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프레이야
*
바람이 불고, 꽃잎이 둥실 떠올랐다. 대장간과 화로, 그리고 용광로의 열기와는 전혀 별개의 공간처럼, 서늘한 바람이 페르난데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달콤한 꽃향기가 흐드러졌다.
곧, 여인의 외관이 변했다. 보다 농염하게, 그리고 동시에 놀라울 만큼 청초하게. 눈물을 살짝 머금고 있는 큰 눈과 하늘하늘한 새하얀 옷자락 사이로 확연히 보이는 몸태가 아찔하게 시선을 잡아 먹었다.
[자, 이제 어떠냐? 이제 네 내면의 그 광기, 폭력성, 뭐 여타 그런 사내놈들이 가질 법한 마음이 좀 가라앉지 않더냐?]
여인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장난기 넘치는 웃음마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새하얀 이빨이 가지런하게 비쳐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화공이 있다면, 그녀와 그녀의 주위를 감싼 꽃잔디들을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대답 대신 그의 앞을 가로막은 배수관을 썰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 배관이 찢어지며 시커먼 증기가 치익, 하고 솟았다.
[뭐라고? 대체 왜···. 나, 나의 모습은 지금 인간들의 보편 심미관에 완벽하게 적중한 형상일 텐데···. 그럴 리가 없다. 나를 해치려 한다고?]
-콰직.
다른 배관이 뜯겨 나가며 페르난데스가 몸을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생겼다. 지독한 쇠 비린내 사이로 청량한 꽃향기가 섞여 이질적으로 그의 코를 간질였다.
[멈춰라! 다가오지 마라! 그, 그냥 보거라! 다른 모습을 해보겠다. 나는 할 수 있는게 많아. 쓰, 쓸모가 있단 말이다!]
-콰직.
이제 완전히 한 사람이 넉넉하게 통과할 만한 공간이 확보되고,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납도하며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너, 너는 그래. 그래 남부인이 아니냐? 기사도! 기사도는 어떠하느냐? 무력한 아낙을 해칠 셈이냐?]
사박, 하고 잔디가 그의 신발 밑창에서 으스러졌다. 방금 까지 디디고 있었던 단단한 강철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페르난데스는 이것이 환각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환각을, 또는 환각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저 마녀 뿐이다. 페르난데스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푸른 안광이 형형히 흘렀다.
칼을 휘두르기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자, 페르난데스는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뽑았다. 보아하니 저 여자는 자기 자신에게 환술을 거는 것이 고작인 것 같고,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용광로의 빛이 그의 등 뒤를 쪼이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서 여인의 몸을 덮었다. 여인은 파르르 떨며 그를 올려 보았다.
전생자의 살의는 시간 이상의 무게를 가진다. 페르난데스는 차분한 증오로 여인을 내려보았다. 그건 죽음의 신마저 꺾었던 사내의, 그리고 심지어는 세계의 끝을 바라보았던 사내의 살의였다.
여인은 페르난데스의 모습에서 어떤 종류의 어둠을 보았다. 오직 푸른 안광만이 빛나는 심연을. 살신자의 증오와 광기가 휘몰아치는 무저갱이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이, 이 괴물. 너에겐 사랑이란 감정이 없, 없단 말이냐?]
“있었다.”
-키이잉···.
네가 다시 꺼내어 뭉그러트린 감정이.
칼이 들어 올라가며 맑은 소리를 냈다. 여인은 눈물을 머금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칼을 든 채로 멈춰서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의 오른편에서 로프트가 낄낄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거야! 하하하,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얼마 만에 보는 지 모르겠군!”
[너···! 너, 이 광대! 그렇다면 이, 이 인간은 네 하수인이냐? 너처럼 비틀리고, 광기에 젖고, 잔악한 인간을 대체 어디서 구했지?]
“오··· 하수인이라기보다는 동업자에 가깝지. 내 작은 누이. 그리고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하다니, 이거 아주 서운하군. 보통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서로 안부를 묻는 편이 아닌가? 이거 이거···.]
[누가 네 가족이란 거냐! 너는 요툰이고 나는 바니르인데!]
“네 어미가 요툰이니, 엄연히 호적을 따지면 내가 삼촌이기야 한데···. 우리 천 년 전에 그런 건 더 이상 헤아리지 않기로 약속했잖나, 바나디스! 아하하··· 이런, 가족에게 버림받으니 속상하군 그래···.”
로프트는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하던 것 마저 하게나 친구. 내가 길을 잘못 알려준 모양이로군!”
[자, 잠깐!]
여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 광경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칼을 늘어트렸다. 치밀하게 조여오던 긴장이 풀어지며 살의가 누그러졌다. 페르난데스는 로프트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랑 장난하는 건가?”
“오호, 그럴 리가 있나? 내 친구, 진정하고 보게나. 저 가냘픈 여자가 바로 에인헤랴르의 절반이라네. 그리고 우리 앞에 문을 열어줄 귀하신 분이시지!”
[네 짐승더러 당장 칼을 치우라고 해!]
“오, 이런. 바나디스. 우리가 고작 칼 한 자루에 겁을 먹어서야 면이 서겠나?”
페르난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검을 납도했다. 도저히 살육을 벌일 분위기도 아닐 뿐더러, 저 여인은 악마나 그 추종자가 아닌 것 같았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만, 유용하다면 감정 정도는 다스릴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여인이 훌쩍거렸다.
[이, 짐승들. 이 괴물들.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어가지고는···. 멍청한 난쟁이들, 멍청한 요정들. 쓸모 없는 것들이 다 사라져가지고···.]
“바나디스, 아하하, 그건 우리가 아니라 보탄에게 따져 물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 나와서 그런데, 지금 아시르 녀석들 중에 물질 세계에 있는 놈들이 누구누구 있나?”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아시르나 미드가르드 뿐만 아니라, 너희 바니르들도 모조리 죽기 직전이니까?”
로프트가 어깨를 으쓱이자 여인이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양 팔과 목에 걸린 황금색 사슬이 찰랑거렸다. 여인은 잠시 사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늘어트렸다.
[이런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좋아. 아시르 그 멍청이들 중에선···. 티르와 발두르가 있겠군. 발두르는 인간 왕에게 붙었고, 티르는 떠돌아 다녀.]
“인간 왕? 음··· 애송이 에리크 말인가?”
[저 스스로는 ‘칠흑’이라 부르던데? 그 녀석이 맞아.]
“발두르, 하! 정결과 순수의 신이라는 녀석이 뱀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는군. 아주 재밌게 됐어.”
로프트는 낄낄거리며 박수를 쳤다. 페르난데스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의 말을 어떻게 믿지?”
“적어도 바나디스는 타락하지 않았으니까. 타락하기 전에 몸을 뺐거든. 그리고 적어도 이 북부에서 들풀과 생명이 피어나는 장소의 일들을 모두 알 수 있지. 저 봉인의 대가로 말이야.”
[그래! 날 못 믿으면 왜 날 찾아왔지, 인간!]
여인이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웃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삐뚜름하게 돌리며 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라그나로크를 막아낼 방법이 보이지 않더군. 너도 나름 알아보겠다고 남쪽으로 떠났던 걸 기억하는데···. 넌 뭘 찾아서 돌아온 거야?]
“음···. 아니, 나도 잡혀 있었어.”
[사내들은 하나같이 쓸모 없다니까.]
여인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로프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거지?]
“어쩌기는,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봐야 덜 억울하지. 이 친구가 한 팔 거들어 줄 거야.”
[이 작은 인간이?]
“방금까지 덜덜 떨던 게 이제 와서?”
[떨긴 누가 떨었다고!]
여인은 투덜거리고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귓가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티끌 한점 없는 완벽한 금발이 곱슬거리며 차양처럼 쓸렸다.
[자, 인간. 소개하지. 나는 프레이야. 완벽, 미, 생명, 탄생,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 것 관장하는 여신. 에인헤랴르의 절반이 나에게 충의를 맹세했으며, 모든 실드메이든과 발키리를 수호하는 여신이니. 이 만남을 영광으로 알도록.]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움찔거리며 어루만졌다. 페르난데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며 말했다.
[남부인들은 악수하는 법을 모르는 건가?]
“이 여자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지, 로프트?”
“저래 보여도 북부 대륙 전역의 들풀과 꽃망울들은 모두 바나디스의 눈이 되고, 아이의 들숨 섞인 바람은 모두 바나디스의 귀가 되지. 이 북부에서 바나디스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후긴을 가진 보탄 뿐이야.”
“쓸모 있겠군.”
[그게 여신에게 보일 태도냐!]
그녀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대검을 뽑았다. 그 서슬에 놀란 여신이 목을 움츠리고, 그 사이를 대검이 치고 지나갔다.
-촤르륵.
칼날이 황금 사슬을 조각내며 끊었다. 여신은 얼떨떨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는 굳어 있었다.
[브리싱가멘을 끊었어···? 이건 난쟁이들이 만든 건데?]
“이 인간이 남부에서 또 뭘 끊어 먹었는지 알면 기겁할 걸. 우습게 보지 마. 내가 점 찍은 늑대니까.”
로프트가 킬킬거렸다. 페르난데스는 성큼 걸어와 한 손으로 프레이야를 들어 올리고는, 어깨 위에 들쳐 업었다.
“다음은?”
“발두르. 녀석이 에리크의 곁에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놈에게 토르와 보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면 이 전쟁은 끝이야. 우선 다시 돌아가보지, 네 그 유쾌한 친구들이 도움이 될 거야.”
로프트는 큭큭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
승전 연회는 초라한 모닥불 근처에서 이뤄졌지만, 충분히 시끌벅적하고 즐거웠다. 하자트 팔란의 전사들은 거친 술을 마시고 마른 육포를 불길에 구워 뜯어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그들 사이, 키르하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제피스와 이단심문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신 만신전 계열의 신이 아니다보니, 키르하스는 그들이 돌연 이단을 정화하겠다며 날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자매님, 우리 성자 형제는 어디에 있나?”
“악마와 결탁한 적지를 직접 분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저희가 적들을 여기에 묶어둔 상황에서 기습을 한다고 했어요.”
“음···. 종심 타격이라. 언제나 효과적인 전술이지. 혼자 떠났나?”
“이 부족의 전사들을 몇몇 데려가기야 했지만···. 네, 홀로 간 것이나 크게 다름 없습니다.”
“여기보다 동쪽으로?”
파비아노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키르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아노는 제피스를 바라보며 활달하게 외쳤다.
“수도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게 아니겠습니까, 형제님? 당장 출발 하시죠!”
“아니, 잠시 관망한다.”
“예?”
제피스는 축배를 드는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남부의 일반 병사들보다야 덩치가 크고 강인해 보였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페르난데스가 키르하스와 아벨을 두고 떠났다는 것. 그가 본청의 자매들을 사지에 미끼로 던져두고 피신했을 리가 없으니, 그 의미는 이곳이 그의 거점이라는 뜻이다.
모든 현장 요원들은 일종의 버릇이 있다. 그건 작전을 수립하는 결과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이어온 보고서들을 분석하며, 특히 대황야에서의 작전 수행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페르난데스는 단단한 기반 세력을 다지고 거시적 관점에서 적들의 숨통을 조여가는 전술을 즐겼다.
그건 이단심문관의 전술 수행이라기 보다는 전쟁 지도자의 전략적 사고방식에 가까웠다. 제피스는 군략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디모니카를 관리하는 오랜 경험으로 페르난데스의 전술 편향을 읽고 있었다.
“키르하스 자매, 이 지역에 완전히 안전이 보장되는가?”
“그건··· 아닙니다. 형제님. 오늘 낮의 교전은 적들의 본대가 아니었으며, 적들은 미증유의 대군으로 이 북부에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은고··· 아니, 페르난데스 형제는 적군의 배후에 악마가 있으며, 적들이 통일 전쟁에 승리할 경우 남부로 진격해 내려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떠났다는 뜻이군.”
제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군세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악마가 섞인 대병력이 남하한다면 설령 방어전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재앙이 될 것이다.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문명 사회에, 북부의 악마들이 파고들기 시작한다면 간신히 기반을 다져 놓아 재건을 시작한 동부 왕국 연맹은 순식간에 돈좌될 것이 분명했다. 다만 한두 마리의 소규모 악마 사건만으로도 대영지 하나가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니.
타락은 물컵에 떨어트린 잉크처럼 빠르게 흩어진다. 한번 잉크에 물든 물은 다시 정화할 수 없다. 악마 사건이 발발하면, 이단심문청은 해당 지역을 전소 시키는 것을 택했고, 그런 사건들이 모여 문명 사회의 퇴보와 예정된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수도원장님, 이건 차라리 디모니카 전 병력을 파견해도 좋을 일이었을 겁니다.’
제피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에 잠겼다. 대낮에 악마가 인파에 섞여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이 북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우선 정보의 취합이 먼저였다. 작전 지역에 먼저 파견된 현장 요원과의 접촉이 이단심문관의 기본 전술이었다. 제피스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모를 페르난데스를 추적하기보다는, 그가 기획한 대전략에 발을 맞추기로 했다.
“우린 여기에서 형제를 기다릴 것이다.”
“예? 지금 성자 형제가 어떤 위협에 노출 되었을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지금 가서 쫓아가도 늦는다. 파비아노 형제. 그보다 여기 이 백성들을 지키며 형제의 복귀를 기다리는 편이 나아.”
제피스는 그렇게 말하며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아무리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며, 그들은 사흘을 꼬박 항해해 북부에 도착하자마자 연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직후였다.
-삐이이익!
그때, 항만 근처에서 긴 호적 소리가 들렸다. 키르하스의 귀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칼자루를 쥐고 벌떡 일어섰다.
“누군가 항구에 접근하고 있답니다!”
페르난데스일 가능성이 있었다. 키르하스는 재빨리 항구를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