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뱀의 왕 (1)
*
-도착했군.
‘반나절 정도 벌었어.’
저 멀리 등대 빛이 반짝이는 항구가 보였다. 이른 새벽, 페르난데스는 반쯤 망아 상태에 빠져 반사적으로 노를 젓는 전사들을 깨웠다.
거의 완전히 탈진한 전사들은, 그럼에도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페르난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자트 팔란부터 하자트 카잘까지 이틀의 거리를, 하루 하고 반나절이 채 되지 못한 시간 안에 도착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속도로 항행한 것은 내 난생 처음이군. 남부인들은 모두 이런가?”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우리는 단 한 척으로 적진에 파고든거야.”
페르난데스가 차갑게 말하자, 그제서야 전사들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자트 카잘은 북부 최강의 씨족 중 하나였다. 본디 보잘 것 없는 영지였으나, 야를 에리크의 시대에 급속도로 성장해 주위 부족들을 잡아 먹었다.
이제 카잘의 인근에 남은 적대 부족이라곤 팔렌다르 씨족 뿐이었다. 그리고 그 씨족의 마지막 한 수가 그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전사들은 뻐근해진 팔목을 풀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뭐, 어쨌건.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지.”
한쪽 눈에 큼직한 상처가 있는 전사가 껄껄 웃었다. 그 사나운 웃음이 좌중에게 전염되며, 전사들은 나지막이 끌끌거렸다. 이들은 천천히 몸을 도사리며 각자 방패와 도끼 따위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구원자 양반. 우릴 어떻게 저 항구까지 데려다 줄 생각이지?”
“마법으로.”
페르난데스의 말에 전사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를 수 초 안에 썰어내던 전사가, 마법사였다고? 전사들의 표정을 무시한 채 페르난데스는 갑판 위에 꼿꼿이 서서 양 팔을 들어 올렸다.
-후우웅···.
바람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눈을 감은 페르난데스는 마치 관현악단의 지휘자처럼 손을 들었다. 검지와 약지가 접히고, 손목이 느릿하게 돌아가며 한 수.
-스아아악···.
마력의 매듭이 맺히고, 동시에 파괴되며 수십 갈래의 주술 문자로 변한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결코 아니었으나, 페르난데스의 감각은 시야 너머의 것을 포착하며 섬세하게, 그리고 다시 섬세하게 이들을 조율했다.
-사르륵···.
휘장을 걷어내는 손짓으로 명멸하는 마력을 흐트러트렸다. 청동 왕좌의 회로가 기동하며 들숨을 쉬듯 그 흐름을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으며 주술을 맺어낸다.
이 순간 그의 손이 맺는 수인, 손목의 각도, 팔을 흔드는 속도와 방향. 좌우나 상하로 한정할 수 없는 입체적인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흔들리는 손짓 그 자체가 곧 마법이 되고.
-스아아악···.
그 주문 한 줄기 한 줄기가 천려의 일실조차 없었으니. 마침내 세 번째 수인이 집혔을 때에, 페르난데스를 중심으로 농밀한 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 오오···.”
전사들은 망연히 감탄하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어떤 불가해한 종류의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당장 바로 곁에 있는 동료의 기척조차 가려지는 끈적한 안개가 이 항만 전체를 감싸며, 마치 바다가 한숨을 토해내듯 스며 올라왔다.
-스라일라트의 안개···. 이걸로 재미를 좀 봤지.
페이자쉬는 어딘지 그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전진하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너희는 볼 필요가 없다. 내가 보고 있으니.”
페르난데스의 다른 손이 그 이마 위에 얹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한 채로 쫙 펼쳐졌다. 그 안에서 보라색 빛을 뿜는 눈이 그려졌다.
‘진실의 시야. 지금 청동 왕좌의 수준으로 얼마나 버티지?’
-세 시간.
‘충분하군.’
세 시간 안에 작전을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작전 자체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하고 웃었다. 언제는 다급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아니, 아니다. 전생의 일평생을 거쳐, 그리고 지금의 이 삶을 살아가며. 그는 언제나 등 뒤에 괴물을 피해 내달리는 입장이었다. 다급하지 않은 적 따윈 없었다. 종말이 쫓아오고 있는 판이니.
그러니. 전진하라. 앞으로, 앞으로···. 페르난데스는 뿌연 안개 속을 가르는 노와 전사들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만들어내는 기묘한 리듬 속에서 웃었다.
*
“마법이군.”
오라이온은 은제 단검을 늘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끈적한 마력이 이 항구를 덮친 그 순간부터, 그는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단검의 끝에서 핏물이 방울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곁에 서서 공손이 손을 모으고 있는 사내에게 턱짓했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물러서서, 곧 밧줄에 칭칭 묶인 청년을 끌고 왔다. 온몸에 기이한 낙인이 찍혀 있고, 머리칼이 모두 잘려나간 청년은 재갈이 물린 채로 겁에 질려 헐떡였다.
거칠게 듬성듬성 잘라낸 탓에 두피엔 상흔이 가득했다. 오라이온은 단검을 들어 천천히 두피 위에 얹었다. 그 서늘한 감각에 청년이 눈을 꼭 감고 흐느꼈다.
“두려우냐.”
“흐으읍. 읍. 끄윽.”
“두려워 하지 말라. 너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오, 다만 너를 위대한 낙원으로 이끄려는 것이니.”
오라이온의 말에 방 안의 사내들이 일제히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헐떡이며 희망과 공포가 반쯤 뒤섞인 눈으로 오라이온을 올려 보았다.
“이 물질 세계는 곧 종말을 맞이한다. 이 곳에 있는 이들을 이끄는 것이 나, 선지자 된 오라이온의 역할이며. 너, 우리 속의 어린 짐승아. 그저 따르라.”
“흐으윽. 흡.”
“오냐, 오냐. 두렵겠지.”
부드러운 말투에 천천히 청년의 눈 속으로 희망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청년의 눈 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개자식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모조리 죽였다. 여기서 풀려난다면, 반드시. 보탄의 수염에 맹세코 이 개자식을—
-서걱.
그 생각이 마저 끝나기 전에, 청년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청년의 목젖 아래로 칼날이 파고들었다. 컥, 하고 신음한 청년이 죽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죽음이 청년의 몸을 감쌌다.
-촤르르륵.
피가 바닥에 흩어졌다. 핏물들이 바닥에 그려진 음각을 따라 흐르며 붉은 빛을 내뿜었다. 오라이온은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단검을 몇 차례 허공에 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방 안의 사내들이 따라 수인을 짚었다.
-후우웅···.
뜨겁고 끈적한 바람이 방 안에 대류했다. 시체와, 핏물, 그리고 핏물을 담은 수많은 그릇들. 그 사이에서 빛나는 거대한 오망성.
넓은 방, 나무 기둥 하나하나에 모두 피와 기름으로 그린 루네글리프가 빼곡히 새겨져 있고, 그 문양들이 오라이온의 발 밑 너머, 방의 중심부를 향해 나뭇가지처럼 뻗어 있었다.
오리아온은 곧 다시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음 제물이 헐떡이며 끌려 들어왔다.
“너, 나의 충직한 시종아. 이방인을 내쫓아라.”
“예, 주인님.”
“시간을 벌어라. 곧 의식이 끝날 테니. 뱀 다섯 마리를 허하겠노라.”
오라이온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곁에 선 사내의 팔뚝에 손을 얹었다. 치익,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올랐다. 오라이온이 손을 떼자 그 아래로 검은 루네글리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안색이 한 차례도 변하지 않은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섰다. 오라이온은 곧 다음 제물을 향해 다가갔다.
“두려우냐.”
다음 제물, 젊은 아낙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
온 사방에 죽음의, 그리고 지옥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것이 항구에 발을 디딘 페르난데스가 느낀 첫 번째 감상이었다. 반갑군. 페르난데스는 대기질에 섞인 사자들의 절규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강력한 주문이 흐르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절망과 공포가 중첩되어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 자체로도 일종의 마법이 된다. 이 지역이 꼭 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느낀 순간, 페르난데스는 이 작전이 어그러졌음을 직감했다. 하자트 카잘은 카잘다르 씨족의 수도도, 에리크의 본영도 아니었다.
지금 이 도시는 그저 산실에 불과했다. 외부에서 끝 없이 다면전을 벌이는 에리크가 승전을 올리고 노예를 사로잡아 이곳으로 보내면, 여기에서 악마들을 말 그대로 ‘찍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이 일족의 수도가 될 수는 없었다. 어떤 멍청한 지도자도 자신의 수도에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을 열어 젖히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지도자라는 정신만 박혀 있다면.
“정말 슬프지 않나, 친구?”
페르난데스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진실의 시야 덕에 그는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로프트를 볼 수 있었다. 로프트는 바람처럼 어디선가 나타나 그의 바로 옆 담장 위에 앉아 있었다.
“이 냄새, 이 죽음들을 봐.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자비하지. 안돼, 안돼. 죽음이 고결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저속하게 소비되어선 안 된다고.”
로프트는 푸른 안광이 명멸하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떠돌던 영혼의 잔재들이 휘몰아쳤다.
“멍청한 것들. 나와 내 형제들이 무슨 이유로 전사들을 모았고, 어째서 전쟁을 준비했는지도 잊어버린 어리석은 것들···.”
-스르륵.
로프트는 뼈로 이루어진 손가락을 허공에 찔러 넣고 흔들었다. 곧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영체 하나가 그의 손바닥 안에 모여 들었다.
“믿었던 신에게도 버림받은 것들. 아비 없이 홀로 떠도는 것들. 이··· 가련한 것들을 보게. 친구.”
-화륵.
로프트가 손을 움켜쥐자, 영체가 곧 잠잠해졌다. 악마에게 제물 바쳐진 육신과 영혼 탓에, 영체는 불안정한 파편에 불과했다. 죽음의 순간에 겪었던 고통과 공포를 끊임 없이 되풀이하는 망가진 태엽장치 같은 영혼 파편이었다.
로프트가 손을 펼치자 작게 반짝이는 보석이 있었다. 눈물처럼 반짝이는 작은 보석을, 로프트는 뼈 사이로 굴리다가 곧 집어 삼켰다.
“반편이 녀석. 편히 쉬어라. 네 슬픔은 죽음이 삼켰으니.”
“사다르켈리사는 어디에 있지?”
“앞으로 나아가게, 친구. 자네가 가려는 방향이 맞으니.”
로프트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의 삐죽 뻗친 머리칼이 바람결에 너울졌다.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고개가 확 꺾였다.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창이 날아와 꽂혔다.
그 모습을 보고 로프트가 오, 하고 감탄했다.
“죽어도 괜찮았을텐데. 내가 자네의 친구가 아닌가.”
“아니야.”
“이거 섭섭하군 그래. 하하.”
페르난데스는 담장 위에서 킬킬거리는 로프트를 무시하고, 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진실의 시야 너머로 다가오는 거대한 체구가 보였다. 네 다리가 달린 악마들이 양 손에 창과 도끼, 대검 따위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자세를 잡았다. 로프트는 다가오는 악마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탄, 이 머저리···. 저들을 막고자 에인헤랴르를 세웠던 것이 너였거늘···.”
곧, 로프트는 박수를 짝 쳤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는 담장 위에서 뛰어 내렸다. 곧 그의 몸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딜 가지?”
“로프트는 우리 말로 바람이란 뜻이라네. 친구. 그리고 바람과 죽음은 어디에나 있지···.”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게나. 떨어지거든 내가 받쳐줄 테니. 로프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흩어지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칼을 뽑았다.
그의 등 뒤에 도열한 전사들이 혼잣말 하는 페르난데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엔 로프트가 보이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멍청한 표정을 보다가 픽 웃고는 말했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사들이 외치자, 저 멀리에서 다가오던 악마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어차피 그럴 예정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뽑으며 생각했다. 하여간 신이란 놈들 중 진짜 도움 되는 놈들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