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전략, 전술, 계략, 심계 (2)
*
“이 작전은 시간 싸움이오.”
“그리고 우리에겐 극도로 불리한 시간 싸움이지.”
페르난데스와 아에렌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어린 시절부터 실드메이든으로서 교육받은 그녀는 이미 충분한 전술적 감각을 지닌 전쟁 군주였다. 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선에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줄 아는.
-제법이군.
‘대천사의 천품을 타고났다면, 저 정도는 해야지.’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내려보았다. 북부 대륙의 전도가 엉성하게나마 그려진 양피 지도였다. 어설픈 바느질로 지형들이 삐두름하게 표기된 지도였으나, 전술 지형에 대한 정보는 모자람이 없었다.
“여기에서, 하자트 카잘까지 항행할 때. 가장 빠른 수역으로 간다 한다면 얼마나 걸리겠소?”
“해상으로는 이틀. 지상으로는 산맥을 경유해 닷새 정도.”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자트 카잘과 하자트 팔란은 산맥을 중심으로 국경을 그리고 있었다. 해상에서 해상으로 침공한다면 이틀···.
“솔직히 말하겠소. 그대의 병력은 반나절을 버티지 못할 거요.”
“알고 있다.”
거리는 곧 시간이다.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툭, 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양동작전은 양측 편의 타이밍에 일말의 어긋남조차 없어야 성립되는 것이며, 아에렌의 병력은 최선의 방어진을 치고 견디더라도 이틀을 견딜 수 없었다.
‘전선에 나설까?’
-우리가 더 느릴 거야.
페이자쉬는 짧게 신음했다. 페르난데스가 적의 병사들을 죽이고 밀어 붙이는 시간보다, 아에렌의 병력이 소실되는 시간이 더 빠를 것이다. 소규모 교전이었다면 모르되, 적이 대대적인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지금, 일부 전선의 전공이 곧 전투의 승리로 이어질 수는 없다.
‘마법은 아껴야 한다.’
안개를 부리거나 간단한 스펠 카운팅을 넣고, 주문 쐐기를 박는 수준의 ‘가벼운’ 주문을 제외하고, 이른바 시그니처 스펠이라 불리는 ‘이름 있는’ 주문들을 사용하기엔 청동 왕좌의 잔량이 넉넉치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주문을 사용한다면 당장 사다르켈리사의 눈에 띌 것이다. 지금이야 이단심문관 한 사람이 잠입했다는 정도의 정보만 입수했겠지만, 사다르켈리사가 본격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한다면 연고 없는 북부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도, 병력도, 마법도 불가능한 상황. 양손을 묶은 채로 분노한 거인을 상대하라는 편이 이보다 가망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하자트 투란, 이들은 아군인가?”
“동맹 협상을 위해 우리측에 왔다가, 공세에 휘말렸던 이들이야. 아마도 카잘다르의 병력들이 놈들 또한 공격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카잘다르는 양면 전선을 벌이고 있는 셈이군?”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렇겠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해. 저 산맥 너머의 일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페르난데스는 북부 대륙의 남부 해안선을 점령하고 있는 다른 도시들을 바라보았다. 하자트 투란, 하자트 카잘, 하자트 팔렌. 가장 거대한 세 개의 부족. 그리고 자잘한 작은 영지들까지.
산맥을 돌아 간다면 닷새, 바다로 온다면 이틀. 습격이 이틀 전이었으니 지금쯤 적의 병력은 국경 근처를 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폐허에 도착하는 것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하루. 단 하루를 버틸 수 있다면 우리의 승리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도를 더 이상 노려볼 필요는 없었다. 그의 기억력은 거의 사진을 영사한 것처럼 머릿속에 지도를 투영할 수 있었으니.
그의 머릿속에 보다 입체적이고, 활동성 있는 지도가 펼쳐진다. 다시금, 저 멀리에서 거친 손이 나타난다. 비늘 덮인, 투박한 손이. 사다르켈리사의 손이 움직였다.
-탁.
놈의 기물들이 손짓에 따라 이동했다. 한 칸씩, 목젖을 죄어 오는 올가미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수도는 폐허가 되었고, 적의 병력은 최대한의 수준을 상정해야 한다.
그런 반면, 페르난데스의 기물들은 가늘고 연약했다. 방책 하나 없는 폐허와, 절망감과 패배감에 휩싸인 전사들. 인간 병력의 수로 따지자면 하자트 팔란 또한 대부족, 결코 밀리지 않으나···.
‘변수는 악마.’
그의 생각에 따라, 어둠 속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마치 그의 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대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고작 한 사람의 이단심문관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지난 전장에서 가장 화려하게 날뛴 것은 다소 의도적인 일이었다. 사다르켈리사는 악마의 눈을 통해 물질 세계를 관조할 수 있다. 모든 데미드라코들은 그녀의 자식들이었으니.
그러니, 사다르켈리사가 알고 있는 것은 페르난데스의 존재 뿐.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남부의 전사라는 것 뿐.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기물들을 살핀다. 그 사이에, 한 여인이 서 있다.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내려보며 멋스럽게도 한 손엔 곰방대를 물고 고아하게. 후—. 담배 연기가 그녀의 입가에 어린다.
‘우리의 변수는, 대황야 최강의 야전사령관. 불패자 키르하스다.’
페르난데스가 손을 뻗는다. 하루를 벌기 위한 그의 조커 카드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는 이들에게 옥쇄를 각오하라 말했다. 그 말은 곧 이 자리에 남아 미끼가 되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간다.
페르난데스가 그녀에게 이들을 도우라 명령한다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녀에게 사지를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사륵.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손 위에 따듯한 손이 덮였다. 묵상에서 깨어난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의 눈 앞에 키르하스가 있었다.
“은공.”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하하, 정말 대단하군.
페이자쉬가 낄낄거렸다. 대전략의 영역에서 보다 좁혀져, 전술 단위의 영역으로 온다면 그녀보다 뛰어난 야전사령관은 이 북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페르난데스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민하는 페르난데스의 모습에서 그의 전략을 읽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기꺼이 미끼가 되겠노라고. 그리 함으로써 페르난데스에게 필요한 하루를 벌겠노라고. 키르하스의 눈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를 잃을 수는 없다. 너는 이보다 더 위대한 전장에서 명성을 과시하며 영웅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너를 믿겠다.”
라고, 그녀의 올곧은 눈을 향해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키르하스가 눈부시게 웃었다.
“저 또한, 은공을 믿겠습니다.”
하루를 버는 것은 작전의 필요 조건. 그리고 작전의 성패는 그 벌어낸 하루 안에 적진의 종심을 타격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은 팔다리가 묶인 채로 완전무장한, 분노한 거인과 싸우는 것과 같다. 그 불합리한 곡예의 성패를 온전히 신뢰하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칼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눈을 내려 깔며 작게 갸르릉거렸다. 그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페르난데스는 곧 지도를 바라보는 아에렌에게 말했다.
“작전을 수정하겠소.”
“어떻게?”
“나에게 병력을 양도하시오. 내가 직접 하자트 카잘에 상륙하겠소. 아에렌, 그대는 투란다르 씨족을 향해 가시오. 지원군을 모아 회전을 준비해야 하며, 만일의 경우라도 그대는 적어도 복수를 시작할 기반을 다질 수 있소.”
“···날더러 나의 부족을 버리라는 소리냐?”
“아니오. 맡기라는 뜻이오. 여기 이 아이에게.”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길을 느끼던 키르하스가 살짝 눈을 떴다.
“물질 세계 최고의 야전사령관이,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를 벌어줄 것이오.”
전장에서 거리는 곧 시간이고, 시간은 절대적인 소비재다. 적 병력이 도달할 때 까지 남은 시간이 하루, 페르난데스가 카잘다르의 종심을 타격할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이 이틀.
모든 작전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 ‘하루’. 단순 산술이었으며, 달리 말해 뒤집기 불가능한 물리적인 한계를, 이 아이가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에렌은 잠시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며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 보자꾸나. 그 하루를 벌 방법이 무엇인지.”
*
등대 하나 밝혀지지 않은, 그리고 수많은 잔해와 암초가 도사리고 있는 파괴된 협만을 심야의 어둠 속에서 항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등불 조차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배 안에 정좌하고 이따금씩 손짓을 할 뿐이었다. 노를 쥐고 있는 전사들은 마치 눈을 가린 채로 절벽 끝을 향해 달려나가는 기분에 공포에 질리고 있었다.
하자트 카잘을 향해 급파된 종심 타격 병력. 멀쩡한 쾌속정 단 한 척에 수용할 수 있는 열댓 명의 사내들과 함께, 페르난데스는 승선 즉시 이렇게 명령했다.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그저 온 힘을 향해 직진하라.’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다른 설득을 하거나, 더 안전한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그저 빠르게, 단지 직진 만을 명령했고. 전사들은 악마를 세 합 안에 갈아 죽이는 강대한 전사에게 반쯤 굴복한 채로 노를 저었다.
-쏴아아아···.
곧,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노를 잡은 전사들은 물살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그리고 바람의 촉감이 달라지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다. 북부인들은 모두 노련한 뱃사람들이나 다름 없었고, 이들에게 협만이란 집과 같았으니까.
그러니, 그들은 이 순간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적을 일으켰는지 깨닫고 전율했다. 전투의 잔해물이 널리고, 파괴된 등대와 항구의 암초들 사이를 전속력 항행으로 건너 빠져나온 것이다.
천려의 일실이라도 있었다면 목조 쾌속정은 그대로 좌초했을 것이다. 어두운 밤, 그들을 구할 이들 따윈 없이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대낮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심야에 성공했다. 다만 손짓을 따라 직진한 것 만으로! 전사들은 노를 젓는 것조차 잊은 채로 멍한 눈으로 정좌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힘든가?”
“엇, 어.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들 쉬고 있지? 이제 막 협만을 빠져나왔을 뿐이다. 이틀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해.”
가지. 페르난데스는 살짝 눈을 뜨며 말했다. 그의 말에 전사들이 황급히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삐걱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쾌속정이 원양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페르난데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의식의 내부로 침잠했다. 바닷바람이 닻을 울리는 소리, 해류가 흘수선 아래를 치고 흐르는 감각, 대기에 흩어진 미묘한 마력의 잔향과 그 반사광들.
눈을 가린 채로 열린 오감, 그리고 그 모든 감각들이 얽혀 만들어지는 일종의 육감. 수인이 조용히 접힌다. [제 3의 눈]. 또는 [비전 시야]라 불리는 마법이었다.
그의 안저 아래에서 암녹색 불똥이 튀며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육안의 시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일정 반경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바라보았다.
해류와 그 아래의 생선들, 바람과 그 사이의 날벌레, 또는 새. 혹은 바람 사이사이를 유영하는 마력. 흐름. 예언자들이 그렇듯이, 지금 그는 일종의 정보 반사 독립체가 되었다.
사건과 사건이 부딪치고 와류를 이루며 생겨나는 정보들을 직접 관측하는 시야. 육체의 한계와 인지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자의 시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다. 과부하 직전까지 달아오른 뇌수가 펄펄 끓는 느낌이 생경했다. 강대한 마법이 으레 그렇듯이 비전 시야 또한 지독한 백래시를 수반한다.
과도한 정보 인지로 인한 광기. 그리고 수명의 감소. 그러나 다행히도 페르난데스에게 그 두 가지는 모두 소모 가능한 자원에 불과했다.
쿨럭, 하고 마른 기침이 난 후에. 과도하게 밀집된 혈압으로 상한 장기 사이에서 핏물이 튀어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연신 비전 시야를 기동했다. 혹시 모를 암초와 표류물, 또는 난파된 배의 잔해물들을 피해. 전력으로 그 사이를 질주하는 곡예를 연신 성공하며.
광기는 그의 천품이고, 수명은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소비재다. 그러니, 페르난데스에게 이 마법은 부작용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 너머, 사다르켈리사가 웅크리고 있을 곳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