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72화 (173/388)

175. 하자트 아쉰, 매장된 도시 (2)

*

밤새 두텁게 쌓인 눈발 탓에 유적지로 향하는 입구는 반쯤 파묻혀 있었다. 깊이 모를 검은 입구 사이, 간헐적으로 서늘한 바람이 솟구쳐 페르난데스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쌓인 눈이 부스스 쏟아지는 채석장의 갱도 입구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규모가 크지만 버려진 폐광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루네글리프는 그 기원을 바위에 각인시키는 일종의 새김 문자였다.

바위와 바위의 균열, 그 작은 틈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지며 난상 형태를 띄지만, 패턴을 알고 보면 그건 어떤 규칙성을 띄고 있는 문장이 된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떠나고, 때가 되었다면 굳세어라.

‘또는, 죽음을 거부하고 종말을 견디리라.’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 문장 같지만, 이건 전적으로 루네글리프의 고질적인 특징이다. 루네글리프는 수 갈래로 해석이 가능한 함의를 동시에 한 단어로 표현하는 표의문자이며 심지어 언어 구조상 명사만을 가지고 있다.

보다 과격하게 직역하자면, [임종], [외부], [시기], [인내]. 일반적으로 던전의 입구에 박아 넣는 문장은 침입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가지기에,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일단, 들어가 보자고.”

로프트가 손바닥을 탁, 치며 웃었다.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더 고민한들 뚜렷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갱도 내부로 발을 디뎠다.

*

마법공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연금술에서 기원하는 이 학문은, 마력을 그 연료로 사용해 복잡한 기계장치와의 조합으로 기존의 마법 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체계를 이룩해 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전해진다’라는 뜻은, 문자 그대로 이 학문이 소실되었으며, 다신 복구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루네글리프를 기반으로 한 마력 세공과, 이를 바탕으로 정교하고 조밀한 기계 장치들의 조합. 오로지 루네글리프와 대장기술 둘 모두에서 종족을 초월해 압도적인 성취를 이룩한 드워프 특유의 마법 체계가 이 ‘마법공학’이었고, 지금은 고대 드워프의 던전에서 그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놈들이 대악마를 실제로 봉인했다는 것.’

다섯 대악마는 모두 제 6계에 걸쳐 봉인되어 있다. 이중 물질 세계에 봉인된 악마는 오직 뭄토 뿐, 천상룡 칼라드펠린이 봉인한 비늘 덮인 여제 사다르켈리사의 경우처럼, 대악마들은 제각기 다른 차원에 봉인되어 간접적인 영향만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드워프는 실제로 천상 전쟁 도중 대악마를 봉인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질 세계가 아닌, 저 먼 차원 어딘가에 ‘유폐’시켰다.

진홍대공 타이반. 하급 악령에서 시작해 오로지 파괴와 학살만으로 그 격을 대악마에 이르기까지 쌓아 올린 강대한 악마. 시작이 미약하였기에, 동격의 악마들에게 왕의 직위를 인정받지 못해 ‘대공’이라 불리나, 그 힘은 결코 다른 악마들에 밀리지 않는다.

어떤 마법도, 어떤 물질도 파괴하는 힘. 타이반의 능력은 ‘파괴’의 영역이다. 그가 가진 힘은 거의 신성을 담을 수준에 육박해, 그가 물질 세계를 활보하는 것 만으로도 대지가 스스로 파괴되곤 했다.

‘내 오랜 친구여.’

페르난데스는 이 익숙한 지하 갱도를 거닐며 추억에 잠겼다. 고대 드워프 던전에서 진홍 대공의 봉인지에 대한 단서를 얻은 것은 기적이었다. 이를 함께 발견한 모험가들을 독살하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 그의 청년기 시절이다.

꼬리가 밟혀 이단심문청에게 쫓기던 기간에도, 그는 결코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홍대공이 봉인된 드워프 던전을 발굴해내는 것에 성공했고···. 세계 멸망의 초침이 크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양식 자체가 더 낡긴 했어도, 결은 동일하다.’

페르난데스는 갱도의 끝에 멈춰 서서 그의 눈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청동 문을 바라보았다. 수염이 길게 자란 단단해 보이는 사내가 양각된 거대한 문은, 끌과 망치 따위로 파괴를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애송이 에리크는 여기에서 포기했던 모양이군. 하기야, 고대 도시를 발굴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으니까. 어때, 자네는 할 수 있겠나?”

로프트가 킬킬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파괴로는 이 문을 부술 수 없다. 페르난데스는 텁석부리를 쓰다듬으며 실금이 간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형제여, 우리는 견디리라.]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가 박혀 있다 할 것이다. 이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견디리라, 종말을. 그렇다면···. 페르난데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그나로크.”

-두쿵. 촤르르륵···.

그의 말과 함께 굵은 사슬이 감겨 드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톱니바퀴들이 덜컥이며 맞물리는 소리와 시끄러운 파열음이 연달아 문고리 안쪽에서 들렸다.

“오호? 대단한데!”

로프트는 낄낄거렸다. 문이 삐걱거리더니, 곧 양 옆으로 밀렸다. 마치 갱도의 벽이 문을 흡수하는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으로, 깔끔하게 깎인 반석과 벽돌로 이루어진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끼이이익, 쿵, 쿵, 쿵.

-촤르륵. 까드드드득···.

문이 열린 것을 시작으로 이 갱도, 아니. 이 지하 도시 전체에 어떤 종류의 장치가 기동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거대한 지하 도시 여기저기에서 시끄러운 마찰음들이 넘실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로 복도를 걸었다. 왼손의 감각이 서서히 온전히 돌아오고 있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견딜 만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오히려 신경을 갉아내는 듯한 격통 덧에, 그의 정신이 더 없이 예리해져 있었다.

-규모가 크군.

‘그래. 강철마루 봉인지 수준까진 되겠어.’

-이만한 건축물을 취미로 지었을 리가 없다. 페르난데스.

‘적어도 타이반에 준하는 것···. 혹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 잠들어 있겠지.’

페르난데스는 복도를 거닐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대악마들의 봉인지와 그 해주법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나 여건상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더라도, 적어도 북부 지하의 드워프 던전은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규모. 대악마 타이반을 봉인한 수준의 거대한 지하 던전이 조성되어 있다면···. 대체 무엇을 품고 있을까.

-촤르르륵. 끼이이이익.

복도의 끝, 다시 청동 문 앞에 이르렀을 때. 페르난데스가 문을 살펴보기도 전에 문이 스스로 열렸다.

-후우우우웅···.

어디선가 불어온 메마른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흐트렸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회랑이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환영하네, 친구! 하자트 아쉰에! 하하, 이 도시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와보는 군. 여기 친구들도 참 좋은 녀석들이었는데!”

로프트의 말이 회랑의 벽을 치며 메아리쳤다. 페르난데스는 로프트의 말을 무시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청동 판과 황금 새김이 박힌 화려한 석주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고, 천장은 돔 형태로 둥그러져 천상과 지옥의 전쟁을 묘사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판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스며 나오는 빛무리가 사위를 밝히고, 낡고 헤진 융단이 깔린 긴 교두보가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리 아래로, 흐릿한 안개에 덮인 도시가 드러났다.

말 그대로, 도시였다. 지상의 뭇 도시들이 그러하듯, 지하의 도시 또한 입체적이었다. 석주와 회랑, 가교 아래로 또 다른 층이 늘어져 있고. 석조 주택들이 첨탑처럼 솟아나 저 아래 깊은 절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작은 발걸음 하나 마저도 이 거대한 도시 전체를 울리는 소음이 된다. 아마도, 드워프들은 과묵했을 것이다. 시끄럽게 떠들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 테니. 기둥과 기둥 사이에선 한때 찬란했을 종족의 흔적이 남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황금과 청동, 그리고 강철과 바위를 깎아 만든 도시였다. 페르난데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의 규모와 그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구획이 정교하게 짜여진···. 마법진이군.’

-대단한 규모야. 도시 구조 전체를 이용한 마법진이라···.

타이반의 봉인지는 도시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았다. 위정자가 제아무리 광기에 들렸다 한들 대악마를 봉인한 장소에 도시를 세우진 않았을 테니. 그러니 이 도시가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아니. 이 마법진 위에 도시를 이루었다는 것은···.

‘적어도 놈들이 봉인한 것이 놈들에게 우호적인 존재였다는 뜻이겠군.’

페르난데스는 도시의 입구로 향하는 거대한 관문으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관문은 드워프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 놓은 듯한 거대한 석상 둘 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로프트. 알고 있었군.”

“음? 뭘 말인가?”

“여기 도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도.”

“오,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러니 자네를 여기에 데려온 것이 아니었겠나?”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면 왜 너 스스로 하지 않았지?”

“하하하, 친구. 나는 물질 세계에선 지푸라기 하나 내 뜻대로 들 수 없다네!”

로프트는 박수를 짝, 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에 뭐가 있지?”

“도화선. 오, 그렇게 바라보지 말게나. 자네에게 나쁜 것도 아니오, 내게도 필요한 것이며···. 수수께끼는 우리 삶의 소금과 후추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가게나! 로프트가 킬킬거릴 때 쯤에, 페르난데스는 관문을 지나고 있었다. 관문의 입구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재빨리 발을 뺐다.

-콰직!

그가 디뎠던 자리에서 푸른 전류가 파직, 하고 튀었다. 함정? 아니 도시 입구에 함정을 박아 넣는 종족이 있을 리가 없는데···. 페르난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돌아봤을 때. 어느새 로프트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들켰군!”

“···무슨 짓이지?”

“나는 여기 친구들을 좋아했지만···. 여기 친구들은 날 싫어했거든! 이런이런, 내가 이래서 그 땅딸보들을 사랑한다니까! 이 귀여운 옹졸한 것들! 하하!”

로프트는 천천히 허공에 떠오르며 킬킬거렸다. 짜증나는군. 페르난데스가 칼자루에 얹은 손을 탁, 하고 두드리자 로프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한 번만 더 나에게 수작질을 한다면, 결과가 어쨌든 거래는 끝이다. 북방신.”

“오 친구, 친구. 믿음을 가지게!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거라니까? 여기엔 말이지···. 에인헤랴르의 절반이 잠들어 있다네···.”

-두쿵, 촤르르륵.

사슬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가교의 밑, 도시의 아래에서 시끄러운 마찰음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도시가 살아나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다리 아래를 살폈다.

-촤아아악!

용광로에 불길이 치솟고, 그 아래로 뜨거운 용암이 강처럼 흘렀다. 용암이 도시의 구획과 구획, 가교와 가교 아래를 흘러내리며 붉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치솟아 열풍을 만들어냈다.

‘마법진이 가동되기 시작했군.’

-제 1 중심절이 가동했어. 대립어절 둘에 보수 회로가 다섯···.

‘그리고 중심절이 둘 더 있어. 대단한 규모로군.’

-용암으로 마법진을 기동시킨다라···. 그냥 용광로가 아니군. 저거 룬 대장간이야. 아마 마법진의 심장부겠지.

‘그리고 이 도시의 심장부이기도 하고.’

열풍 탓에 안개가 걷히며 도시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의 형상으로 불에 타듯 명멸하고 있었다. 거대한, 미로처럼 복잡한 보호의 주문이었다.

외부의 공세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려는 종류의 룬이 아니었다. 저 안, 도시의 깊은 곳. 세 개의 룬 대장간이 삼각형의 양 꼭지점을 이루고, 그 내부에 있는 어떤 종류의 ‘성소’를 보호하기 위한 주문이었다.

당연히 단순한 파괴로는 돌파할 수 없다. 페르난데스는 한참 도시의 구조를 내려보며 생각했다. 파괴로는 이 보호를 뜯어낼 수 없지만···.

‘이미 해봤단 말이지.’

보호의 반대는 파괴가 아니라 봉인이다. 보호와 봉인은 적대자의 시점을 자신의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의 차이. 구조를 역으로 뒤집으면 그것이 곧 봉인이자, 다시 보호가 되는 법이다.

타이반을 가두었던 강철마루 봉인지와 거의 유사한 패턴의 주문이었다. 강대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이거 추억 상자를 까는 기분이군.

‘우리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나?’

-설마, 있었다 한들 비극 뿐인 걸 무엇하러 추억하고 무엇하러 봉인하겠나.

페이자쉬가 하,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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