더 명예롭게 생각하는 북부인들 사이라면.

증오와 분노, 갈데 없고 풀 수 없는 감정들이 야영지를 감돌고 있었다. 심지어는 모닥불마저 피울 수 없는 백척간두의 상황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한 순간에 실향민이 된 거친 전사들은 당장 서로를 향해 도끼를 던질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거나, 유혈이 낭자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음유시인이 있었다면 이것을 기적이라 하겠으나, 이들 사이에선 당연한 복종에 가까웠다.

장대한 체구의 부족 전사들이 최대한의 침착함을 발휘할 수 밖에 없도록. 그들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이가 있었다.

야를, 부족의 지배자. 조금 더 거칠게, 몇 가지 오류를 감안하고 번역하자면 ‘영주’에 가까운 직책이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북부 사회에서 야를은 영주보다 더 높은 명예를 지닌다.

혈통에 의해 이어지고, 법령에 의해 그 권위를 인정받는 남부의 영주들과 달리. 북부의 야를은 숫한 도전을 꺾고, 또는 그러한 도전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카리스마로 전사들을 지배하는 이들이다.

하나 기이한 점이 있다면, 하자트 팔란의 야를은 아주 어린 나이라는 점이며—

“적습이다.”

허스키한 음성, 그러나 그것이 거칠게 그르렁거리는 전사의 것이라기보단. 미성에 가까운, 듣기 좋게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 같은 목소리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여인의 것이다.

“뭔가 이상하군. 서쪽인데.”

“투란다르. 이 개자식들.”

전사들이 일제히 도끼를 집어 든다. 이들의 흉성을 터트릴 상대를 찾아서. 망토를 둘러 매고 앉아있던 이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일어섰다.

긴 추격과 퇴각, 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자잘한 교전들로 쌓인 피로조차도 이들의 선천적인 야성을 깎아낼 수 없었다. 이들은 처음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투지를 보이며 도끼를 들었다.

“적이 도주하면 쫓지 마라. 예감이 좋지 않아.”

전투에 임해 광란 상태에 도달하기 쉬운 이들을 다루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동시에 복종의 의사를 밝혔다.

거한들이 물러선다. 그 사이로, 낡은 모포 위에 앉은 여인이 보였다. 질끈 묶은 거친 금발은 사자처럼 일렁이고, 새파란 눈이 얼어붙은 빙하처럼 보이는 여인이다.

선대 야를의 실드메이든이자, 하자트 팔란의 야를. 아에렌 팔렌선. 땅에 내려온 발키리라 불리는 여걸. 선대 야를이 대부족의회에서 에리크의 손에 의해 죽임 당하고, 야를 직위를 두고 이어진 수많은 도전을 모두 꺾어낸 전사다.

그녀는 자신의 도끼를 반바퀴 돌려 허릿춤에 차고, 천천히 일어섰다. 여차하면 저 머저리들 뒷머리를 채어 끌고 돌아와야 할 판이다.

하자트 팔란은 멸망했다. 지금 그녀는 부족의 명운을 건 긴 유랑을 시작한 참이었고, 전사들을 함정 속에 몰아넣어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

페르난데스와 일행들은 거의 하루 거리를 그대로 주파하며 추격자들을 쫓고 있었다. 그 덜떨어진 악마의 말에 의하면 하자트 팔란의 생존자들이 도주한 것이 이틀 정도 전이었으니,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핏자국이군.’

-여섯 시간 정도?

페르난데스는 수풀 사이에 엉켜 있는 핏자국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슬거리는 흙은 손가락 끝으로 비볐다. 추격을 시작한 이래로 총 다섯 마리의 악마를 처죽이며 전진하고 있으니, 방향이 틀릴 리는 없었다.

모든 이단심문관들의 기본 소양 중 하나가 악마의 추적이었고, 이에 대해 특히 정통한 것이 헤레티카였으나.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디모니카보다 더 빠르게 악마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핏물 속에 흐르는 신성이 본능적인 혐오감과 거부감을 일으키는 방향, 그 곳에 악마가 있기 마련이었다.

악마 추종자와 악마 사냥꾼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악마를 추종하느냐, 악마를 추적하느냐의 차이. 그런즉, 페르난데스는 어쩌면 물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일 것이다.

악마를 추종해본 경험과 악마를 추적할 신체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니. 페르난데스는 손에 움켜쥔 흙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그가 걸어 나가자, 일행이 말 없이 따랐다.

*

아에렌의 예상보다 적의 습격이 거세어졌다. 야영지를 습격한 하자트 투란의 전사들 사이로 지긋지긋한 실루엣들이 비춘 탓이다.

“세계뱀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전사가 고함을 내질렀다. 성인 남성의 체고의 두 배에 달하는 장신에, 나무 기둥 같은 네 다리가 달린 괴물들이 하자트 투란 전사들 사이를 누비며 달려오고 있었다.

놈들의 붉은 눈에서 안광이 흘러나와 어스름한 저녁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아에렌은 혀를 차며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물러나라! 방진 안으로 들어와!”

“영광을 위하여!!”

복수심에 타오르는 젊은 전사들은 순식간에 광란 상태가 되어 달려들었다. 머저리들. 아에렌은 혀를 차며 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궁병들에게 손짓했다. 궁병들이 활을 먹이는 것을 보자마자 하자트 투란의 전사들이 일제히 방패벽을 세웠다.

-투두두두!

대단위 병력을 향한 일제사격에는 명중률이 중요하지 않다. 충분한 궁병들이 일제히 쏘아내는 화살비는 그 자체로도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다. 이때 궁병들의 숙련도는 명중률이 아니라 연사력에 있었고, 하자트 팔란의 궁병들은 충분히 단련된 전문 궁수들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그저 사냥꾼들에 불과했다. 두어 차례의 화살비를 고스란히 견뎌낸 방패벽이 일제히 터져나가며 북부의 전사들이 괴성을 지르고 돌격해왔다.

두 전사 집단의 충돌은 머릿수가 우세한 아에렌의 병력이 압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를 파고드는 악마들이 충격 보병 역할을 수행하며 전황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아에렌은 짧게 혀를 찼다. 전선이 고착된다는 뜻은 그 시간만큼 고스란히 병력들이 소모된다는 의미였으며. 근거지가 확보된 하자트 투란에 비해 본거지를 잃고 퇴각 중인 아에렌에겐 뼈아픈 손실을 뜻했다.

-콰직!

“끄으아아악!”

악마는 고작 셋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악마나 거대 괴수들을 사냥하는 전문 사냥꾼들이 아니었던 탓에, 이들의 무장은 대인전에 사용할 손도끼나 장검 따위에 불과했다.

그리고 악마들은 거의 기둥이나 다름 없는 거대한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전사들의 목숨을 수확했다. 아에렌은 퇴각을 명령하려 했다. 더 이상 병력이 소모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녀는 아직 방진을 지키고 있던 숙련병들에게 전선 투입을 명령하려 손을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반격의 여지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수도를 빼앗겼으나, 팔란다르 씨족은 거대한 부족이다. 야를의 친위대 몇몇을 제외한 다른 병력들은 당연히 부족의 국경 근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부우우우!!

그때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에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맞은편 능선을 노려보았다. 달이 떠오르는 방향에서 수십 명의 장정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히, 아군은 아니다. 저 방향은 하자트 팔란이 있는 방향, 그러니 그들이 도주하던 방향이었으니까.

‘함정을 대비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선 셈이군.’

아에렌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당연히 적들도 그녀가 근방의 다른 부락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퇴각 도중 발생한 간헐적인 교전은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포위망을 형성하려는 시간 벌이에. 아에렌은 사방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다가오는 투란 부족의 전사들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시종을 뒤로 물렸다.

“내 뒤에 서있어라. 그리고 무기를 집어.”

“야, 야를.”

“갈렌딜, 당황하지 마라. 우리의 목숨은 이미 신들의 선택에 달렸으니.”

앞서 달려나갔던 전사들이 피륙으로 변하는 시간 동안, 남은 전사들과 피난민들이 아에렌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전투 직전에 광란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숙련된 전사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방패벽을 만들며 둥글게 섰다.

아에렌은 서쪽, 그녀의 젊은 전사들이 악마와 적들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을 바라보고는, 다시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 방향에도 어김없이 악마가 섞여 있었다.

세계뱀의 자식들. 놈들은 성인 장정 셋이 달라붙어도 승산을 가늠하기 어려운 강력한 괴수들이다. 존재 자체로도 신을 모욕하는 역겨운 악령들. 아에렌은 바닥에 침을 뱉고는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선조들에게 당당해져라. 하루를 불명예스럽게 사느니, 한 순간을 명예롭게 죽으리라.”

“누구도 영원히 살수는 없으니!!”

전사들이 일제히 아에렌의 말에 복창하며 각오를 다졌다. 방패벽 너머로 포위망이 좁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곁에 다가온 고참병이 낮게 속삭였다.

“야를, 몸을 피하시지요.”

“불을 피워라.”

“예?”

“어차피 우리의 위치는 발각되었다. 놈들이 우릴 포위한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놈들도 우리가 다른 전사들을 규합하기를 꺼린다는 뜻이고. 또, 다른 전사들이 아직 무사하다는 뜻이다.”

고참병의 생각과 달리, 아에렌의 눈은 아직 승산과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즉, 너는 불을 피워라. 이제 곧 밤이니, 여기서라면 카란달 야영지에서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거야. 그 전사들이 여기에 오기 전까지 버티면 우리에겐 승산이 있다.”

“···! 알겠습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일수록 희망은 전염성이 강해진다. 아에렌은 전사들과 부족민들 사이에 퍼지는 실낱 같은 희망을 바라보며 자조했다.

그녀는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란달 야영지는 여기에서 적어도 세 시간 거리에 있었고, 그 짧다면 짧다 할 수 있을 시간조차도 그녀와 전사들에겐 버거웠다.

당장 시야에 보이는 악마가 일곱 개체에, 적 전사들은 아군의 병력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고작 희망으로 견디기엔 그 차이가 작지 않다.

그러나 아에렌은 자신의 부족을 독려하며 다가오는 병력을 노려보았다. 절망에 사로잡혀 학살당하는 것은 하자트 팔란에서의 하루였으면 충분했다.

희망이 아니라 기적이 필요한 순간이었으나, 어쨌건.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아에렌은 곧 고함치며 달려들기 시작하는 적에게 마주 고함을 내질렀다.

*

‘데미드라코가 일곱 개체라···.’

페르난데스와 일행들은 구릉지 위에서 잠시 멈춰서서, 능선 아래로 펼쳐진 전장을 내려보았다. 전투의 유혈에 광란 상태에 빠진 전사들은 그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전장 군데군데에서 전선을 거칠게 밀어 붙이는 데미드라코를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성체 데미드라코를 온전히 물질 세계에 소환하기 위해선 대단히 많은 노력과 제물이 필요하다. 아직 이 시대에 데미드라코는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악마 개체가 아니었다.

그런 개체가 일곱,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북부에 도착한 이틀간 처리한 개체가 다섯. 도합 열둘이 같은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뜻은, 그의 생각보다 이 전쟁이 더 심각한 상황이란 뜻이었다.

그러던 중, 페르난데스의 눈에 방진 안쪽 깊숙한 곳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고함을 치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사자의 갈기처럼 뻗어나온 거칠고 풍성한 금발과, 새파랗게 타오르는 푸른 눈. 페르난데스는 이걸 우연이라 해야할지, 운명이라 해야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워 웃었다.

-반가운 얼굴이로군.

‘과연, ‘위험한 상황’이라 이거지.’

힘과 정의의 사르디엘. 일찍이 그에게 ‘너는 최후에 정의로웠노라.’라고 선언했던 그 긍지 높던 천사의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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