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73화 (174/388)

173. 기계 장치의 도시, 하자트 아쉰

*

-뒤에, 또 온다!

‘알고 있어!’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빙글 돌리며 검신으로 날아드는 강철을 후려 갈겼다. 콰직, 기계장치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게가 팔뚝에 실렸다. 강철로 축조된 녀석들의 몸은 그 무게가 대단했고, 날아드는 물체의 무게는 곧 충격력이 된다.

“이렇게 계속 싸울 수는 없겠는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렸다. 지이잉, 위이잉. 저마다 불길한 기동음을 내며 강철 괴물들이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부유 마법과 순간 경량화가 치덕치덕 발라진 금속 날개, 톱니바퀴와 시커먼 합판이 복잡하게 얽힌 몸체, 용암이 흐르는 뜨거운 회로와 그 달궈진 육신을 이따금씩 치익 거리며 식히는 배기구까지.

기계 공학의 정수라 불리울 만한 괴수들은,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날개가 달린 여인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루네글리프가 덕지덕지 박혀 있는 뒤틀린 창을 치켜들고 공중에서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전생엔 이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그때랑 지금은 처지가 다르지.

페이자쉬가 혀를 찼다. 강철마루 봉인지의 마법공학 골렘들은 둔중하고 묵직했으며 기동이 더뎠다. 아무리 공학 기술의 정수라 하더라도 그 근간이 마법에 닿아 있는 이상, 당시 페이자쉬는 골렘의 기동을 손쉽게 끄거나 킬 수 있었다.

놈들은 침입자를 파괴하기 위한 투사체 병기들로 무장한 채 느긋하게 움직이곤 했다. 기민하게 놈들의 배후를 점하고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마력 회로를 망가트리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기이이이잉!

공중에 떠 있던 골렘 중 하나가 매처럼 날아들었다.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빗겨들고 공세에 대비했다. 골렘은 유려하게 창을 반바퀴 돌려 그의 머리를 향해 찍어 들어왔다.

-콰지직!

불똥이 튄다. 페르난데스는 대검 끝으로 창날을 빗겨 치는 묘기에 가까운 기교를 보이며 공격을 흘렸다. 골렘의 균형이 살짝 무너지는 그 순간 페르난데스의 음울한 푸른 눈이 반짝였다.

-스겅.

데인 왕의 검은 충격에 파괴되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페르난데스는 이 단단하고 묵직한 골렘을 일검에 반으로 갈아버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대검이었다면 세 번째 공격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촤아아악.

뜨겁게 이글거리는 용암이 사방에 흩날렸다. 재빨리 용암의 범위에서 벗어나자, 다음 골렘들이 공중을 한바퀴 크게 돌더니 내려 찍어 왔다.

“하나씩!”

-콰직!

“와라!”

-콰지직!

그의 몸 주위로 골렘의 잔해물들이 쏟아졌다. 끔찍한 하루였다.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피곤에 찌든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세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

회랑을 건너 관문을 넘고, 또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와 한참. 이제 용암의 열기가 피부를 뜨겁게 달구는 지면에 발을 디뎠을 때, 페르난데스는 저 위에서 봤던 도시의 조감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걷고 있었다.

‘중심 어절로 향하는 통로는 총 넷.’

-그 중 생문은 하나, 사문이 셋이야.

‘그리고 생문과 사문이 시계 방향으로 순환하지.’

마법진이 가동된 도시의 도로와 건축물들은 그 요소 하나하나를 일종의 마법적 기물로 보아야 했다. 체스판 위의 병정들처럼 정교한 배치와 의도를 갖추고 만들어진 정밀한 진법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봉인진이라 볼 수 없었다. 이건 일종의 결계였다. 출입을 결벽증적으로 막아내는 종류의 결계. 즉 일견 평범해보이는 이 거리는 어느 순간 지옥의 한 귀퉁이로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촤르르르륵, 쿠궁.

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십 분에 한 번, 그리고 칠 분과 이 분에 한 번씩. 각각 다른 리듬으로 총 세 방향에서 사슬과 망치질의 소리가 들렸다.

“후···.”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에 그려진 도시의 전도에 마커가 하나 박힌다. 십 분에 한 번씩 마력로를 가동하는 룬 대장간이 하나.

-쿠궁, 쿠궁, 쿠궁.

곧, 칠 분에 한 번씩 망치질을 하는 룬 대장간이 하나. 전혀 다른 리듬으로 반복되는 불엽화음이지만, 이제 곧.

‘뒤로 한 발자국. 3번 코너로 돈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쿠궁, 촤르르륵.

사슬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이 분에 한 번씩 소음을 내는 룬 대장간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용암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후끈한 열기가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달구었다.

용암이 흐르는 궤적이 변하며 도시 전체를 흐르던 거대한 와류가 뒤틀린다. 페르난데스는 머릿속 지도를 실시간으로 수정하며 앞으로 걸었다. 방금까지 생문이었던 도로는 이제 사문이 되었다.

다시 다음 코너로, 다음 골목으로.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걸었다. 끔찍하게 복잡하고 정교한 결계였다.

*

결계의 심처, 그가 그려 놓은 패턴 대로라면 이제 세 번째 중심절에 접근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키이이이잉···.

저 멀리, 도시의 중앙에 있을 룬 대장간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어서, 페르난데스는 발을 멈춘 채로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뭘 잘못 밟았나?’

-접근 감지형 결계가 하나 더 있었나보군. 지독하게 숨겨놨어.

페르난데스는 시가지, 아마도 시장 골목으로 추정되는 거리에서 잠시 멈춰 섰다. 키이이잉, 카드드득, 시끄러운 마찰음이 도시 전체에 메아리 쳤다.

그리고 곧, 돌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경고, 비인가 접근 감지됨.]

딱딱하게 어절 단위로 끊어 말하는 탓에, 페르난데스는 간신히 그것이 고대 북부 언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경고, 비인가 접근 감지됨.]

[진압 기동타격대 활동 인가.]

‘별로 우호적인 소린 아닌데?’

페르난데스는 저 멀리에서 공중을 회치는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픽 웃었다. 경비 골렘까지 만들면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심지어 그 외형이 악취미였다.

‘여성형 골렘이라.’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드워프 마법공학 골렘들은 거대한 방패와 노포, 또는 기타 화력 투사체로 무장한 거대한 기동형 포탑들이었다. 그러나 이 던전의 골렘은 대단히 유려하게 움직이는 미형 조형물이었다.

악취미로군. 톱니바퀴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외관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가 픽 웃었다. 용암이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지, 놈들의 등허리 뒤에서 뿌연 증기가 솟고, 안저에서 붉은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기계장치의 틈새에서 마력을 담은 용암이 번들거려서 마치 지옥불을 머금은 강철 인형처럼 보였다. 도저히 우호적이라 평가할 만한 외관은 아니었다.

-스르릉.

“어디, 생긴 만큼 유능한가 보자고.”

페르난데스는 오른손으로 대검을 빗겨 들며 웃었다.

*

여성형 공중 드워프 마법공학 골렘···. 페르난데스는 마학자로서 이런 기묘한 어감의 명칭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곱 번째 골렘을 으스러트린 이후부터 이 녀석들의 이름에 대해 골똘하고 있었다.

이제 첫 번째 중심절에 가까워졌다. 그 말은 곧, 룬 대장간이 내뿜는 마력과, 결계의 중앙에 거의 근접했다는 뜻이며, 동시에 마법의 발현 밀도가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마력을 담은 용암이 흐르며 기동하는 결계의 특성상. 용암이 분출되는 대장간에서 가장 먼저 결계의 효과가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그 탓에, 페르난데스는 거의 한 순간도 가만히 멈춰 있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뛰어다니며 생로를 찾아 밟아야 했다.

-키이이이잉!

[경고, 비인가 개체의 접근. 경고, 비인가 개체의 접근.]

어절 단위로 끊어 말하는 경고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곧, 날개 달린 괴물들이 다시금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었다. 이제 페르난데스는 왼팔을 쉬게 둘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놈들, 정체를 알겠군.

‘말해봐.’

한참동안 침묵하던 페이자쉬가 말을 꺼낸 것은, 격전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다. 그때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휘둘러 쳐 골렘 한 기를 박살내고 있었다. 처음엔 한두 기체 씩 나오던 녀석들이 이젠 때를 지어 몰려 다니니 이젠 슬슬 위험하기까지 하던 차였다.

-여성형 기체야.

‘···장난 치자는 건가?’

-아니. 여성형 기체라고. 이 놈들은 결국 북부 만신전 문화권인 녀석들이야. 골렘이라는 건 일반적으로 제작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형태를 띄기 마련이지. 여성형 기체들을 위협적이라 느끼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나?

‘여성공포증?’

-아니. 신화 속 존재란 뜻이지.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며 달려드는 골렘을 살폈다. 흉흉한 붉은 안광을 터트리며 허공을 유려하게 돌아 날아드는 모습. 놈들의 기동 방식은 날개를 가진 존재의 것이 아니었다.

저 무거운 육신을 고작 이삼 미터 길이의 날개로 띄울 수는 없다. 경량화 주문과 부유 주문?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날개가 왜 필요했겠는가.

날개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신화 속, 날개를 가진 여성형 전사라 한다면···.

‘발키리들이군.’

페르난데스는 하, 하고 웃었다. 천사를 상대하는 건 오랜만인데.

그가 휘두른 대검에 맞아 골렘 한 개체가 담장을 밀어 넘어트리며 바닥에 내려 꽂혔다. 쿵, 하고 묵직한 소음이 잇따랐다. 잔해물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강철 팔이 바들거렸다.

-저길 봐.

페이자쉬가 가리킨 곳, 무너진 담장 너머로 룬 대장간이 보였다. 격전 도중 어느새 봉인의 중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루네글리프가 빼곡히 박힌 강철 톱니바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계장치가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끊임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따금씩 톱니바퀴에 연결된 철골 구조물이 튕기고, 스프링에 충격을 가하고, 거대한 망치가 내리 찍힌다. 그 아래에 깔린 모루에서 번쩍이는 주물이 찍혀 나왔다.

이건 일종의 영구 기관이었다. 몇 가지 트리거가 이 장치를 기동시키면, 용암이 흐르며 룬 대장간에 불을 피우고, 대장간은 용암의 열기와 그 위로 솟구치는 증기를 이용해 스스로 가동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봉인하기 위해선 이렇게 복잡한 기능이 필요 없다. 이건 과도한 기술적 낭비였다. 페르난데스는 비교적 안전한 자리에 서서 부서진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계 장치를 바라보았다.

“봉인이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이와 비슷한 기관을 본적이 있다. 먼 옛날, 그러니까 전생의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강철마루 봉인지의 봉인 구조물과 비슷한 양식,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의 기관이었다. 오히려, 그가 처음 발을 내딛었던 드워프 던전과 비슷한···.

“문.”

섬전처럼 정보가 스쳤다. 마력이 흐르고, 이를 연료 삼아 기동한다면 그 근간의 설계 사상은 기본적으로 마법을 골자로 삼기 마련이고, 극도로 발달한 마법은 문화권을 넘어 공통된 양식을 띄기 마련이다.

전혀 다른 모양 탓에 연상하는 것이 느렸다. 페르난데스는 룬 대장간이 기동하는 방식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것은 문이다.

“다른 차원의 입구를 여는 문이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거대한 구조, 여기에서 무언가를 봉인하거나, 결계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지독하게 꼼꼼한 방어 결계는 외부의 강대한 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드워프들은 당시에 도시의 멸망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뜻일 터.

하지만 어떤 보호도, 어떤 방어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도시를 중심으로 어디론가로 통하는 입구를 열기 위해 시도하고 있었다.

“종족의 명운을 건 문인가···.”

도심 한복판에 용암을 쏟아내는 짓을 일반적인 도시에서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최후의 보루라고 보아야 했다.

[정답이다.]

페르난데스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룬 대장간의 복잡한 기계장치와 이글거리는 용암 너머, 저 안쪽. 증기가 뿌옇게 올라와 흐릿한 장소. 도시 구조상 저 내부가 이 도시의 중앙일 터.

저 안 어딘가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훌륭하더구나.]

“넌 누구냐.”

[네가 죽인 아이들의 어미.]

그 말을 듣는 순간 페르난데스는 발작적으로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그가 이 북부에서 ‘죽였다’고 할만한 이들은 타락한 북부인, 또는 악마들 뿐이었다.

그리고 악마, 데미드라코들의 어미라면···.

“사다르켈리사···!”

그의 말에 저 안개 너머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큭, 큭큭. 지독한 유황 냄새와 쇠비린내 사이에선 결코 어울리지 않을 맑고 고운 웃음소리였다.

-승산은?

‘지금은···. 없다.’

사다르켈리사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수단은 여러가지 있었지만, 당초 그의 목적은 사다르켈리사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 아닌, 에리크의 수족을 자르고 북부의 위협을 근절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겐 승산이 없다. 놈이 뭄토의 절반 만큼만 강하더라도 여전히.

[아하하, 재밌는 아이로구나! 꼬마야. 내가 그런 도마뱀으로 보이더냐? 자아, 나를 보거라.]

-후우우웅···.

뜨거운 열풍과 함께 증기가 걷혔다. 톱니바퀴와 강철 배관들 사이로, 어쩐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뺨을 간질였다.

열과 강철 사이엔, 꽃이 피어나 있었다. 손바닥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은 틈, 그 한 칸의 틈 사이로 보이는 곳엔 녹지와 꽃, 들풀이 피어나 있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햇빛 한 점 없는 강철의 도시 한 가운데에, 용암이 들끓는 이 격렬한 도시의 정중앙에 작게 펼쳐진 화원은, 그 자체로도 어떤 신성함을 품고 있어서, 봉인지나 마법의 중심지라기보단 성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노랗게 반짝이는 황금 사슬에 감겨 있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그가 아는 미소였다.

[자, 이제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지만, 시기도, 장소도, 말투도, 분위기도 판이하게 달라 동일인일 가능성은 결코 없었지만.

그럼에도, 저 얼굴과 저 미소는 여전히 페르난데스의 심장을 움켜쥐고 찢어 발기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격렬히 피가 돌아 아찔한 고개를 살짝 내렸다.

[왜 그러느냐? 날 바라보기 부끄러우냐?]

“마녀.”

검게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이 일렁였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노려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넌 반드시 죽이겠다.”

-스르릉.

칼날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오싹했다. 그의 말에 여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 잠깐 기다리거라. 서, 성질이 급한 아이로구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외관은 언제나, 언제나 사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넌 어찌 그런 내게 칼끝을 돌릴 수 있단 말이냐? 너, 너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더냐?]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모습이 가져오는 감정은 사랑과 애틋함보단 후회와 회한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페르난데스의 역린과 같았다.

아리아, 페르난데스는 도저히 그녀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뭄토의 환영을 깨고 나온 순간부터 그는 이번 삶에서 아리아를 만날 가능성을 사실상 접어 두고 있었다.

세계가 평화로워진다면 아리아에겐 그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그 나름의 이별이었고, 동시에 속죄였다. 그 감정의 봉합까지 겪어온 고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저 여자를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고 싶다. 심장이 미친듯이 맥박쳤다. 그리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증오로 치환되고 있었다. 감히, 감히.

그녀의 추억은 그가 평생 품고 가야 할 가장 신성한 성화여야 했다. 그리고 지금 저 여인이 그의 세계에 흙발을 비벼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잠깐! 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겠다. 잠깐 멈춰, 멈춰다오! 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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