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스톰콜러
*
“우리의 표적이 대악마가 아니란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놈에게 다가갈 길을 여는 것입니다. 형제님.”
사다르켈리사는 봉인되어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명제에 가깝다. 놈이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놈의 하수인들은 여전히 지옥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발할라의 에시르 신족들이 타락한 것이 명백했지만. 정작 사다르켈리사의 봉인은 깨어지지 않았다.
천상룡 카라드펠린이 수호하는 ‘다섯 탑의 수은 신전’. 그 심처에 갇힌 채로, 봉인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봉인은 전생 최후의 대전쟁이 다가온 시점에서 파괴 되었으므로, 지금 시대엔 결코 깨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봉인이 풀리고, 그녀가 본격적으로 물질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면 그 때는 늦다. 모든 힘을 되찾은 대악마를 막아설 방법은 적어도 물질 세계에선 찾기 어려우며, 심지어 그 순간에 봉인이 풀리고 활동을 개시하는 대악마가 그녀 혼자일 가능성 또한 적다.
그러므로, 지금 해야 했다. 사다르켈리사의 암약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 순간. 적들의 가장 강력한 기물들이 판도 위로 착수하는 이 순간이, 오히려 그녀를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놈은 봉인되어 있으며, 다만 그 하수인들을 이용해 이 대륙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놈의 본체를 격하려면 우선 놈에게로 가는 길을 열어야만 합니다.”
“물질 세계에 있는가?”
“아니오. 형제님. 그러나 그 관문으로 향하는 방도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가시죠 형제님들. 현지 조력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따르겠다. 형제.”
파비아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단심문관들이 그의 뒤를 따라 막사를 벗어났다.
*
아에렌은 턱을 괴고 좌중을 훑었다. 야를의 전투 막사엔 씨족의 원로들, 주술사, 신관, 그리고 남부인과 프레이야가 모여 있었다.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막사의 휘장을 걷으며 ‘그 사내’가 나타났다. 이 북부에 도착한 지 이제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씨족 전체에 존재감을 떨치고 있는 사내가.
“기다리게 해 미안하군.”
페르난데스는 거침 없이 좌중 사이를 걸어갔다. 저벅,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거구의 사내들이 따라 들어섰다. 막사가 순식간에 가득 차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페르난데스와 이단심문관들은 한쪽 구석에 서서 아에렌을 바라보았다.
“모두 모였군. 좋아. 시작하지.”
아에렌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난데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좌중을 훑어 보았다. 패전의 두려움, 거점을 잃은 난민들의 끈적한 패배주의가 그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어떤 군단 지도자들은 이따금 ‘정신론’을 강조하곤 한다. 전쟁의 승리는 사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싸우기도 전에 패주한다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겠는가.
그러나 진정코 뛰어난 사령관은 전쟁의 승리를 ‘정신’이 아닌, ‘정보’에 있다고 여긴다. 페르난데스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정신 무장은 단지 불합리한 명령과 비이성적인 전황에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집단 최면에 불과하다. 이들을 싸우게 만들기 위해선 그런 부수적인 요인에 승부를 걸어선 안 된다.
비전이다. 페르난데스는 지도를 바라보고는 미소 지었다. 패배주의에 휩싸인. 바닥에 처박힌 사기를 끌어 올려 전장에 내세우고, 숫적 열세를 뒤집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선 ‘승산’에 대한 비전이 필요했다.
전략보단 선동의 영역에 가까운 잔재주였다. 애당초 페르난데스는. 그 이전에 ‘페이자쉬’는 위대한 야전사령관이라기 보다는 선동가에 가까웠다.
-딱.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페르난데스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붕대에 감싸인 왼팔이 허공을 잠시 쥐는가 싶더니. 딱, 하고 마디를 부딪쳤다.
-화르륵!
큼직한 테이블 위에 곱게 모셔져 있던 양피지 전술 지도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무슨?!”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장로들이 웅성거렸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에렌과 페르난데스, 그리고 이단심문관들 뿐이었다. 아에렌은 그를 시험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이단심문관들은 거의 전폭적인 신뢰로 페르난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이군. 마법을 문제 삼진 않아서.’
-아마도 저 멍청이들은 이게 무슨 기적이나 신성 주문이라 생각하겠지.
‘루네글리프 한 조각을 태웠어. 다행히 헤일로가 떠오르진 않는군.’
청동 왕좌의 검은 헤일로는 너무나 명백히 이단적인 징후였다. 그러나 말레이른의 주술 체계는 외부로 쓸모 없는 마력 누수를 일으키지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불길이 곧 가셨다. 여전히 장로들은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야를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며 점점 잠잠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아에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자처럼 오만한 폭력성이 페르난데스에게 향했다. 페르난데스는 아랑곳 하지 않고 프레이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레이야. 할 수 있겠지?”
[이를말이냐?]
프레이야는 당당하게 웃었다. 애초에 페르난데스가 그녀를 필요로 한 것은 정보의 존재. 오로지 그 뿐이었고, 따라서 그녀는 이 장소에 오기 전에 이미 페르난데스에게 해야 할 일들을 들은 바 있었다.
-퐁!
나무 테이블 사이에서 있을 수 없게도 꽃이 피어 올랐다. 퐁, 퐁. 장미, 개나리, 안개꽃과 튤립에 이르기까지. 종자와 개화 시기에 상관 없이 난잡하게 오색 꽃망울들이 테이블 위를 덮어갔다.
“오오···.”
장로들이 여신의 행사를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아에렌과 군나르는 다른 이유로 신음을 흘렸다. 이건···. 지도다.
인간의 힘으로 양피지에 조악하게나마 바느질 해가며 그려낸 그들의 전술 지도를 넘어서서, 신의 지도였다. 신이 바라보는 북부의 정경이 그들의 눈 아래에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수가 적소. 전사들을 모두 모아야 간신히 오백 남짓. 거의 모두 보병들이지.”
“씨족의 전사들은 일당백의 용사들이다!”
“적들 또한 저들 씨족의 전사들이오. 심지어 악마가 끼어 있는.”
장로의 말을 무시하며 페르난데스는 말을 이었다. 그는 지도 한 구석에 푸른 꽃을 손으로 짚었다.
“하자트 팔란. 하자트 투란. 두 씨족의 모든 전사들을 모아야 고작 그 수가 된단 뜻이오. 여기서 전투 인원을 무리하게 확충한다면···.”
“미래가 없지. 놈들과는 달리 우리에겐 미래가 있어야만 하니까.”
아에렌은 페르난데스의 말허리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다. 전쟁의 승리가 능사가 아니었다. 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고, 북부의 겨울은 길고 거칠기에. 씨족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투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놈들의 목적이 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고 계셨소?”
“그래.”
“말이 빠르겠군.”
-훌륭하군.
페이자쉬는 감탄하며 아에렌을 바라보았다. 힘과 정의의 사르디엘. 피에라넬이 만신전의 전략을 담당했다면 그녀는 만신전의 전술을 담당하던 대천사였다. 그녀의 재능이 개화했다면 이 정도의 안목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족스럽군. 일이 수월하겠어.’
-대악마를 잡는 일이? 하하, 생각보다 더 담대해졌구나. 페르난데스.
‘적어도 무능한 여인을 구원하라는 임무보다는, 함께 전선에 설 수 있는 실드메이든과 난관을 돌파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군.
페르난데스는 감탄을 내색하지 않으며 지도 한복판에 나뭇가지처럼 펼쳐져 있는 붉은 장미들을 짚었다.
“그 말대로, 놈들의 목적은 무분별한 학살과 북부의 총체적인 몰락이오. 그 말은 곧 다른 씨족들 또한 놈들의 군세에 스스로 합류하거나 정치적인 합종을 꾀하지 않으리란 뜻이지. 놈들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소. 그건 곧 우리의 기회지.”
“흩어진 다른 약소 부족들을 통합하라. 그래. 우리가 생각한 이상적인 그림이 그렇지. 하지만 어떻게? 이 겨울에 저마다 산간 어딘가에 틀어박혀 숨어서 고사하고 있을 그 머저리들을 무슨 수로 규합하고, 어떻게 소문을 내며, 어떻게 연합군을 만들어 대항하겠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잊었소? 우리에겐 여신이 있소. 북부 전체를 시야 안에 둘 수 있단 뜻이지. 산 속에 숨어 있는 자보다 찾기 쉬운 이들이 없소.”
“시간이 문제야. 남부인. 우리가 손을 뻗어 이들을 끌어 모은다 치자. 셋? 넷? 어쩌면 넉넉하게 여기에서 여기. 이 범위를 잡아 다섯까지 포섭할 수 있겠군. 난민들을 모아 전사들을 가려 뽑고 무장을 챙겨주고 전장으로 나서기 위해 준비할 시간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지?”
아에렌은 푸른 꽃이 피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노란 개나리들이 곳곳에 틀어 박힌 지도 전역을 훑었다. 그녀의 말대로 도보를 통해 씨족들을 규합하는 것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라는 한계가.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대단히 귀중한 전략 자원이다. 그들이 씨족들을 규합하고 몸집을 키우는 시간. 그 비대해진 규모의 씨족들은 충분히 준비되기 이전엔 그저 먹음직스러운 전술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뒤엉킨 난민 지역에 악마를 앞세운 대군이 밀려든다면. 그래서 이들이 다시 흩어진다면. 그땐 뒤가 없다. 그렇게 패퇴한 이들이 다시금 아에렌의 권위에 복종할까?
“그러니. 우리는 시선을 돌릴 참이오.”
페르난데스는 지도의 반대편을 짚었다. 붉은 장미들이 북부를 가로지르며 뿌리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불태운 북부 지역의 영지들을 의미했다. 그 긴 전선 이남으로 하자트 투란이 있고, 정 반대편. 북부 끝엔 광야가 있다.
북부 대륙의 더 북쪽으로 넘어가면 그곳은 ‘요툰헤임’이라 불리는 땅이 펼쳐진다. 서리거인들의 대지라는 의미였고, 그것이 문자 그대로 거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추위와 죽음 뿐인 지역이다. 어떤 생명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는 매서운 추위와 긴 밤의 공포가 도사리는 지역이다.
그 사이로, 보라색 꽃이 피어 있다.
“거긴 무슨···?”
“바나하임. 이 장소엔 에인헤랴르의 절반이 잠들어 있는 땅으로 향하는 관문이 있지. 물질 세계··· 그러니까 우리가 발을 디딘 이 세계가 아니라, 차원 너머의 세상 말이오.”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허무맹랑? 그럼 악마들은 이 지역 토착 생물인줄 알았소?”
“···으음.”
바나하임으로 향하는 관문은 고대 드워프 던전 내부에 있다. 프레이야가 말한 정보에 따르자면 그랬다. 둘 중 하나가 타락하더라도 남은 하나는 온전히 보존되기 위해 북부의 양 끝으로, 프레이야와 바나하임의 관문은 나뉘어 봉인되어 있었다.
바나하임엔 그녀의 에인헤랴르들이 있다. 폴크방의 전사들. 수천 년간 오직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창칼들이 그 아래에 잠들어 있다. 이 전쟁의 전황을 뒤집을 요긴한 수단이다.
“에인헤랴르··· 뭐 좋아. 그 신화가 사실이라 치자. 어쨌건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저 악마들을 무찌르게 두면 될 일이 아닌가?”
“아니, 놈들에게도 같은 수준의 전력이 있거든. 아직 이 북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전력이.”
에인헤랴르의 전사들 그 절반이 프레이야에게 충의를 맹세했다면. 다른 절반은 보탄에게 복종하고 있다. 발할라가 타락했고 에시르들이 사다르켈리사를 숭배하기 시작했다면 그 전사들은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옳다.
물질 세계를 감싼 장벽은 ‘균형’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어느 한 쪽의 무게추가 내려간다면 다른 한 쪽의 무게추가 더해지는 예민한 저울이다. 바나하임의 문이 열린다면 반드시 발할라의 문 또한 열릴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놈들이 좌시하지 않겠지.
‘그래. 발할라의 문을 억지로 찢어 열더라도 맞상대할 병력을 끌어 모으겠지.’
-그렇게, 에시르들을 이 세계로 불러 들인다라···. 훌륭하구나.
그렇다면 전황은 다시 평행선을 이룬다. 여전히 이쪽이 불리한 상태로 교착된 평행선이 북부를 가로지른다. 보라색 꽃들이 만개하자 붉은 꽃들 또한 따라 만개하며 북부 대륙의 요툰하임 지역을 온통 물들였다.
그리고 그 이남에 위치한 푸른 꽃들에게로 붉은 꽃이 가지를 그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교전을 의미하는 꽃망울이 남부 전역에 만개했다.
“이렇게 진행된다면 우리가 과도하게 불리하지 않겠어?”
“물론 그렇지. 요툰하임의 전력이 교착되고, 남부 전역에서 불리한 전투가 이어진다면 소모전 끝엔 멸망만 남겠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에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었다. 페르난데스는 단검을 뽑아 거침 없이 풀과 꽃망울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쭉 그었다.
“포위나 교착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지.”
붉은 장미밭 한 가운데로 일직선으로 나아간 단검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콰득, 하고 나무 테이블이 거칠게 긁혔다.
“발할라의 문이 열리고 보탄이 직접 나타나면, 우리가 이들을 요격할 거요.”
“적진 한 가운데로 말이야?”
“종심타격. 이단심문관의 전투는 언제나 그런 식이지.”
“미친 소리. 다들 뒤지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군. 차라리 남부 전장을 지원해. 그대들 남부인들의 무력은 악마 못지 않으니, 전선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할 거야.”
“전선은 무너져도 좋소.”
그곳에 피가 흐른다면. 그리고 혼란이 흐른다면. 페르난데스의 특기는 포위와 교착이 아니다.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는 그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
오로지 혼돈.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전황. 전선을 특정할 수 없는 얽히고 설킨 난상. 대전략이 무의미해지는 오직 혼돈 뿐인 전황이 그의 취향에 더 가까웠다.
포위가 아니다. 망치와 모루가 아니다. 창과, 창과, 창이다. 기나긴 전선, 비대한 적군. 산발적으로 흩어진 잠재적 아군들. 이들을 규합해 회전을 치루라고? 불가능할 뿐더러 시간마저 부족하다.
그러니 혼란 속으로. 최대한 더 깊은, 개미지옥과 같은 혼란 속으로!
“놈들은 하나의 전선에 시선을 고정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사방에서 소규모 교전이 끊임 없이 이어질 테니까. 적들은 요툰하임의 에인헤랴르가 우리의 유일한 변수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아니오. 그건 단 한 자루의 창일 뿐. 결코 우리의 모루가 아니오. 우리는 망치질을 하지 않소. 다만 찔러 들어가, 성가시게 만드는 것 뿐.”
“보탄을 잡으면··· 그래 신을 죽인다는 것이 대단히 우습긴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너희 남부인들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하자고. 그럼 너흰 적진 한 가운데에 고립된 암살자들에 불과해.”
“그땐 신과 악마와 인간의 피가 충분히 흐르겠지.”
에인헤랴르들이 서로 상잔하는 요툰하임의 전장. 인간과 인간이 투쟁하는 남부 해안선의 기나긴 전장.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이 직접 나서 타격하는 적진의 종심까지.
일반론적 관점과는 달리, 그의 대전략엔 허수와 실수가 공존하지 않는다. 버림패와 진의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전략관과는 결이 다른 전술이다.
모든 수가 진의이며 모든 착수가 곧 체스판 위의 메이트를 이룬다. 요툰하임의 전장에서 프레이야의 에인헤랴르가 승리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설령 시간을 버는 것에서 그들이 힘을 다하더라도 좋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으로 남부 지역의 패잔병들이 성공적으로 규합되고, 조직적인 저항에 성공하여 승기를 확보한다면? 전쟁은 끝난다. 그저 시선을 돌리고 적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정도로, 그리고 피해를 확대하는 정도로 저항이 마무리된다 한들 좋다.
그 뒤에 수, 페르난데스와 이단심문관들의 종심 타격. 그걸로 전쟁은 끝난다. 페르난데스는 단 하나의 수에 착수하지 않는다. 모든 수가 다음 수를 위한 포석인 동시에 곧 적의 숨통을 끊어낼 치명타인 셈이다.
그리고 사이로 흐를 수많은 피, 죽음, 제물과 희생이. 악마의, 신의, 인간의 피와 살점과 죽음과 영혼이 쌓아 올린 언덕 그 위로.
봉인된 사다르켈리사가 자신의 힘을 깎아내며 직접 현신할 수 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전황. 놈의 가장 강력한 꼭두각시인 에시르 신족들이 무너져 내린 그 투쟁의 언덕 위로 조급해진 놈의 현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걸로 그의 대전략은 종착을 맞이한다. 수많은, 치명적인 메이트들은 그 한 순간을 위한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내건 착수는 그 순간, 대악마의 목젖을 물어 뜯는 체크메이트가 된다.
발할라로 향하는 관문이 열리리라. 그리고 발할라엔 사다르켈리사의 영향력이 짙게 깔려 있다. 이 뜻은 곧 사다르켈리사의 봉인지로 향하는 관문이 그 안 어딘가에 통해 있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좋다. 뭄토를 잡은 방식과 거의 동일한 전략이 가능해진다. 봉인된 상태에서 놈의 힘을 최대한 깎아내고, 놈의 본신을 직접 타격하기 위함이다.
-콰드득.
페르난데스가 박아 넣은 단검이 비틀리며 시끄러운 마찰음을 냈다. 아에렌은 사납게 이글거리는 그 음울한 푸른 눈에 압도되고 있었다.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하시오. 우리가 놈들의 뿌리를 끊어내는 단검이 될 테니.”
“후···.”
아에렌은 잠시 페르난데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서로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치밀한 시선 교환 끝에, 아에렌은 하, 하고 웃었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오직 영광만 영원할 뿐. 아에렌이 그렇게 말하자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설령 대악마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