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하자트 아쉰, 매장된 도시 (1)
*
키르하스의 돌격은 현장 지휘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건 아군 방진이 소실될 때 까지, 그러니까 전투가 학살로 변하기 전까지의 시간에 대한 정교한 계산과, 적 방진의 밀도가 최소점에 도달할 때, 모든 적이 배후를 살피지 않는 그 순간에 일어난 돌격이었다.
그 모든 계산을 본능적 영역에서 해내고 끝내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키르하스의 전술적 판단은 이미 완성에 가까웠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면 단 하나 뿐. 그녀의 생각보다 아군 기병의 이탈이 느렸다는 것.
그건 전적으로 경험의 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껏 키르하스가 이끌어온 기병은 대황야의 정예병들이었다. 그러나 북부인들 사이의 기병은 그저 ‘말에 탄 전사’에 불과했다.
보병과 기병의 차이는 단지 말의 체고와 속력에 있지 않다. 기병의 역량은 기수와 말의 합, 충격의 최대점에 도달할 때의 감각, 전환과 이탈에 대한 본능적 영역의 소통 등을 포괄한다. 말과 기수가 더해진다고 단지 그 전투력이 합연산 되어선 안된다는 뜻이다.
북부인들은 하나하나 강력한 전사들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병대로서는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 키르하스의 오판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것을 기병대라 여긴 것. 저들을 단지 발이 빠른 전사라 여겼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
키르하스는 다가오는 적의 목을 따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적, 적, 적. 온통 적군들 뿐이다. 그녀의 신장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북부인들은 평범한 남부 문명국의 보병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 거대하다. 따라서 그녀는 마치 적대적인 일종의 장벽에 둘러싸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그 순간에도 살 길을 도모한다. 사방에서 아군의 비명과 고함, 병장기의 시끄러운 파열음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그녀의 귀가 쫑긋 섰다.
어쩐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본능이 그리 외치고 있었다. ‘버텨라.’ 라고.
“개짓거리는 거기까지다, 이단 사교와 배교자들이여!!!”
-슈콰아아아앙!
형제님? 키르하스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노호성이 터져 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비아노 형제의 목소리였다. 곧 포환이 날아드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타격음이 지면을 휩쓸었다.
-콰아아앙!
고체 포환이 바닥을 뒤집는 것 같은 소리와 진동이 이어졌다. 저 멀리, 전사들의 머리 위에 힐끗 보였던 악마의 머리가 그 순간 사라졌다. 피보라가 하늘로 치솟고, 곧 악마의 묵직한 몸체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제님···??”
어떻게 여기에? 키르하스를 포위한 전사들이 당황하며 한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난전이다. 제피스는 전황을 내려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키르하스가 능선을 타고 적진을 찔러 들어갈 때, 악마와 마법사가 있는 쪽이 적이라는 것 정도는 판단했지만. 한창 난전이 일어나고 있는 전선에선 피아 식별이 불가능했다.
저들 나름대로 방패와 망토, 옷가지 등에 무언가 치장을 해서 구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제피스와 이단심문관들은 북부인들의 문장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선이 아닌, 악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이들이 세운 전략은 아주 단순했다. 1. 악마는 적이다. 2. 악마의 적은 아군이다. 3. 악마를 공격할 때 자신들을 적대하는 놈들은 모두 적이다.
대단히 타당한 전술이었다. 제피스가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파비아노가 등 뒤에 매어둔 창날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개짓거리는 거기까지다, 이단 사교와 배교자들이여!!!”
-슈콰아아아앙!
사람 머리만한 삼각근이 견갑 아래에서도 명백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꿈틀거렸다. 곧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투창은 파공성을 내며 쏘아져 나갔다. 공성 발리스타가 발사된 것 같은 소음과 함께 착탄. 악마의 머리가 박살나며 피보라가 튀었다.
“가시죠, 형제님!”
“세르지오 형제, 사르벨리오 형제를 업고 나를 엄호하도록. 사르벨리오 형제는 적 마법사를. 나머지는 악마를 맡는다. 그리고 파비아노 형제! 키르하스 자매를 구출하고 본대에 합류하라!”
“막토!”
대답이나 긍정을 의미하는 기도문이 그의 등 뒤에서 터졌다. 제피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능선을 타고 달렸다.
-쿵, 쿵, 쿵, 쿵.
전장에 보이는 전사들은 물경 삼백여 명에 달한다. 저 중 최소한 절반이 적이라 가정할 때 아군의 병력은 고작 다섯에 불과하다. 다섯이서 백오십을 상대한다? 이건 전쟁의 신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편견 가득한 상식과는 달리, 디모니카는 불사무적의 초인들이 아니다. 이들 또한 창칼이 박히면 피를 흘리고, 치명상을 입으면 죽음을 맞이하는 필멸자들이다.
그러나 다른 이단심문관들, 헤레티카나 엔마기카와 디모니카가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들의 혈액엔 신성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며—
“저 놈들을 막아!!”
“어디서 튀어나온 개잡놈들이냐!!”
-콰아아아앙!
선신 만신전의 투사, 인간 신들이 벼려낸 전투 병기. 그 의미는 곧. 그들이 악마와 동치 되는 수준의 병력이라는 것을 뜻한다. 대악마가 영혼을 벼려 빚어내는 악마들처럼. 선택 받은 몇몇 특수한 영혼들에게 신의 가호가 임해 만들어지는 존재였으니.
방진이 붕괴한다. 그들을 향한 창칼 대부분은 갑주의 두꺼운 경사면을 긁으며 빗겨간다. 한 번의 공격에 한 번의 반격. 디모니카의 갑주를 긁어 놓은 전사는 곧 머리를 잃고 버둥거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콰아아앙!
전장 한복판에 균열이 생긴다. 하자트 팔란의 전사들, 그리고 악마와 그 하수인들. 그들 모두가 전장에 몰아친 이변을 감지하고 잠시 칼을 늘어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대체 저 놈들은 누구지?
-푸화아아악!
제피스는 자신을 향해 창을 내지르는 전사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 쥐었다. 손아귀 아래에서 전사가 컥, 하고 뜨거운 숨을 내뱉는다. 우드득, 거센 악력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전사의 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 광경을 보며 기가 질린 전사들이 뒤로 주춤 물러선다.
-쿵.
그 공백지 사이로 악마가 걸어온다. 성숙한 데미드라코 한 개체. 제피스는 바이저 아래에서 차갑게 악마를 노려보았다. 악마전서에 그려진 유명한 개체군 중 하나였다.
“이단심문관이 여길 어떻게 기어 들어왔지?”
악마가 대륙 공용어로 쉭쉭거렸다. 제피스는 모닝스타를 휙 돌려 그 사이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냈다.
“상관 없다. 모두 죽여버리면 그만이니.”
그렇게 말한 악마의 머리가 떨어져 나갈 때 까지 일 분 이상 소요되지 않았다. 마법사와 악마, 지휘부를 잃은 전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자트 팔란의 전사들은 갑작스레 ‘기증’ 받은 승리에 기뻐해야 할지, 또는 이 낯선 존재들을 경계해야 할지 아득한 표정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시각, 페르난데스는 오라이온이 준비해준 말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프트의 말에 의하면 디모니카 몇이 전장에 도착해 상황을 정리했다고 했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직접 나서는 것은 전력 과잉이다.
북부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쳤다. 페르난데스는 옷섶을 여미며 한파와 눈보라가 이는 설원을 건넜다. 추위 탓에 말이 빠르게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로 거친 눈발이 휘몰아쳤다. 페르난데스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부들거리는 말의 목을 두드렸다.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모르되, 지금 말의 체력을 보존하자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갔을까, 기어코 그가 타고 온 말이 힘없이 무릎을 꺾고 주저 앉았다. 말은 구슬픈 신음소리를 내며 눈바닥에 고개를 늘어트렸다. 더 이상 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아니라,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고생했다.”
페르난데스는 말의 이마를 다독였다. 말은 곧 눈을 감았다. 그는 망토를 깊게 여미며 눈발에 발을 디뎠다. 푹, 발이 눈에 잠기며 무겁게 떨어졌다.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친구.”
어느새 그의 곁에서 로프트가 함께 걷고 있었다. 그의 삐죽한 머리칼이 바람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그는 페르난데스의 곁에서 혼잣말을 이어갔다.
“혹시 아는가? 옛 북부엔 정말 거인이 살았다네.”
“···.”
대답할 여력이 부족했던 탓에,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북부인들은 정말 거인의 후예들이지. 점점 체구가 작아지고, 힘이 약해지기야 했지만. 그 근간엔 거인의 핏줄이 있었어. 사실 거인이라 해봐야 덩치가 좀 많이 큰 인간의 일종이지만 말이야. 하하.”
로프트는 반짝거리는 불똥을 페르난데스의 눈 앞에 띄워 그가 나아가야 하는 길을 점점이 표시했다. 페르난데스는 불빛을 따라 발을 옮겼다.
“아, 맞아. 나와 내 형제들도 언젠가는···. 아주 먼 옛날에는 그런 거인들 중 하나였다네. 그러니, 북부 인간들은 모두 우리의 자식들이나 다름 없지.”
불빛이 언덕으로 향했다. 눈이 두껍게 쌓인 언덕은 웅크린 거인처럼, 또는 고대의 어떤 괴수가 긴 잠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언덕 위로 올랐다.
“그리고 옛날.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이 불쌍한 인간들을 영원히, 아주 영원히 투쟁하도록 유도하기 전엔. 이들도 제법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네. 오히려 남쪽 작은 인간들에 비해 훨씬 훌륭한 문명을 일궈냈다고 봐도 좋아! 그러니 우리는 라그나로크를 막아낼 희망을 북부 거인들에게 품었던 거야. 우리의 자식들에게···.”
언덕은 끝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페르난데스의 체력이 떨어지고, 신체 말단부터 감각이 사라진 탓에 가까웠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제는 숫제 본능의 영역에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시대가 거듭할수록. 세상의 신비가 메마를수록. 북부의 아이들이 점차 나태해지고, 느긋해질수록. 녀석들의 몸집이 작아지기 시작했다네. 이건 저주라기보단 퇴화에 가까워서, 우리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었지.”
언덕의 고지가 보였다.
“처음에, 여기 아이들은 자신의 왜소한 자손들을 타락했다고 여겼다네. 악마와 괴물들을 사냥하던 이들에게 타락이란 끔찍한 나약함의 표상과 같았지. 부족에서 추방당한 작은 인간들은 몇몇은 지하로, 몇몇은 배를 타고 남부로 향했다네.”
로프트의 말이 멍하니,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페르난데스는 반쯤 감긴 눈으로 언덕의 정상에 발을 디뎠다.
바람이 멎었다. 눈발이 사그라들고, 그의 발길을 이어주던 빛무리가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멍하니 정상에 서서 발 아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선 로프트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거인들은 자신의 작은 자식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네. 부족에서 내쫓고, 북부에서 발 디딜 곳 없도록 천대하고, 괄시했지. 그러니 그 자그마한 인간들이 어디로 갔겠나? 땅으로 파고들고, 남부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고···.”
언덕 아래, 긴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버려진 광산과 채굴장비들이 널려 있는 중턱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상할 것 없는 낡은 갱도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와, 광산 전체를 아우르는 도로의 패턴을 이미 알고 있었다.
먼 옛날. 그러니 전생에. 그가 타이반의 봉인을 풀기 위해 강철마루 봉인지로 향해 지하의 깊은 던전을 탐험할 때에 봤던 양식이다.
“그렇게 버려진 이들, 쫓겨난 이들, 그런 이들에게 거인들이 붙여준 멸칭이 있지.”
강철마루 봉인지의 지하, 강력한 기계장치들과 높은 대장기술로 만들어진 복잡한 지저 미궁. 온갖 함정들이 즐비했던 그 끔찍한 심연의 아귀. 그 끝에 봉인된 타이반을 해방시키기 위한 기나긴 여정. 그 과정에서 그가 지겹도록 봐왔던 양식의 건축물들이 반파된 채로 눈발 아래에 삐죽 돌출해 있었다.
“드워프. 난쟁이. 그래. 맞아. 친구. 고대 북부인의 그 뛰어났던 기술들을 마지막으로 품고 있었던 그 종족 말일세. 이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 작은 아이들. 그 친구들을 우리는 드워프라고 불렀네.”
하자트 아쉰. 세 번째 도시. 페르난데스는 광산처럼 꾸며진 이 지역, 저 깊은 갱도의 끝에 있을 드워프 지하 도시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출된 규모로만 따져도 능히 그가 봤던 타이반의 봉인지 수준까지 될 법 했다.
“에리크 그 애송이는 여기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곳을 방치했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다르지 친구.”
뭘 얻어갈 수 있을지 한번 찾아 보자고. 로프트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