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전략, 전술, 계략, 심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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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란달 야영지, 하자트 팔란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목초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이 야영지는, 하자트 팔란을 중심으로 동쪽 끄트머리의 국경선을 경비하는 감시탑이었다.
하자트 팔란은 비교적 안전한 해역과 방대한 목초지를 가진 영지였다. 기초 자원이 풍부한 까닭에 영지의 전사들은 그 수가 많고 질이 좋았다. 카란달 야영지에 있는 전사들은 너무 혈기왕성하지도, 너무 노쇠하지도 않은 장정들이었다.
아에렌은 야영지에 급히 마련된 연회실 끝단에 앉아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전사들을 내려보았다. 영지의 진정한 힘은 이들에게 있다. 그리고 이들의 미래는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젊은 여인에겐 과도한 부담이겠으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사나움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남부 이방인. 다시 한 번 치하하지. 그대의 공이 아니었다면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상호호혜적인 거래였다고 생각하시오.”
페르난데스는 고기를 뜯던 손을 닦으며 아에렌을 바라보았다. 동토의 얼음처럼 새파랗게 빛나는 눈, 빛 바랜 황금처럼 반짝이는,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 다시 봐도 그가 기억하는 대천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 공교롭군.
‘그렇지. 우리가 가는 곳에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들이 모이고 있어.’
대황야에서의 조우도, 그리고 이곳 북부에서의 조우도. 그가 예상하거나, 그가 추적한 끝에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흐름대로, 일종의 운명이 작용한 것처럼 천사들을 만났고, 그들을 구원했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하지만, 이 북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겠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부족들이 있으며, 하필이면 그 부족에 천사가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겠는가.
-신들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하는건 억측인가?
‘아직은. 그리고 이 상황이 나름 타당하기도 해.’
황야의 대천사, 지혜와 진리의 피에라넬을 만난 것은 가이메른의 예언을 뒤쫓던 결과였다. 조우 자체는 우연이었으되, 적어도 대천사 중 하나가 대황야에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사전에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사다르켈리사에게 저항하는 몇 안 되는 북부 씨족들 중에서, 생존자가 대천사라는 점 또한 타당한 귀결이기도 하다. 대천사의 성정을 타고 태어난 인간이 악마와 손을 잡을 리가 없으니.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개입한 것인지, 또는 운명이라는 녀석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혹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만남일지. 판단할 요인이 너무 부족했다.
“내 정신이 없어 미처 묻지 못했다. 너희가 우릴 도울 수 있다고 했다 했느냐.”
아에렌은 벌꿀술을 삼키며 물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내려보았다. 냉정해보이는 외관은 그녀의 천품이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내의 손에 갈려나가던 악마들. 그 하나하나가 수십 명의 인육을 살라먹고 현세에 소환된 괴물들이다.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는 하자트 카잘의 제단에서 탈출한 포로들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피와 살점을 바쳐 세계 너머에서 악마들을 ‘찍어내고’ 있는 끔찍한 광경들. 다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광기에 시달리고, 이지를 상실하던 의식들이 빈번히 펼쳐지는 곳이다.
‘에리크···.’
아에렌은 작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쌌다. 약해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지만, 이미 그녀 또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를 지지하는 부족들은 점차 줄어가고 있으며, 그녀의 부족은 상실한 수도를 복원하는 것에도 힘이 부쳤다.
하지만 공세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카잘다르의 저 오만한 어린 야를이 곧장 전력을 이끌고 진격해올 것이다. 이 북부에서 단독으로 카잘다르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부족은 많지 않았으니.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국경에 배치한 병력들을 모두 모아 회전을 준비해야 하느냐? 아니면 에리크에게 복종하고 무장을 해체해야 하는가.
그리고 남부에서 왔다는 저 젊은 전사는 어떤 것을 원하는가. 만일 저 자가 그녀의 부족 내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든 내어 주어야 할 판이다.
“과연 너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느냐? 보탄께서 에인헤랴르의 전사들을 직접 보내오지 않는 이상에야, 우리의 힘으로 에리크를 막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말에 전사들이 웅성거렸다. 몇몇 혈기왕성한 전사들은 이를 악물며 고함을 쳤다. 페르난데스는 그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다 정확한 사정을 듣고 싶소.”
“우리는 수도를 잃었다. 전쟁에서 아직 패배한 것은 아니되,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지.”
북부 씨족들의 수도는 전초기지가 아니다. 가장 노련한 전사들은 모두 국경 인근에 배치되어 있고, 여름이 와 약탈의 계절이 되거나, 전쟁이 벌어질 때에만 중앙으로 소집된다.
그 외의 경우, 수도는 물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전시가 아닌 수도에 상주하는 인원은 민간인과 어린 전사들, 또는 너무 나이가 들어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사내들 뿐이다.
그러니 겨울철의 기습은 놀라울 만큼 유효했다. 평소라면 대부족회의에 고발될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침공이지만, 지금 부족회의는 에리크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다.
“제아무리 방심했다 하더라도 항구도시에 초병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오?”
“그래. 하지만 안개가 밀려오고, 그 직후 기습이 시작 되었어. 우리로써는 손을 쓸 방법이 없더군. 안개 속에서 악마들이 나타나고,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민간인들을 수습할 때 쯤엔 적들이 몰려오더군.”
그런 상황에서 민간인들과 함께 탈출한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한줌의 병력으로 백성을 지켜낸 아에렌의 통솔력을 높게 사고 있었다.
‘역시 자연스러운 안개는 아니었군.’
-마력의 잔향이 없이 그런 대규모 마법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그건···.
‘그래. 신의 힘 뿐이지.’
-기상 현상을 다루는 북부 신이라···.
북부 만신전의 설화에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 대륙의 신이 놈들을 돕고 있다면 대단히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해진 셈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술잔을 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안개와 기습. 그리고 성동격서.’
정보가 얽힌다.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가상의 체스판이 그려졌다. 익숙한 사고 실험이었다. 어둠 속에서 거친 손이 나타나 기물을 옮겼다. 첫 수는 안개. 아마도 신의 힘.
그리고 두 번째, 악마. 단지 그 존재만으로도 민간인에게 겁을 줄 수 있고, 요란하며, 사전에 대비할 수 없는 기습 상황에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존재. 일종의 조커 카드다.
‘수도.’
그렇게 수도를 무너트린다. 이 상황에서 야를을 죽인다면, 흩어진 부족 전사들을 규합할 인물이 없다. 후손이 없는 젊은 야를이 죽게 된다면, 북부인들의 특성상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라도 권좌를 위해 서로에게 칼날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자멸이다. 굳이 외부에서 건드리지 않더라도, 이 수가 유효했다면 하자트 팔란은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에렌. 저 대천사가 살아남았고···.’
이번엔 이쪽 기물이 움직인다. 적들의 마수를 피해 동쪽으로. 자신의 병력들 중 가장 가까운 군영을 향해 한 걸음. 적의 기물이 그녀를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 속의 기물들이 한 칸씩 전진한다.
‘놈들은 아마도 두 번째 계획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다르켈리사는 음흉하니까.
단 하나의 수가 성공할 것이라고 맹신하는 머저리들은 대악마가 될 수 없다. 배후에 대악마가 있다면 두 번째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성동격서.
수도 파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자트 팔란에 가해진 충격은 쉽게 복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국경의 전사들이 수도를 향해 관심을 돌렸을 때, 놈들의 병력이 텅 빈 국경을 넘어 진격해온다.
막을 방법이 없다. 단단히 준비하고 막아서더라도 힘겨운 전투가 될 텐데, 적들이 두 방향으로 치고 온다면 방비할 틈이 없었다. 그들의 수도는 해운 도시다. 수도가 무너졌다는 것은 곧 적들의 바닷길이 열렸다는 뜻이며, 적들에게 바다와 내륙 양방으로 진격할 수단이 확보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그래. 세 번째 수가 남아 있지.
몰려오는 기물들을 밀어내고 페르난데스의 손이 움직였다. 착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반전시키는 한 수.
페르난데스는 눈을 떴다. 어느새 주위는 잠잠해져 있었다. 아에렌의 절망이 전사들에게 전염되고 있었다.
“모든 병력들을 모으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겠소?”
“이틀. 파발을 국경에 뿌리고 수도로 집결하면 그 정도가 걸리겠군. 하지만 하자트 팔란은 방어선이 없는 도시야. 지금은 도시조차 아니군, 잔해만 남았으니.”
아에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성벽 하나, 목책 하나 남지 않은 목초지 위의 폐허. 정면에선 적의 군세가, 후방에선 적의 군함들이 나타난다면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오히려 수도는 사지였다. 배수진 뒤에서도 적들이 도하할 테니까.
“만일 전면전을 벌인다면 보다 서쪽으로, 다알 광산 근방이 나아. 그쪽엔 성벽이 있고, 여차할 때 다른 부족들에게로 빠질 수 있는 샛길들이 몇 갈래 나 있다.”
“그 부족들은 온전히 그대들의 편인 것이 확실하고?”
“···몇몇은. 아마도 아직은.”
“그렇다면 그 의견은 기각이오. 우린 수도로 집결해야 하오.”
단정적인 페르난데스의 말에 아에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옥쇄하자는 뜻인가? 그대가 바라는 것이 정녕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남부로 돌아가. 우린 우리의 전쟁을 할 테니까. 애초에 네가 무엇을 바라고 우리에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군.”
“에리크의 목.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오.”
“놈이 남부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나? 에리크가 야를에 즉위한 것이 올 가을이었으니, 지난 여름 습격 시절에는 놈의 명성이 남부에 흘러갈 일이 없었을 텐데.”
“올해 여름이 아니오. 다가올 여름을 대비하기 위해서지.”
아에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페르난데스는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사정은 중요하지 않소. 다만 우리의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 뿐이지.”
“목적이 아니라 망상이겠지. 에리크를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말인가? 우선 당면한 전쟁에, 그래. 그대들의 무력이 대단하니 전선에서 도움이 되겠지만. 개인의 지원이 전황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느냔 말이야.”
“우리들은 전선에 투입되지 않소. 아에렌.”
이단심문관들의 역할은 전장을 휘어잡는 장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악마, 이단, 그리고 마녀를 사냥하는 것이며. 만일 그들이 어떤 집단에 소속해 있더라도 대대적인 섬멸 작전을 벌이거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단심문관들이 투입되는 곳은 언제나 적들의 심장부 뿐이다. 전선을 누비며 전공을 세우는 것은 속세의 일이며, 설령 적들이 집단군을 이루고 있더라도 그들을 불태우는 것은 병사들의 역할이다.
이단심문관은 적의 종심을 타격한다. 잠입과 추적은 그들의 기본 소양이며, 그들이 칼을 드러내는 때는 오직 적의 심장부에 도달해 적의 목젖을 도려내기 위한 순간 뿐이다.
“전쟁의 기본은 전략을 봉쇄에 있고, 적의 전략을 봉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것부터 시작하오.”
“그래서?”
“그래서, 그리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가장 효과적은 검은.”
페르난데스의 머릿속, 체스판의 기물이 한 칸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 속에서 나타났던 흰 손이 잠시 멈칫한다. 적의 의표, 어떠냐 대악마. 한방 먹었지?
“적의 손에 쥐어진 검이오.”
수도를 향한 기습, 전장 전역을 감싼 포위. 이중 계략이며 뛰어난 성동격서다. 그러므로, 이쪽의 수단 또한 동일하게. 기습과 성동격서.
“전사들을 모아주시오. 수도에서 옥쇄하시오. 나와 당신, 그리고 당신의 가장 뛰어난 정예병들을 하자트 카잘로 보내겠소. 수로를 타고, 적들이 그대에게 했던 방식대로.”
그의 말에 아에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다 같이 죽자는 뜻인가? 고작 우리 몇몇으로 적의 수도를 봉쇄하자고?”
“적들의 주력은 지금 이 근방에 포진되어 있을 것이며, 적의 수도는 그대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소.”
“다르지. 놈들은 안개를 타고 기습을 해왔다고···.”
“누가 안개를 부릴 줄 모른다 했소?”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신의 권능을 따라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전술 단위 마법은 그의 특기이며, 마법전은 그의 장기였다.
적의 수단으로 적의 목을 친다. 이것이 그가 전생에 가장 즐겼던 전략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유효하던 전략이지.
페이자쉬가 낄낄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