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뱀의 왕 (3)
*
사다르켈리사의 나락, 뱀들의 영토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억지로 욱여 넣어 세계의 경계선을 찢으며 악마가 도래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강대한 마물의 육신은 그 자체로도 마법 현상이나 다름 없다. 마장급을 넘어서 군왕급. 수십수백에 이르는 장수들을 한 손으로 부리는 강대한 지옥의 대공이 공간을 찢어 발기며 현세에 강림하고 있었다.
대기가 흔들리고, 세계가 움츠러든다. 페르난데스는 빠른 속도로 말라 붙어가는 대지의 생명을 느꼈다. 이미 타락한 이 마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정수가 남아 있었으나. 지옥의 문이 열리며 도래한 악마의 기운에 그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주위의 마력이 한 존재에게 복종하는 듯한 감각. 강대한 힘 탓에 중력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력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그 끝엔. 저 나락과 심연의 검붉은 그림자 속에서···.
[내 너를 아노라.]
수십 마리의 독사가 허공을 핥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쉭쉭거리는 소리가 나락으로 향하는 균열 안에서 들렸다. 진물처럼 샛노란 안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도 널 안다. 크샤르락스. 군왕 크샤르락스, 사다르켈리사의 세 자식 중 하나이며, 다섯 나락의 지배자. 뱀의 왕···.”
[나에 대한 지식이 아직 물질 세계에 남아 있었던가.]
-콰드드득.
강인한 손아귀가 바닥을 으스러트리며 나아갔다. 심연의 경계면에서 놈의 머리와 목, 밧줄 같은 근육이 감긴 어깨와 가슴이 드러났다. 균열이 너무 협소했던 탓에, 그는 거의 경계를 박살내며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반신 만으로도 이미 그의 존재는 세계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놈의 검붉은 비늘이 스스로 일렁이며 기묘한 안개를 자아내고 있었다. 오색으로 명멸하는 안개가 흩어지며, 닿는 모든 것들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치이이익···.
놈의 한 발이 바닥을 디뎠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불타오르며 놈의 발자국이 검게 그을려 남았다. 땅이, 하늘이, 세상이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최근 천 년간. 군왕급 악마가 소환된 적이 없었으니.”
일반인이라면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지옥 마력의 오염과, 악마의 광기가 심어질 그 모습에도.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꼿꼿이 들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널 죽인다면, 천 년간 최초로 악마 대공을 사냥한 인물이 되겠군.”
[어처구니가 없구나. 영예에 대한 갈망인가? 인간들은 여전히 어리석다. 너는, 그리고 이 세계는 나의 적수가 아니며, 나는 너의 실체화된 죽음이다. 달아나라. 나는 본디 사냥을 더욱 즐기니.]
“혹시 아는가? 영성의 격은 생의 업이 쌓이며 올라가는 법.”
옛 친구. 페르난데스는 저 존재를 바라보며 친근감을 느꼈다. 이 끈적한 동질감은 악마의 광기에 의한 산물이겠지만, 이미 그의 정신은 대공을 마주한 순간부터 가벼운 오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광기가 흔한 시대에, 광기가 익숙한 정신이다. 이 정도의 광증은 오히려 사고 가속에 도움이 되는 편이니.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내 너를 죽여 나의 업을 쌓겠다.”
신격을 도야하는 과정은 기나긴 구도자의 길이다. 필멸자의 위업은 천상의 만신전, 저 높은 전당으로 향하는 계단이며. 페르난데스는 이미 그 길 위에 올라섰으니.
이 시점에서, 더 강인한 힘을 얻기 위해선 더 강인한 격의 적수를 참살해야 했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한 손으로 휙 돌려 등 뒤에 꽂았다. 그리고 팔을 돌려, 다른 대검을 뽑아 들었다.
-쿵, 쿵, 쿵.
칼자루에서부터 손바닥을 타고 전신의 혈맥을 타동하는 거친 신성을 느꼈다. 연금장치에 연료를 급여하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 느낌이 정확할 것이다. 그의 육신은 신성의 격발을 위한 일종의 기계 장치에 가까웠다.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자신의 육신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 정도의 감각이었다. 최소한의 기능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소비할 수 있는 소모품.
[베이타서스의 검이로구나. 과연 그 격이 드높다. 하지만 그걸 잡고 있는 너, 일개 필멸자야. 어찌 나와 대적해 살아남으려 든단 말이냐?]
“전승과 전설에 이르길 괴물을 토벌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었으니.”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 순간이 떠오른다. 인퍼머르의 지하 수로에서, 아벨레사스와 처음 마주한 그 순간이.
*
악마는 언제나 인간을 기만하고 유혹했다. 천상은 인간의 신앙을 수확할 뿐, 정글과 늪지, 숲과 황야, 사막과 산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적은 자연과 괴물 그 자체였고. 아군은 그들 자신 뿐이었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대륙의 패자이니. 짧은 수명, 연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불사르며 나아가라. 결코 멈춤 없이. 느리더라도, 약하더라도, 끝내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한 발자국 씩.
그러니 불길의 시대라. 그리하여 인간의 시대라.
*
인간의 수호룡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어째서 이 시대가 그리 불리었는지 알려주자꾸나. 악마의 광기, 신성의 과부하로 들뜬 머리가 뜨겁게 울렁거렸다. 이 감각, 필멸자가 느끼는 이 절박함이 곧 필멸자의 힘이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보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놈의 거대한 체구는 곧 놈의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악마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고 더 많은 영성을 삼킬수록 거대해진다. 놈의 비대한 몸뚱이는 그 반증이었다.
대검을 한 손으로 빙글 돌려 비스듬히 들었다. 상단을 겨냥한 자세로, 페르난데스는 꼿꼿이 서서 악마의 기운에 맞섰다. 인간의 시대가 곧 불길이니.
“그러니 악마를 불태우리라.”
[이단심문관. 오라. 내 너의 기개를 보아 기껍다. 부디 너의 최후까지도 네 그 오만함이 유지되길 바란다. 인간의 영혼은 빛날 때 더욱 달콤한 법이니.]
악마가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잠시간 둘의 시선이 부딪치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오라이온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악마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수인을 짚었으나, 마법의 매듭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쾅! 콰아아앙!!
대검이 휘몰아쳐 허공을 친다. 정확히 악마의 공세가 있는 방향을 향해 한 발, 한 발씩 끊어 치며, 페르난데스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강철의 폭풍이다. 성은으로 단조된 새하얀 대검이 지옥 마력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궤적을 긋고 있었다.
-콰아아앙!
일격으로 강철을 양단할 강격이 연신 이어졌다. 한 손으로 펼치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강맹한 일격이었다. 근력과 별개로 육신의 내구도는 여전히 필멸자의 것. 그의 육신은 공세의 충격에 매 순간 비틀리며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콰지지직!
악마의 손에 잡힌 거대한 철검이 바닥을 할퀴었다. 검붉은 주언이 검신을 따라 이어지며 저 홀로 타올라, 그의 검은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따라서, 페르난데스와의 검격이 이어질 때 마다 흰 색과 검은 색, 파란 빛과 붉은 빛이 너울져 서로에게 섞이고 있었다.
-쾅!
다시금 한 획,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궤적이 악마의 팔뚝으로 향한다. 그러나 얕다. 비늘 두어 장을 깨어내고, 대검은 힘 없이 튕겨나간다. 그 격돌의 충격에 페르난데스의 오른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렸다.
-우드드득!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허릴 꺾어 공격을 피하며 어깨를 거칠게 털었다. 극도로 과격한 접골법이었으며, 이런 행동에서 야기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터였으나. 페르난데스는 순식간에 전투 능력을 회복하고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자잘한 부상은 신성이 치유하고 있다.’
오라이온은 저 사내의 전투법을 이해하고 전율했다. 자신의 육신을 전투 장비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행동이다. 기능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사소한 부작용은 감내하며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실제로, 성검에서 비롯된 신성은 그의 몸을 수복하고 있었다. 거칠지만 확실하게, 작은 부상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따라서 페르난데스의 전투법은 최소한의 부상을 입어가며 최대한의 공격을 퍼붓는 식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소모전이었다. 페르난데스의 정신과 악마의 육신. 둘 중 어떤 것이 먼저 깨어져 나가는 지에 대한 시금(試金) 과정이었다. 오라이온은 한 순간도 가만히 멈춰 있지 않은 탓에, 긴 잔상만 남기는 페르난데스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그의 정신 저 너머에 자리잡은 광기의 편린을 읽었다.
목적과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투자할 수 있는 자의, 마치 투우와 같은 눈이다. 저 자의 광기는 오히려 지독한 이성의 산물이며, 그의 이성은 자기 자신마저 효용가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냉혹한 가치판단의 끝에 자리잡았다.
광인이다. 인간이라면 저렇게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오라이온은 지금, 어떤 불가해한 존재를 마주하는 기분으로 둘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공급 악마가 내뿜는 사기(邪氣)에 페르난데스의 몸에 걸친 옷이 부식되어가고 있었다. 육신에서 흘러 넘치는 신성 탓에 침식의 정도가 크진 않았으나,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악마의 기운이 그의 옷과 육신을 좀먹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둘의 칼날이 허공에 얽히며, 악마의 힘과 그의 힘이 교착점을 만들고 있었다. 상반된 둘의 힘이 얽히며 불똥을 튀어내고 있었다. 영혼이 갈려 나가는 듯한 감각에 페르난데스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계속할테냐?]
“아직 안 진 것 같은데?”
[너도 알고 있을텐데. 이런 식의 전투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네 정신과 육신은 놀라울 지경이나, 네 힘은 무한하지 않다. 너는 천천히 사멸되어가고 있다. 차라리 나를 섬겨라.]
대공이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쿵. 그 기세에 핏물이 울컥거리며 목젖을 타고 올랐다. 한 걸음의 힘에 내장이 온통 뒤엉키며 깊은 내상을 야기했다.
[네 재능과 기개를 높게 사겠다. 너를 나의 오른 엄니로 삼겠노라.]
“아 그거 별거 아니더라고.”
크샤르락스의 오른 엄니. 테트라갈란은 그의 손에 죽은 첫 번째 악마였다. 페르난데스는 크, 하고 웃으며 악마의 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네 말이 맞군. 이 방식은 아직 나한테 맞지 않아.”
[이 방식이라?]
악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내려보았다. 인간 세계의 격이 높아진 것일까? 자신의 첫 행보에 이런 자와 마주할 줄 예상치도 못했기에, 그는 다소 놀라고, 또 유쾌한 기분이었다. 이런 존재들이 흔한 시대의 영성은 또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그러니, 본업으로 돌아가보지.”
페르난데스는 뒤로 크게 뛰어 악마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그 거리라는 것이, 서로를 향해 달릴 때 수 초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악마는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그는 마치 해보라는 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어금니를 빛냈다.
-스르릉.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뒤로 돌려 등 뒤에 꽂아 넣고는,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왼손을 들어 올렸다. 반쯤 녹아 흩어진 소매를 걷자, 그 안에 칭칭 감긴 검은 붕대가 나타났다.
“말레이른의 비전서를 얻고 내가 그걸 다소 개량했지.”
천각마탑의 말레이른. 그 자는 자신의 마법을 포기하면서까지 루네글리프의 비전 마법을 연구하는 것에 매진했었다. 그 끝에 그는 신을 사냥하고 그 힘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 말레이른을 토벌한 이후에, 레이아는 놈의 보물전에서 원하는 재화를 가져가라 권했다. 이에 페르난데스는 단 한 권의 책을 선택했다. 말레이른 일족이 천 년간 모은 수많은 재보 중 가장 가치 있는 것.
말레이른의 비전서. 북부의 고대 루네글리프와 엘프 특유의 비전 마법의 융합, 그 끝에 만들어낸 일종의 마법 체계. 한 종족의 극의에 닿았던 위대한 마법사가 남긴 유물이며, 그 자체로도 하나의 학파를 이룰 수 있는 비의였으니.
이를 말레이른 학파라 부를 법 했다. 그 종사를 죽인 자가 그 마법 체계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콰직, 콰지직, 콰직.
페르난데스의 팔을 타고 새파란 전류가 흘렀다. 동시에, 그의 팔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이 타들어가며 근육이 단단하게 엉킨 팔뚝이 드러났다.
[루네글리프···?]
“아니. 굳이 부르자면 말렌글리프라 불러야지.”
북부의 고대 룬 문자와 유사한 문양이 그의 손목부터 어깨까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핏줄에 타고 흐르는 신성 탓에 왼팔 전체가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스륵.
손을 들어 올린 페르난데스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전류가 흐르는 팔뚝에서 문자 하나가 불에 타며 사라지고—
“오너라!”
-콰아아아앙!!
페르난데스가 외친 순간, 사방이 새하얗게 타오르며 희뿌연 하늘, 먹먹한 구름 사이를 찢어 발기고 세 줄기의 벼락이 악마의 머리 위로 내리 찍혔다. 페르난데스의 왼팔이 덜덜 떨렸다. 거의 감각이 희미할 정도로 저려왔다.
그는 왼팔을 억눌러 진정시키며 웃었다. 실전 실험 성공이다. 마력 회로를 자아낼 수 없는 육신, 항상 잔량을 걱정해야 하는 청동 왕좌의 빈 자리를 채울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들어냈다.
한 획의 말렌글리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에 대응할 수 있었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재료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몸 위에 덧씌워 그려낼 수 있는 마법이.
고대의 마법사들이 매일 아침에 했다는 명상 수련과 동일한 방식이다. 화살통에 화살을 채워 넣는 것처럼 마법을 팔뚝에 새겨 준비하고, 이를 하나씩 쏘아내는 기관으로 자신의 육신을 사용한다.
그 탓에 신경이 몇 가닥 끊어진 기분이다. 이 능력의 부작용이겠지. 감각이 희미하게 돌아오는 팔뚝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을 접어 기능성을 확인한 페르난데스는 뒤로 오른팔을 뻗어 대검을 뽑아 올렸다.
-스르릉.
다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열쇠검을 사용할 때 그의 몸에 스며드는 신성은 마법의 섬세한 조율에 방해가 된다. 아주 오랜만에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편법이지만, 아주. 아주 좋군.
페이자쉬가 크, 하고 웃었다. 그래, 이 감각이 그리웠다. 이 전능감이.
-딱.
다시금 왼손 검지가 튕기고, 벼락이 무릎 꿇은 악마 대공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