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에인헤랴르
*
악마 대공 한 개체를 무찌른다고 북부의 모든 위협이 기적처럼 씻겨나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평온함을 가장한 채로 어금니를 부서지도록 사려 물으며 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과격한 마력 운용, 신성의 격발, 악마의 오염과 그 잔향, 며칠 분의 수면 부족과 격렬한 사투. 지금 그가 당장 혼절하지 않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언제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그건 회귀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편히 주저 앉은 한 시간은 고스란히 육십 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주군. 저는 그럼···.”
“네 부하들을 정리해라.”
페르난데스는 피로한 눈가를 무심코 누르며 말했다. 오라이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의 수하들은 사다르켈리사의 하수인들이었으니, 그가 배신한 것을 알아챈 순간 그의 등을 찌를 위인들이었다.
“그 후에, 주군을 찾아 뵙겠습니다.”
“그러도록.”
오라이온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그의 공방으로 향했다. 제물들과 그의 시종,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고는 항구로 향했다.
‘죽겠군.’
다리를 헛짚어 잠시 비틀거렸다. 비단 피로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마, 그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딱, 딱, 딱. 어금니가 스스로 떨리는 탓에 그는 혀를 씹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고통을 다스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
“크흐···으.”
단 숨이 입가에 흘렀다.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그는 거의 실신한 채로 걷고 있었다. 왼팔이 덜덜 떨렸다. 디모니카의 신성이 육신을 수복하며 천천히 신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적적인 일이었으나, 지금은 달가운 순간이 아니었다.
끔찍한 격통 탓에 하마터면 왼팔을 통째로 뜯어낼 뻔 했다. 마력 회로를 강제로 쑤셔 박은 탓에 일어난 외상과, 지옥 마력을 순환시키며 발생한 오염. 그리고 그 오염이 신성에 의해 씻겨 나가며 발생하는 영적, 물리적 격통이었다.
“친구. 괜찮나?”
페르난데스는 핏발 선 눈을 들어 담장을 바라보았다. 로프트가 비스듬히 기대어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디에··· 후. 있다 왔지?”
“사정상 악마들에게 몸을 보여선 안 되는 지라. 하하.”
로프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뛰어 올라 그의 곁에 다가왔다. 페르난데스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의 안광 일렁이는 안저를 노려 보았다. 로프트가 얇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아주 만족스러운 전투였다네. 친구. 자네 저력이 점점 더 두려워지더군.”
“날 두려워하는 건 대개··· 후. 내 적이었는데?”
“글쎄, 이 바닥에 영원한 아군이 있던가. 친구?”
“없지.”
페르난데스는 로프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프트가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그 지경이 되고서도 전투를 준비한다고? 내가 사람 하나 잘 골랐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번엔 자네의 방향이 틀린 것 같아서 왔다네. 친구.”
로프트는 뼈만 남은 검지를 들어 허공을 휘휘 저었다. 푸르른 구체들이 그 사이로 모여들어 맴돌았다.
“저 돼지 같은 자식이 얼마나 많은 영혼을 삼켰는지 아나? 그 대부분의 영혼들이 위대한 에인헤랴르의 전사들이었다는 것도?”
“관심 없다.”
“하하. 들어보게. 관심이 생길 테니.”
로프트는 어디선가에서 의자를 꺼내들고 페르난데스의 앞에 앉았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바닥에 박으며 꼿꼿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격통 탓에 머리가 저리고 영혼이 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보탄이 우리 형제들을 모아 말했지. 별들 사이에서 미래를 읽었으니. 그 외눈박이가 선언했다네. 위대한 전사들의 영혼을 모아 종말을 대비하자고.”
로프트는 어딘가 아련한 말투로 흥얼거렸다. 그가 손짓하자, 푸른 구체가 팡 하고 터지며 창을 든 외눈 전사의 모습을 그려냈다. 까마귀를 어깨에 얹은 노인이었다.
“종말··· 라그나로크. 뱀이 세계를 집어 삼키고, 늑대가 달을 베어 물고, 세상이 불에 타고, 얼음에 뒤덮이고, 바다가 대지를 삼키는···. 우리 형제들은 세계의 끝을 대비하자고 결의했네. 각 씨족 간의 불화를 일으키고, 영원히. 아주 영원히 서로를 향해 창칼을 돌리도록 조작했지.”
수많은 전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풍경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따금, 전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서로에게 손을 건넬 때 마다 ‘신’들이 나타나 그들을 징벌했다.
허공에 장난스러운 글귀가 번뜩였다. ‘겁쟁이는 나락에 떨어지리라.’ ‘오직 가장 위대한 전사들만이 천상에 올라 영원히 살아가리라.’
“그래. 우린 개새끼들이지. 이 대륙은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있었네.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살아갈 수도 있었고. 하지만 전쟁은 용광로라네. 친구. 그 사이에서 단조된 영웅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날개를 단 여인들이 내려와, 전장에 쓰러진 전사들을 일으켜 세우고 하늘로 올라가는 풍경이 보였다. 로프트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렇게 모인 영웅들을 우리는 ‘에인헤랴르’라 불렀다네. 오직 종말을, 오로지 악마를 죽이기 위해 우리가 벼려낸 병기들. 지상의 전쟁이 용광로라면 에인헤랴르는 그 무기고였네. 적어도 천 년 전까진 그랬지.”
강인한 전사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서로를 향해 병장기를 휘두른다. 누구도 다치는 이 없는 그 영원한 감옥에서, 그들을 내려보는 거인이 있었다. 외눈박이 신 보탄···.
그의 등 뒤에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내 어리석은 형제. 보탄, 보탄···. 이 머저리. 놈이 타락한 순간, 에인헤랴르는 끝이었네. 전사들은 악마의 제물이 되어 삼켜졌고, 우리는 다가올 종말을 대비할 모든 패를 잃어버렸지. 그리고 남은 것은 오직···.”
전사들이 불에 타고 찢겨나가며 스러졌다. 로프트의 눈이 흔들거렸다. 그건 일종의 고통으로도, 그리고 조롱으로도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잠시 그가 허공에 맴도는 환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물질 세계의 참상 뿐이었네.”
종말을 막겠다는 대의 하나만으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오직 전쟁만을 반복하던 이 북부는, 이제 그 성장 동력 대부분을 상실한 채로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장 멸망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미래에 놓인 멸망은 필연적이었다. 거의 모든 씨족들은 서로를 증오했고,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사내들은 전장에서 죽기를 갈망했다.
오직 광기 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불타는 북부의 지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최고신의 배반으로 대의를 잃어버린 북부는, 그저 광기에 소모된 희생자들에 불과했다.
“막아주게.”
“종말을?”
“우리의 과오를.”
로프트가 페르난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페르난데스는 왼팔로부터 이어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불쌍한 영혼들···. 우리의 자식들···.”
로프트의 손짓에 따라 더 많은 구체들이 모여들었다. 크샤르락스가 죽으며 쏟아낸, 지금껏 그가 삼켰던 영혼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로프트는 자신의 손에 모여드는 구체들을 하나씩 만졌다.
“이 어린 것들을 도와주게.”
“우리에겐 도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텐데.”
“아, 거래라. 좋지. 하지만 보게,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자네에게 그다지 쓸모 있는 것들이 아니니··· 호의라면 어떤가?”
“호의?”
“자네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다르켈리사를 막을 걸세. 그리고 그건 내 목적과 같지. 그게 공평한 거래는 아니지. 안 그런가, 친구?”
로프트는 킬킬거리며 박수를 짝, 쳤다. 바람이 장내를 휘몰아치고, 로프트의 삐죽 솟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자네가 근심하는 자네의 친구들은 무사할 걸세.”
“무슨 짓을 저질렀지?”
“새로운 친구들의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해주었지.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할거야.”
로프트는 킬킬 웃었다.
“그러니, 자네는 그들에게 돌아갈 필요가 없네. 영혼을 포식해서 남는 힘을 조금 써보았으니. 자, 이제 다른 방향으로 걷게나. 보다 더 북쪽으로. 더 깊게 들어가 보게.”
“어디로 가라는 거냐?”
“에인헤랴르의 전당. 발할라의 입구로.”
우선 채석장을 먼저 들러 보지. 로프트는 허공에 지도를 그리며 한 귀퉁이를 쿡 찔렀다.
*
후, 짙은 담배 연기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키르하스는 언덕 높은 곳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필 남지 않은 하자트 팔란의 기마들이 그녀의 등 뒤에 도열해 있었다.
적들이 몰아치고, 전장은 간신히 전선을 유지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눈이 매섭게 움직였다. 악마가 총 네 마리. 그 외의 상황을 두고 보자면, 전장의 균형은 오히려 동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병력의 숫자에서 확실히 하자트 팔란의 전사들이 부족했다. 적들이 이끌고 온 군단은 하자트 팔란 전사들의 두 배에 달했으나, 전사들은 배후에 바다를 두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항전하고 있었다.
항복이 통할 상대도, 도주가 가능할 상황도 아니었다. 전사들은 그저 이를 악다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피범벅이 된 채로 전장에 뛰어들고, 날뛰다가 죽어갔다.
-푸르륵.
그녀가 탄 말이 투레질했다. 키르하스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흉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와 함께 척후로 차출된 기병들은 자신의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당장이라도 뛰어갈 듯 굴었다.
“제기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계집!!”
한 전사가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키르하스의 왼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키이잉···.
전사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목젖 바로 아래에 차가운 강철이 닿아 있었다. 그 싸늘한 감촉에 전사는 부르르 떨었다. 말 하나 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로지 기세 만으로 이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아직 아니다.”
전사들은 대륙 공용어를 할 줄 몰랐으나 그녀의 행동과 눈빛에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전사들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니야. 악마가 완전히 전선에 파고들고, 놈들의 마법사가 주문을 완성할 때. 전장이 가장 불리할 그 때에 들어가야 해.”
키르하스의 눈은 전황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선천적인 감각이었다. 그녀는 칼을 빙글 돌려 납도했다. 그녀는 강철처럼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한 악마가 끝내 전선에 닿았다. 놈이 거칠게 울부짖으며 부족 전사들을 갈아버리고 날뛰었다. 그 순간, 황금빛 너울지는 머리칼이 악마를 향해 내달렸다.
“아벨···.”
키르하스는 입술을 살짝 물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벨은 홀로 악마를 적대하고, 심지어 압도하고 있었다. 대단한 무력이다. 그녀는 자칫 허술하게 밀리고 찢겨 나갈 전선을 교착시키는 기둥이었다.
그러니, 전선이 완전히 무너질 일은 없었다. 밀리는 전선의 핵심에 그녀가 나타나면 기적적으로 전황이 유지되었다. 그러니 그녀를 믿고 기다려야 했다.
‘삽십 분.’
병력의 소모 시간은 산술급수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갈수록 그 공백이 곧 적군과의 숫적 열세를 더욱 도드라지게 할 터였다. 그러니 삼십 분. 키르하스의 직관은 그 시간이 그녀와 부족 전사들이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라 판단했다.
-쿠구구궁···.
그때, 전장의 최후열에서 붉은 섬광이 터졌다. 두 마리의 악마를 대동하고 있는 사내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 찍으며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주문이 시작되었다. 키르하스의 눈이 빛났다.
지금이다.
“가자. 온전히 내 뒤를 따라라. 적지를 관통하면 우리가 당한다.”
키르하스는 언덕 아래로 말을 몰아 달리며 말했다. 전사들은 갑작스런 키르하스의 돌격에 당황했지만, 곧 흉성을 터트리며 그녀를 따라 뛰었다.
망치와 모루는 그저 충격력을 적의 후미에 박아 넣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모루를 유지할 방진이 전선을 묶는 시간, 충격이 적의 후열을 파괴하는 시간, 적들이 공세에 반응하는 시간. 적의 요격 병력이 돌출하는 시간까지, 그 모든 타이밍이 완벽하게 정밀히 진행되어야 성립하는 고급 기동 전술이다.
사전에 지휘부에서 작전을 수립할 수도, 전술을 병력에게 충분히 훈련할 수도 없었던 상황. 이 전술은 오로지 키르하스의 개인적인 판단에 달려 있었다. 소통이 단절된 전열과, 말이 통하지 않는 기병들로 이루어진 위험천만한 곡예였다.
심지어 기병들은 그 수가 극도로 부족했다. 최대한의 충격력을 적의 후미에 박아 넣기 위해선 비스듬히 찔러 치고 빠져나와야 했다.
섣불리 적진을 관통하려 시도하다가 적의 방진에 발이 묶이기라도 한다면 숫적 열세를 고스란히 부담하며 적진 한복판에서 고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선두엔 반드시 키르하스가 있어야 했다. 대황야 최고의 야전지휘관이. 경보에서 속보로, 그리고 속보에서 전력질주로. 키르하스의 말이 속력을 높여 갔다.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본디라면 결코 이런 돌격을 감행할 수 없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고, 날카로운 병장기와 인간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키르하스의 장악력, 그녀의 존재감이 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주위 사물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속도감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고요하게 칼을 휘둘렀다.
-스겅.
말의 속력과 키르하스의 움직임이 완벽한 타이밍을 맞췄다. 더 없이 깨끗한 일격이었다. 전사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고, 피 분수를 뿜으며 바닥에 굴렀다.
“으라아아아아!!”
그녀를 따라 돌격한 전사들이 적의 후열에 쏟아졌다. 보병에게 있어서 기병의 충격은 그 자체로 일종의 재난과 같다. 적들은 발굽에 치이고, 사지가 으스러지며 갈라졌다.
“멈추지 마!!”
키르하스는 사납게 소리지르며 적진을 얇게 주파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은 그대로 반으로 갈라지며 피를 흩뿌렸다. 키르하스는 적들을 도륙하며 나아갔다.
적들의 최후열, 마법사와 두 마리의 악마. 다른 악마들이 전선에 접촉해 당장 마법사를 지원하기 위해 회군할 수 없는 상황. 그녀가 노린 절호의 타이밍이란 바로 이 순간을 의미했다.
그 때,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붉은 빛이 다시 한 번 명멸하고—
“커··· 흑?”
몸이 날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허전한 다리를 움츠리며 번쩍이는 시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타고 왔던 말이 산산조각나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악마의 공격에 당했나? 아니면 마법? 키르하스는 혼란에 휩싸였다. 여기서 멈추면 안되는데, 여기서 쓰러지면···. 그녀는 물론 아벨까지도 당할 테고···. 그럼 은공이 실망하실 거야.
-쿠우웅!
“커흑!”
다시 시간이 흘렀다. 키르하스는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충격 속에서 간신히 자세를 다잡았다. 병장기를 든 사내들이 흉흉한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사들은···?’
그녀와 함께 돌격한 기병들은···?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돌격 자체는 완벽했지만, 기병들의 훈련이 부족했다. 기병들 중 대부분은 방진 속에 매몰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실패다···’
키르하스는 칼자루를 꼭 쥐며 이를 악다물었다. 적들이 너무 많았다.
*
“저거 우리 자매님 아닙니까, 형제님?”
전장의 서쪽, 숲 속. 파비아노는 전장을 바라보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거리가 제법 됐지만 디모니카의 시각은 이 정도의 거리에서도 인물의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음··· 맞군.”
-부스럭.
관목을 비집고 거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극단적인 행군으로 흙과 먼지, 나뭇잎 따위가 잔뜩 얹어져 추레한 몰골이었다. 가장 큰 체구의 사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