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76화 (177/388)

176. 그들의 목적

*

닷새가 흘렀다. 겨울나기에 턱 없이 모자란 식량을 어떻게든 끌어 모아 간신히 버티는 닷새가. 아에렌은 임시 숙소들이 얼기설기 이어붙은 마을의 정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크의 군사들은 하자트 팔란을 폐허로, 또는 거의 평탄화된 야지로 만들었다. 이는 몇 가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이익을 노린 행동이다. 통일전쟁을 벌이는 입장에서 근처 씨족에게 건네는 일종의 경고, 그리고 흩어져 숨어있는 하자트 팔란의 생존자들에게 자원과 보급로를 끊어내려는 전술이다.

그러나 과하다. 씨족간의 전쟁에 있어서 씨족의 수도, 즉 겨울의 생존을 보장하는 식량 창고는 일종의 성역이다. 굶주린 씨족의 전사들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다른 씨족을 산발적으로 약탈할 것이고, 이건 결국 인근 부락의 총체적인 몰락으로 이어진다.

또한 씨족의 창고를 불사를 수도 있다는 경고는, 오히려 반발을 얻을 것이다. 패배하면 씨족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종류의 경고가. 전투 없이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해선 반드시 피해야 하는 악수이며, 북부의 모든 씨족들과 전쟁을 벌인다면 어떤 부족들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후···.”

놈들의 악수가 곧 아군의 기회가 되어야 했지만, 당장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전사들의 추레한 몰골을 바라보면 그 기회도 요원하기만 하다. 아에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실드메이든. 그러다 땅 다 무너지겠어?”

“군나르.”

“걱정이 크구만 그래. 이제 떠나야 할 시점인데 이렇게 엉덩이 깔고 앉아있는 이유가 뭔가?”

“아직 남부인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놈은 뒤졌을 거야. 그리고 이대로 있다가 우리 모두 놈을 따라 가겠지. 아에렌. 내가 우리 부족을 모조리 데리고 온 이유는 겨울철 바다를 바라보며 모두 굶어 죽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군나르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아에렌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출렁이는 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사내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면 그 전사들이 모두 이탈할거야. 포기하긴 아까운 전력이지. 며칠 더 있는다고 우리 전력 손실이 더 심각해지는 건 아니야.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놈들의 본대가 밀어 닥치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

군나르는 아에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네 숙소로 들어가자. 긴히 할 말이 있어.”

+

군나르는 숙소 한 가운데에 놓인 전술 지도와 모닥불, 그리고 테이블 곁에 대충 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에렌이 차양을 닫고 팔짱을 끼자 군나르는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말했다.

“이건 추측이긴 한데, 상황이 심각해.”

“뭔데 그래.”

“왜, 지난 밤에 네 전사들이 돌아왔잖아. 그 녀석들에게 술 좀 먹이면서 뒷얘기를 들어봤거든.”

페르난데스와 함께 떠났던 전사들이 복귀한 지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 시기, 아에렌은 씨족의 경계에 흩어진 전사들과 주민들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피로에 지친 그들은 페르난데스가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는 것만을 전달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났고, 그 탓에 아에렌은 원정의 정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나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에리크의 목적은 통일이 아닌 것 같아.”

*

-퐁!

“그것 좀 그만 두지 그래.”

[네가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어 그런다!]

페르난데스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발 한 가운데에 튀어나오는 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한 마디 한 이후로 이 여신은 그럴싸한 순간만 오면 어떻게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솔직히 귀찮다. 그가 그녀에게 바란 능력은 꽃을 틔우거나 길을 알려주는 자연친화적인 나침반이 아니었다.

“길은 어차피 알고 있다. 나는 별을 볼 줄 알아.”

[눈이 달려 있다니 축하한다!]

“그냥 내려서 네 발로 걸어라. 마녀.”

[퐁!]

이젠 자기 입으로 맑은 소리를 내며 심통을 내는 것이 아닌가. 곧 그의 발치에 꽃이 항의하듯 다닥다닥 튀어나왔다.

[네가 돌려보낸 전사들이 부족에 합류했다. 이제 부족장이 떠날 준비를 할 것 같군.]

“그건 좋지 않군. 에리크의 목적은 통일 전쟁이 아니니. 차라리 그 자리에 있는 편이 나을 텐데.”

[그건 무슨 소리냐?]

“한번 지나간 지역에 다시 군사를 파견하지 않을 거란 뜻이지. 놈들의 목적은 적의 완전한 섬멸이나 지배가 아니니.”

[아니, 그 말 말고. 에리크의 목적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

“자기 수도를 오염시켰잖소.”

프레이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뜸 손을 들어 페르난데스의 뒷통수를 찰싹 하고 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성가셨다. 페르난데스가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당당한 말투로 외쳤다.

[대화할 때 중간 과정을 건너 뛰는 건 좋지 못한 버릇이다!]

“훈계 고맙군. 그래. 너도 알아야 하니···. 북부인들이 왜 여름에만 군사를 일으키는 지 아나?”

[겨울은 춥기 때문이지. 바다가 거칠어 항해가 어려워서···.]

“반은 맞아. 하지만 다른 이유가 더 크지. 북부의 겨울은 제법 괜찮은 사냥철이야. 월동 준비를 하는 짐승들은 기름지고 무방비하거든. 봄엔 작물을 키워야 하고, 가을엔 그걸 수확해 놓아야 하지. 여름은? 낚시를 제외하면 사실 노동력이 많이 투자되는 생산이 크지 않아.”

[···그래서?]

“겨울에 군대를 일으켰다. 이건 북부 씨족만을 겨냥한 기습이지. 다른 씨족들은 월동 준비를 하고, 기름지게 살을 찌우며, 무방비하거든. 씨족을 짐승이라 친다면, 전쟁은 열량 소모가 과도한 운동이야. 부족의 전사들을 먹여 살릴 보급망을 구축하고, 반드시 이긴다 하더라도 두세 번의 전쟁 이후엔 고사하겠지.”

페르난데스는 와삭, 하고 얼어붙은 눈더미를 밟았다. 단단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그의 등 뒤에 업힌 여신에게 나직히 말했다.

“모든 전쟁에서 이긴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아. 하지만 그 전쟁 이후에 남는 건? 굶어 죽은 수많은 씨족들의 시체 뿐이지. 대규모 통일 전쟁이라? 자신의 수도를 오염시키고 시작했다고? 자, 이제 놈의 목적이 보이나?”

[그래. 이건···.]

*

“에리크가 저 지랄을 떨기 전에, 그 전 야를이랑 내가 안면이 좀 있는 편이었지. 거칠지만 씨족을 아끼던 늙은이였어. 도박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놈들의 씨족엔 어부도, 농부도, 심지어 대장장이나 목수도 있었다고.”

군나르는 모닥불에 덥혀진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그는 잔에 찻물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 씨족의 사내들을 모조리 징집한거야. 목적이 통일 전쟁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지. 그건 자살 행위니까.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씨족 전체가 무너지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건 그렇지.”

아에렌은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추위와 굶주림은 적어도 사람을 가려가며 찾아오는 녀석이 아니다. 그들이 야지에서 떨고 있는 것만큼, 놈들의 군대도 이 겨울을 보내고 있을 터.

심지어 씨족 전체가 그렇다면···.

“네 부하들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며 말하더군. 하자트 카잘이 완전히 아작이 나 있었다고. 악마가 돌아다니고 건물은 죄 부서져 있고, 주술사들이 사람 시체로 온갖 더러운 장난질을 치고 있다고 말이야. 에리크 그 놈은 자기 도시를 박살내고 자기 백성들을 이 겨울에 야지로 내몰았어.”

“통일이 목적이 아니라···.”

“그래. 기반 도시를 박살낸 놈이 설령 통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놈의 군대는 그냥 떠돌이 용병들에 불과하겠지. 결코 정착할 수 없을 거야.”

군나르는 차를 마시며 말을 멈췄다. 마치 다음에 꺼낼 말이 두렵다는 듯이. 오랜 시간 군나르를 보아왔던 그녀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행동이었다. 군나르는 겁이 없고 언제나 당당한 것으로 유명한 전사였으니.

곧 그가 마지못해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놈의 목적은 북부의 멸망 그 자체야.”

*

[라그나로크.]

“그래. 멸망. 총체적이고 확실한 멸망. 그게 에리크의 목적이겠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기야 하지만. 왜? 그건 악마에게도, 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야. 지배할 백성도 없이 공평하게 모두가 멸망한 황폐한 북부가 악마에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이냐?]

그녀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남부, 저 아래의 대륙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상 북부 대륙의 멸망은 세계 전체의 규모로 볼 때 큰 사건이라 하기 어려웠다.

북부가 물질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악마들이 만일 물질 세계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면 북부는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남부 문명 사회를 향한 유용한 기물이 될 터였다.

북부가 멸망하고 북부의 모든 생명이 꺼진다 한들. 악마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들어가는 품에 비해 과하게 적었다. 한 마리의 악마를 물질 세계에 소환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노력은 비단 마법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니 악마들은 한 번 물질 세계의 장막을 찢고 나왔을 때 최대한 많은 영혼을 수확해 이 손실을 만회하려 든다. 이런 상황을 이단심문청에선 ‘악마 사건’이라 부르며, 그들이 가진 최강의 병력을 파견해 저지하는 것이다.

만일 북부 대륙 전체에서 악마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건 맞불에 불과했다. 서로의 산소를 불태워 서로 상잔하고 마는 불길. 상호 확증 파괴의 전형이다.

“놈들의 전술 목표가 바뀌었단 뜻이다.”

전생에서 에리크는 북부를 통일하고, 북부 씨족들의 전사를 모두 모아 남진한다. 그건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수준의 사고방식이었다. 남부 대륙을 정벌하여 대규모 악마 사건을 획책하는 사다르켈리사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번 삶에서 그녀의 목적이 바뀐 이유. 이에 대해 페르난데스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두고 있었다.

“뭄토가 죽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단 한 차례도 바뀐 적 없던 대악마의 직위. 설령 그들 중 가장 어리고, 심지어 인간 출신의 악마라 하더라도 신성을 가진 존재가 물질 세계에서 필멸자에 의해 쓰러졌다는 소식이 사다르켈리사의 신경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거기에 엘프가 준동하고 있지.”

오라이온이 사다르켈리사의 수하였고, 그가 인퍼머르 시에서 프란츠리트와 손을 잡았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사다르켈리사는 흡혈귀 귀족들과 손을 잡아 남부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계획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랬겠지. 북부를 정리하고 병력을 온존한 이후, 북해상을 지배하는 흡혈귀들과 손을 잡고 남부를 침공한다.

그러나 프란츠리트는 멸망했다. 남부 대륙의 혼란은 빠르게 안정화 되고 있었고, 동부 왕국 연합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제국과 술탄은 잠정적인 휴전 상황에 돌입해 이제 북부의 전사들을 막아낼 역량을 키우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문명 사회의 방비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적어도 이번 세계에서 시간은 사다르켈리사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급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부를 느긋하게 통일하고 병력을 보존하길 기다릴 수 없는 이유가.

“사다르켈리사의 목적, 대악마들의 목적은 문명 사회 그 자체지. 하지만 지금 남부 대륙의 안정화 속도가 놈들의 예상을 상회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자충수를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 자충수가 아니라 다른 전략을 짜내야 한다는 뜻이야.”

페르난데스는 설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퐁, 하고 침엽수림 한 가운데에서 꽃망울이 터졌다. 나무들에 붙어 있는 겨우살이들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영혼은 악마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화폐 단위로 여겨지지.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선 대단히 많은 영혼과 제물이 필요해. 그리고 대륙 단위의 학살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흐르고 절망과 절규가 고여서 모여든다면. 충분한 수준의 화폐가 쌓인다면···.”

사박, 페르난데스는 능선의 끄트머리를 밟고 아래를 내려 보았다. 저 멀리 모닥불이 보였다.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전사들도.

하자트 팔란에 도착했다.

“대악마라도, 소환할 수 있다.”

대악마를 소환했던 이력이 있는 흑마법사가 공언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기회야.”

대악마들은 설령 충분한 제물이 모여 소환될 수 있다 하더라도 쉽게 물질 세계로 강림하지 않는다. 물질 세계에서의 실패와 죽음은 악마들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실로 인해 대악마의 직위를 하위 악마들에게 강탈 당할 수도 있는 탓이다.

타이반처럼 잃을 것 없다는 듯 날뛰는 놈이 아니라면. 사다르켈리사처럼 배후에서 계략을 짜내며 완벽한 판도를 그리는 놈이라면 결코 쉽사리 물질 세계에 강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몸이 달아서 직접 나서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악마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은 대악마의 진신을 상대하는 것 뿐이고, 놈의 본체를 상대하기 위해선 먼저 놈의 힘을 깎아내야 한다.

물질 세계에 강림한 대악마가 그의 본체에 준하는 힘을 얻기 전에, 아직 놈이 나약할 때 최대한 많은 피해를 강요하는 것.

그리고 놈의 진신이 잠들어 있는 놈의 봉인지로 향하는 길을 여는 것까지.

이 때, 이 순간. 이 기회를 만들기 위해 페르난데스는 페이른을 구했고, 데인 왕국을 살려냈으며, 동부 왕국 연합의 결속을 다졌고, 대황야를 정리한 것이나 다름 없다.

사다르켈리사가 아니더라도, 남은 대악마들이 조급해지도록. 그래서 놈들이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모험’을 시도하도록.

그래서, 놈들의 살점이 충분히 나약해지고, 물러져. 마침내 그의 칼날이 놈의 목젖에 틀어 박히도록.

[너는··· 무서운 녀석이었구나.]

그는 한 번에 한 가지 수에 착수하지 않는다. 페르난데스는 능선을 따라 설산에서 내려가며, 등 뒤에서 작게 떨고 있는 여신의 말을 듣고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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