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패잔병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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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여신을 짐짝 취급하다니, 이 무례함을 참을 수 없도다! 나는 대지의 여신이며 이 대지가 곧 나의 생명이니라!]
프레이야는 페르난데스의 어깨 위에 얹힌 채로 발버둥쳤다. 그것이 성가셨기에,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새하얀 맨발이 거친 강철 바닥을 밟고 내려 앉았다.
“뜨거울 텐데.”
[이 지하 깊은 곳에 무엇이 흐른다고 생각하느냐? 대지의 피가 곧 용암이니, 나는 더위에 상하지 않는다!]
프레이야는 당당하게 소리치고는 앞장서서 성큼 걸었다. 하자트 아쉰은 장시간 유기된 낡은 도시였지만, 드워프들의 결벽증적인 성미 탓에 완벽하게 정리된 도시 구획을 갖추고 있었고, 따라서 길바닥엔 이따금씩 보이는 작은 자갈이나 먼지를 제외하곤 크게 위험한 물체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의 등 뒤를 따라 걸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도시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
[감히 여신을 두 다리로 걷게 하다니! 이 후안무치함은 더 이상 눈 뜨고 참을 수가 없구나! 나의 마차와 배를 찾기 전까지, 네가 나의 마차가 되어야 마땅하리라!]
하자트 아쉰의 관문을 통과하여 폐광에 이르자 북풍이 몰아닥쳤다. 살을 에이는 듯한 북부의 칼바람이 폐광 안으로 휘몰아쳤다. 프레이야는 페르난데스의 등 뒤에 숨어서 헐떡이며 그렇게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망토를 둘러 그녀를 감쌌다. 이거 애를 다루는 것인지 쓸모 있는 소신(小神)을 하나 주운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두고 가고 싶군.’
-북부의 정보는 천금과 같아, 버리고 갈 수는 없어.
‘그러니 챙긴 거야. 후회가 되는군.’
페르난데스는 망토를 두른 채로 덜덜 떠는 여신을 등에 업었다. 그녀는 옷자락 안에서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래! 복종하는 법을 배우거라!]
“신도 추위를 타나?”
[나, 나는 봄의 여신이니라! 겨울은 쥐약이지! 그리고, 그리고 만신전에서 탈출할 때에 물질 세계의 육신을 입어서··· 이건 불가항력이다! 나도 그 멍청한 광대놈 처럼 영체로 다녔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인즉!]
“그러지 그랬나.”
[그 광대놈이 혹 쓸모가 있더냐?]
“···그건 아니군.”
[그래. 물질 세계에서 신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물질 세계의 육신이 필요한 법이다. 그 광대는 그저 쫑알거리기만 하는 멍청한 망령에 불과하지. 하지만 나, 위대한 바니르 중의 가장 위대하신 이 몸께선 세계 만물의 눈과 귀를 가지고 있노라!]
프레이야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 말을 들으며 한참 걷고 있던 페르난데스가 문득 발을 멈췄다.
“들풀과 꽃망울이 눈이고, 새 생명의 들숨과 날숨이 귀가 된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만?]
페르난데스는 눈발이 휘몰아치는 북부의 광야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계절에, 들풀과 꽃망울이라···?”
[앗.]
여신의 비밀을 알았구나! 프레이야가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하마터면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내동댕이 칠 뻔 했다. 그는 등 뒤로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쓸모를 증명해야 할 거다. 마녀. 난 아직 널 믿지 않고, 내 친구 중엔 신에게서 신성을 갈취하는 법을 알고 있는 녀석이 있거든.”
[가, 가, 감히 신을 협박, 협박하는 거냐?]
“문자 그대로 사실을 나열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만.”
[두려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다! 자, 여신의 힘을 보여주겠다!]
그의 등 뒤에서 프레이야가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곧 팔을 확 치켜들었다. 망토가 펄럭이며 떨어졌다.
-퐁.
눈밭 한 가운데에서 꽃망울이 터져 나왔다. 한 송이, 두 송이···. 새하얀 광야에 분홍색, 노란색 점이 알알이 박히는 것처럼. 꽃으로 이어진 기나긴 점선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내, 내가 본신의 힘을 모두 되찾으면 아예 꽃으로 길을 깔 수도 있지만···. 겨울이지 않느냐!]
“···뭘 한건지나 들어보지.”
[길을 밝혔노라! 너와 같은 남부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마라!]
“나침반 치고 거추장스러운데.”
페르난데스는 프레이야를 고쳐 업으며 투덜거렸다. 작전 지도와 대전략을 짤 때 가장 시급한 자원은 정보이며, 이 계절에도 새 생명이 태어나는 땅이 없을 리가 없으니. 반쪽짜리 정보라 하더라도 그녀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성가심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신은 열댓 살 꼬마가 소리지르며 활개치는 것처럼 활달하게 떠들어댔다.
“나는 입이 있는 나침반은 필요 없다.”
[무례한 놈!]
프레이야는 빽 소리지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달가운 침묵 속에서 페르난데스가 눈발 사이로 난 꽃망울을 따라 걸었다.
*
선박이 하자트 팔란의 부서진 항만으로 입항하고 있었다. 총 네 척의 쾌속정이 인접하고 있었다. 하자트 팔란의 전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틀어 쥔 채로 입항하는 배들을 노려 보았다.
목숨을 건 전투는 같은 수준의 활동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체력을 소진 시키기 마련이다. 전사들은 기진맥진해 있었고, 방금까지 이어졌던 승전 축제 탓에 긴장이 풀려 당장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키르하스는 그들 사이를 걸었다. 전사들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 길이 열리고, 항구에 다가오는 배들이 보였다.
“적이 아니다.”
키르하스가 곁에 서 있는 사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남부 공용어를 짧게나마 할 줄 아는 사내는 곧 동료들에게 외쳤다. 적이 아니다! 적이 아니다! 불신과 안도가 섞인 한숨이 전사들의 입가에서 흘렀다.
“적의가 없고, 노인과 여자가 섞여 있다. 차라리 피난민처럼 보이는 군.”
“피난···. 도망?”
“그래, 도망친 놈들.”
사내가 더듬거리며 키르하스의 말을 몇 차례 곱씹고는 전사들에게 전했다. 전사들은 그제야 무기를 든 손을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배들은 선상이 또렷이 보일 거리까지 다가왔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야를!!”
전사들이 한 마음으로 외쳤다. 그들의 야를, 실드메이든 아에렌이 도착했다. 하자트 투란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 것인가? 전사들은 재빨리 그들의 하선을 도우려 달려갔다.
“도움이 아니라, 도망쳐 온 모습이로군. 은공께서 실망하시겠어.”
키르하스는 차갑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페르난데스의 대계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대전략은 분명 아군의 머릿수를 늘리는 것부터 시작할 터.
대황야의 호족 연합을 규합할 때처럼 북부 씨족들을 규합하면 수월하겠으나···. 어쨌건 정보의 부족이다. 적의 규모도, 장래에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는 다른 씨족들의 위치도.
“긴 겨울이 되겠군.”
“걱정 되느냐?”
“···아벨.”
키르하스는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전장에서 그녀를 방벽으로 소모한 이후로, 키르하스는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가 사지에 있지 않았겠냐마는, 전선의 가장 격렬한 곳, 가장 죽음과 가까운 장소에 진압대 역할로 그녀를 투입한 사령관이 할 말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그녀의 전술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병이 적의 배후를 칠 때까지 보병은 방진이 되어 버틴다.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지만, 언제나 정석이 가장 어려운 법이며, 수와 질 양쪽 모두에서 밀리는 아군을 이끌고 잠시나마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선 강대한 비대칭 전력이 필요하다.
그때 키르하스가 제안한 것은 아벨의 적극적 참전이었다. 비대칭 전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전투 수행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란 말이 아니라, 적의 전투 역량을 집중시켜 다른 아군의 공격 밀도를 낮추는 일종의 피뢰침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그녀를 사지로 내몰겠다는 의미였다.
단 한 번 삐끗하면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전투였다. 고작 수백 명이 모인 교전이었지만, 결코 안전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벨은 아무런 반발 없이 그러겠노라 말했으며, 실제로 그 역할을 완전히 수행했다.
그러니, 키르하스는 아벨을 피하고 싶었다. 지독한 부채의식은 곧 그녀의 성실함과 진솔함을 증명했다.
-턱.
그녀의 머리칼 위에 손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아벨이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네 마음이 곱구나. 키르하스.”
“아벨···.”
“하지만 과한 미혹이니, 나는 오히려 걱정이 된단다. 보거라, 수천 명이 부딪치는 전장에서도 네가 패배한 적이 없었으며, 나 또한 오늘 낮의 전투가 내 생에 가장 끔찍한 전장은 아니었단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고 나는···.”
불멸자가 아닙니다. 키르하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홀로 나침반이 되고, 또 그녀의 등대가 되어주던 사내가 곁에 없는 지금 이 순간. 카단의 비호도, 그녀를 숭배하는 대황야의 정예병들도 없는 이 순간.
낯선 땅과 낯선 언어, 거칠고 강인한 이국의 전사들 사이에서, 이들을 모두 살려 그녀의 주인과 발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
그것이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장막이다. 아벨은 키르하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는 불멸자가 아니지. 그처럼 생명을 팻감으로 소모하며 전진할 수도 없고, 눈먼 칼과 눈먼 화살에 쉬이 상하는 연약한 몸이다. 하지만 키르하스···.”
사륵, 아벨의 머리칼이 너울지며 그녀의 눈 앞에 흐드러졌다. 키르하스는 멍하니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아벨의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필멸하기에 빛나는 법이다. 불멸자의 삶에 대해 아느냐?”
“···아뇨.”
“불멸자는 시간과 세월 속에 못박혀 관념으로 삭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결코 저 스스로 빛날 수 없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발버둥치며 세계를 움켜쥐고, 스스로를 불태우는 이들, 그래, 인간과 같은 필멸자들이 우리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는지 아느냐? 화원의 꽃망울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의 낙화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오, 석양이 그토록 눈부신 까닭은 그것이 찰나에 불과한 탓이다.”
아벨은 키르하스의 이마에 이마를 잠시 맞대었다. 따듯한 온기가 그녀의 머리를 차분하게 감쌌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영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벨···.”
“그러니 근심하지 말거라. 나와 페르난데스는 너를 믿고 있다.”
그녀의 말에 키르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은 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한번 헝클어트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선착장에서 하선한 아에렌이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거구의 사내가 양손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로 삐딱하게 그녀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
“와하하, 그래서. 거기에서 이 모자란 놈들로 달려들었다고?”
“그렇게 웃지 말거라. 이 아이의 돌격은 완벽하게 시의적절했다.”
“내 보기엔 저기 형씨들이 없었다면 우리 동맹은 이미 아작 났을 것 같은데?”
사내는 껄껄 웃으며 거친 꿀술을 들이켰다.
“동맹이라. 굳이 따지자면 패잔병 연합 아냐?”
“크, 좋지. 본디 반격이 압승보다 즐거운 법이거든.”
키르하스가 그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하자, 사내는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저 곰 같은 사내가 남부 공용어의 고급 어휘를 아주 유창하게 사용한 탓에 키르하스는 살짝 놀랐다.
대양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넘어 다른 민족의 어휘를 습득했다는 것, 심지어 그것을 이토록 매끄럽게 사용한다는 말은 곧, 이 사내가 그저 보이는 그대로 덩치 크고 멍청하고 야만적인 북부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 우리 남쪽 이방인 친구들. 우리 동맹을 이제부터 패잔병 연합이라 부르자고.”
“잡담은 그쯤이면 되었다. 군나르.”
아에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술을 머금었다. 사내는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움츠렸다.
“이런, 실드메이든. 축하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벌써 본론인가?”
“우리가 축하해야 할 일은 우리 적의 수보다 적거든.”
“뭐, 영광스러운 전투가 넘쳐난다는 뜻으로 듣지.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니.”
“그래.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지.”
턱, 하고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쳤다. 아벨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나이차가 제법 나 보이는데, 너무 허물이 없지 않나?
“둘 사이에 친분이 적지 않나 보구나?”
“음, 동갑내기 친구가 둘 다 야를이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하하.”
“동···갑이라?”
“그래, 이 군나르. 피 끓는 열아홉 청춘이지. 그대, 남부의 미녀. 그대의 나이는 어떻게 되지?”
“···네 생각보다는 많을 거란다.”
아벨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로 차를 마셨다. 군나르는 껄껄 웃으며 술을 마시더니 문득 눈을 빛냈다.
“그래서 그대들의 야를은 어디에 있지?”
방금까지의 호쾌한 술자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는 한 씨족을 대표하는,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부족장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대들 중엔 대표자가 보이지 않더군. 저기 혼자 앉아있는 형씨들은 듣자하니 도중에 합류한 것이고, 아에렌을 북부어 한 마디 못하는 그대들이 설득했을 리가 없지 않나.”
“눈썰미가 제법이구나.”
아벨을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인간들을 싫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디선가 이토록 빛나는 인물들이 나타나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니.
“오고 있을 거다.”
페르난데스는 적의 심장부를 향해 곧장 나아갔고, 그의 투쟁이 낮 동안 그녀가 수행했던 전투보다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겠으나, 그녀는 그가 돌아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