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뱀의 왕 (4)
*
벼락이 천공을 내달린다. 번개를 머금었을 법한 먹구름 한점 없이, 그저 희뿌연 하늘 아래로.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광경이지만, 마법이란 본디 비현실과 현실의 틈새를 비틀어 여는 조작이니. 페르난데스는 크샤르락스에게 다가가며 한 획 씩, 한 획 씩 주술 문자를 불태웠다.
-쾅! 콰아앙! 쾅!
물리적 실체를 지닐 정도로 밀도 높은 전류가 거대한 악마의 머리 위로 내려 꽂혔다. 일반적인 생명체라면 이미 그을음으로 탄화되었을 충격. 그러나 악마는, 특히 사다르켈리사 계열 악마는 마법에 대한 내성이 높다.
-콰아아앙!
[크으으으으···!!]
놈의 어금니 사이로 걸쭉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악마는 바닥을 할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과연 고강도의 마법 내성을 지닌 군왕급 악마 다웠다.
“제법이구나.”
[이··· 필멸자가. 썩어 없어질 육신이··· 감히, 감히 내게···.]
놈의 노란 안광이 분노와 광기 속에서 번들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이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왼팔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회복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데이터는 충분히 수집했어. 성공적이군. 열일곱 번까진 무리가 없었다.
‘대악마에게 통할 수준은 아니야. 그 용의 자식에게 전탄 명중시키고도 녀석을 무력화시키지 못했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사다르켈리사와 그녀의 자식들은 마법에 대한 내성이 극도로 높다. 그러나 루네글리프, 특히 고대 룬 문자의 경우엔 선사 시대의 마법이 으레 그렇듯 온전히 마법의 힘만을 품고 있지 않다.
신들이 지상을 거닐던 시절의 마법은 곧 신들의 주문이오, 신들의 축복이었다. 북부 만신전의 보탄 왕에게서 기원한 이 고대의 주술 체계는 반절은 마법에, 남은 반절은 기적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놈에겐 반절 정도의 충격은 가해졌다는 뜻이다. 페르난데스는 전류의 여파로 파들거리는 놈의 근육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죽여, 죽여 버리겠다. 널 죽이고 네 살점을 삼키고, 네 영혼을 씹어서, 영원히 저 나락에서 갈기갈기 찢으며 여가하겠다. 네 놈, 필멸자여. 나는 너의 죽음이다!!]
-콰아아앙!
악마가 흉성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놈의 검붉은 비늘 위로 끈적한 열풍이 몰아쳤다. 극도로 농밀하게, 지옥 마력이 사방을 휩쓸었다. 마력은 물리적 실체마저 품고서 화염을 닮은 안개로 사방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몸 안의 신성이, 그리고 등 뒤의 열쇠검이 그 기세에 부르르 떨었다. 심장이 펄떡이고 악마의 광기가 뇌간의 구석구석을 핥듯이 달라붙어, 돌연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 그래. 이래야지. 페르난데스는 꼿꼿하게 일어서서 그를 내려보는 놈을 마주 바라보았다. 악마는 자못 기세 좋게 마력을 터트렸지만, 페르난데스는 저것이 놈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은 행동이다. 군왕이라 불리는 고위 악마가 보일 법한 행동은 분명히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올 테면 지금 오시지?”
[이··· 이··· 하찮은 꼭두각시가!!]
-그르르륵.
놈의 입에서 피거품이 튀며, 악마의 굵은 팔이 벼락처럼 내려 꽂혔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이미 칼을 빙글 돌려 놈의 팔뚝을 베어냈다. 완전히 갈라내진 못했지만, 확실히 타격의 감각이 있었다.
강대한 악마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과 같고, 그 뜻은 실체화한 육신의 강도가 곧 놈의 힘이란 뜻이며. 힘이 다할수록 육신의 내구성이 약해진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놈의 비늘이 검날에 깨어져 떨어졌다.
‘마지막 실험을 하지. 도와 주겠어?’
-바라던 바야. 어떤 걸로 준비할까.
‘짧고, 강한 걸로.’
페르난데스는 광기에 휩싸여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고 칼을 내려 찍는 놈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생각했다.
첫 실험은, 신성으로 벼려진 그의 육신이 악마 대공에 대적할 수 있는가.
A. 가능하지만, 소모적이다.
두 번째 실험. 말레이른 학파의 루네글리프에 실전성이 있는가.
B. 이 역시 가능하지만, 잔량과 부작용이 뚜렷해 연달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 모든 실험은 그 과정 전체가 곧 대악마를 겨냥하는 한 자루의 비수가 되기 위함이며, 이제 그 마지막 실험이 남았다.
-짤랑.
격한 움직임 탓에, 오른 손목에 걸린 청동 왕좌가 맑은 소리를 냈다.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 잔량은 하루에 최대 세 번까지. 처음은 안개로, 그 다음은 진실의 시야로. 그리고 세 번째로···.
-쒜에에엑!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숙여 악마의 팔을 피하며, 놈의 갈빗대 사이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악마의 몸이 움찔거리며 멈췄다. 치명타는 아니지만, 잠시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이제 마지막 차례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에서 손을 떼어내고, 놈의 등 뒤로 돌아갔다. 놈의 육신, 그 크기로 짐작하자면 성인 남성에게 세 치 단검을 쑤셔 넣은 셈. 아주 찰나의 그 시간을 벌어—
-착, 착, 착.
차례로 축조, 작성, 왜곡. 세 수의 수인이 한 손으로 유려하게 매듭을 짓고. 그 우아한 싱글 캐스팅 끝에, 청동 왕좌가 반응하여 마력을 올올이 풀어내어—
‘실체화가 일어날 정도로 농밀한 지옥 마력이라···.’
자신의 심장과 자신의 회로를 거치지 않은 마력을 이용하는 것은 극도로 정밀한 주문의 조율을 필요로 하지만, 페르난데스의 테크닉은 이미 정밀함의 수준을 논할 단계가 아니었다.
-쿠구구궁···.
놈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일순간 그 흐름을 바꾼다. 놈의 사고가 광기와 분노에 물들어, 마력에 대한 제어를 잃어버린 이 순간이 가장 적확한 때였다.
페르난데스의 수인에 따라,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가 대기에 펼쳐진 지옥 마력을 빨아들이고, 다시 내뿜으며 마법을 자아낸다.
신경다발이 끊어져 축 늘어진 왼팔이 움찔, 하고 떨렸다.
‘성공이군.’
-좋아.
제정신을 차린 악마의 꼬리가 거칠게 요동치며 페르난데스가 있는 자리를 휩쓸었다. 페르난데스는 마치 밧줄을 잡고 달리듯 놈의 꼬리를 밟고 등허리로 뛰어 올랐다.
[이 노오오옴!!]
“어휘력이 많이 떨어지셨군. 대공.”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도달해, 놈의 머리 위. 가히 성인 남성의 상체는 넉넉히 한 입에 씹어 삼킬 그 거대한 두개골 상판을 밟고 서서, 똑바로 악마의 노란 눈을 마주보며.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왼팔을 들어 올렸다.
“네 어미에게 전해라. 악마.”
[이··· 개자식이···!!]
“기도하고 있으라고.”
청동 왕좌로 자아낸 마법은 염동력. 아무런 감각도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육신이라도. 물리적인 힘으로 끌어 당기면 능히 한 팔쯤 들어 올려 조작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
오른손이 까딱일 때 마다 마력이 실선처럼 이어져 허공에서 비틀리고, 축 늘어졌던 왼팔이 활기를 찾아 움직인다.
마지 잘려나간 것처럼 왼팔에선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지만 왼팔과 왼손 전체가 움직인다는 뜻은 곧, 수인을 짚을 수 있다는 뜻이며.
-신경만 타들어간 것이 아니니.
전혀 다른 종류의 신성, 완전한 상극의 마법을 억지로 기동하며 잠시간이나마 베이타서스의 신성이 왼팔에서 메말랐으니. 지금 그의 왼팔은 일반인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일시적으로나마 왼팔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사방에 흩어진 지옥 마력을 억지로 때려 박아 육신에 회로를 쑤셔 넣고, 그 사이로 마력을 흘리며, 동시에 수인을 짚어 주문을 맺는다.
감각이 남아있다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과격한 시술이며, 실제로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수십 번은 혼절했을 끔찍한 격통이었겠지만.
‘왼팔엔 감각이 없다.’
그리고, 육신은 소모품이다.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페르난데스는 고통 따위에 멈추지 않는다.
-콰드드드드···.!!
왼손이 단 한 수의 수인을 짚는다. 중첩. 사방에 산재한 마력을 그저 모이고, 겹치고, 감싸서···. 날카롭게, 단단하게, 천련의 격철처럼 예리하게!
[바락바르의 창···!! 너는 타이반의···?]
“쉿.”
그건 비밀인데. 페르난데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악마는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건 그의 긴 삶 동안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이었다.
이 인간은, 가늠할 수 없다.
인간이긴 한 것인가? 악마의 망막에 비춘 마지막 형상은, 자신의 두개골을 향해 내려 꽂히는 붉은 창날의 모습이었다.
-콰아아아앙!!
*
“오··· 오오···.”
오라이온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가 불러낼 수 있는 가장 강대한 악마, 고대의 악마 비전서에서도 그저 흘러가는 이름으로만 언급되는 심연의 군주가 무력하게, 더 없이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눈으로 보고도, 감각으로 마력을 느끼고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주문이 청년의 손에서 연신 터져 나갔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밀하고 세련된 방식의 마력 운용이었다.
그 무력으로 악마와 대적하고, 그 마법으로 자신을 뛰어 넘었으며. 보이는 모습은 청년에 불과한 존재라.
-쿠우우웅···.
머리를 잃어버린 악마의 몸뚱이가 힘 없이 바닥에 떨어져 움찔거렸다. 폭발한 것처럼 뜯겨 나간 두개골의 단면에서 끈적한 피와 뇌수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탁.
오라이온은 눈물에 젖어 흐려진 눈으로 간신히 더듬거리며 청년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지옥 마력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악마의 죽음과 소환 마법의 파괴로 인해 천천히 사위가 밝게 물들고 있었다.
흐리게 내려앉은 대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이른 아침의 햇살이 내리 쪼였다. 그 탓에, 청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번뜩이는, 이성적인 광기가 담긴 안광 뿐.
“당신은··· 신이십니까···?”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흐르며 지옥의 잔재를 흩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라이온은 오히려 그 사이에서 불씨의 냄새를 맡았다. 지독하고 뜨거운, 격렬한 냄새다.
“글쎄, 어찌 될런지는 두고 봐야지.”
“저는··· 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라이온은 페르난데스의 옷깃을 잡았다.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이 불가해한 사내에 대한 외경으로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올 것 같은 감각이었다. 신을 모욕하고 악마를 숭배하던 악마 추종자이자, 한 씨족을 악의 소굴에 밀어 넣은 타락한 마법사는 지금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외경으로 떨고 있었다.
“흠. 그래 오라이온 위빙랫. 회개하고 싶은 심경인가?”
“기도하겠습니다.”
“···오?”
“당신께, 당신께 기도하겠습니다.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저는 쓸모가 많습니다.”
아침의 햇살로 역광이 져 그림자가 드리운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오라이온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고개를 숙였다.
“존함을 듣고 싶습니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오라이온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페르난데스의 피에 젖은 신발에 입술을 맞췄다. 평생 힘만을 쫓아 악마에게 굴종한 흑마법사는, 지금 평생에 처음 마주하는 강대한 존재에게 굴복했다.
씨족의 영웅이 같은 위업을 세웠다면, 오라이온은 오히려 후일을 기약하며 퇴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청년이 사용한 마법은 명백히 타락한 존재들의 것이었으며, 동시에 이 청년이 휘두른 검은 선신 만신전의 유물이었으니.
이런 존재를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오라이온은 떨리는 눈을 감고서 무겁게 말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세르너드 공.”
그의 머리를 굽어보며, 페르난데스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기물을 얻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