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79화 (180/388)

179. 별을 헤아리다.

*

-바스락.

우거진 침엽수림, 간 밤의 눈이 소복이 내려 앉은 설산에 하얀 망토를 두른 사내들이 발걸음을 죽이며 걷고 있었다. 이들은 신경질적으로 예민하게 소음이 새어 나가는 것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었다.

-까악, 깍.

까마귀가 운다. 예로부터 전사들에게 까마귀란 보탄의 전령과 동치로 여겨지는 상서로운 짐승이었다. 좋은 징조다. 선두의 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도끼에 눈을 쓸어 묻혀 반사광을 최대한 죽이며, 사내는 천천히 도끼를 들어 올렸다. 수풀 너머 저 멀리 오두막 몇 채가 보였다.

“셋을 세고 돌입한다.”

“예. 대장.”

오두막을 중심으로 벌목된 나무 밑동이 드러나 있었다. 오두막은 깨끗하게 정리 되어 있고, 눈이 덮인 것을 제외한다면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저 건물은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나.”

그리고 이 추적 자체가 대단히 치밀한 범위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하자트 데반의 생존자들이 도주할 수 있는, 이들이 선택할 모든 경로들을 역추적해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따라서 하자트 카잘의 전사는 오늘 영광스러운 살육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 셋. 돌입.”

“사다르켈리사를 위하여!!”

“보탄을 위하여! 죽어라, 패배자들아!!”

수풀 속에 잠복해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치켜들며 달려 나갔다. 당황한 적들이 혼비백산하며 튀어나오고, 피와 살점이 흩어지는 광경이 이어지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투척 도끼와 단검들이 오두막의 창을 시끄럽게 깨부수며 내부에 틀어 박히고, 기름 먹인 불화살이 오두막 지붕을 파고드는 이 긴박한 순간에도 이 근방엔 침묵 뿐이었다.

“문을 뜯어내라!!”

전사는 어금니를 깨물며 소리쳤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없었다! 여길 제외하면 놈들이 갈 수 있는 은신처 자체가 없었다. 숨기에 적합한 다른 지역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들 뿐이었다.

단순한 소거법이었다. 은신하기 수월하고, 도주하기 수월하며, 인근 야생에 생활 자원이 풍족하여 수 개월 이상 버티어 낼 수 있는 은신처. 전사는 씨족 안에서도 머리 좋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고, 이번 작전은 실패할 리가 없는 간단한 잡무에 불과했다.

-우직, 쾅!

전사들이 양손 도끼로 문을 찍어내고, 마침내 내부가 드러났다. 깨지고 부서진 가구들과 그 사이를 파고 든 투척도끼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제기랄!”

-쾅!

전사는 신경질적으로 근방의 나무 밑동을 후려 갈겼다. 눈이 푸스스 떨어져 전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제기랄, 또! 또!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이!!”

냉정하게 이 오두막 내부의 생활 흔적들을 수색하거나, 근처에 반드시 있을 흔적들을 추적해야 했으나 전사는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 며칠 간의 피로한 추적 뿐만 아니라 그 추적의 결과물이 모조리 이 모양이었다.

총 일곱 번의 급습이 있었고, 일곱 번을 모두 실패했다. 전사는 눈더미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야를께 죽겠군 나는.”

그 전사의 머리 위. 거대하고 울창한 침엽수의 나뭇가지에. 자그마한 겨우살이가 고개를 내밀고 꽃망울을 틔고 있었다.

*

-퐁!

하얀 안개꽃 사이로 붉은 장미가 튀어나왔다. 프레이야는 눈을 감고 정좌한 채로 꽃이 만개한 테이블 너머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자트 데반 총 342명. 전투 수행 가능 인원은 127명. 3일 후 합류 예정이다.”

350명 남짓의 피난민 중 절반 이상이 전쟁에 투입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비율 자체가 북부인들의 호전성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키르하스는 기존에 체득하고 있던 전력 계산에 유쾌한 혼동을 느끼고 있었다.

천 년 이상, 어쩌면 거의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아시르 신족은 북부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투사했다. 숭무 정신 이상의, 거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편집증적인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모든 인원의 상시 전력화. 강자존 문화. 전사를 숭상하는 종교관까지. 비록 그 시작은 악마에 대항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이야 어쨌건. 북부인들은 설령 농부라 하더라도,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아낙이라 하더라도 당장 병장기를 쥐여주면 정예병에 준하는 전력이 된다.

그녀는 빠르게 지도의 다른 지역을 바라보았다. 개나리가 피어 있는 노란 점들은 곧 잠재적인 아군이다. 하자트 카잘의 학살 전쟁을 피해 도망친 패잔병과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지역들이 이 남부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퐁!

새파란 붓꽃 한 송이가 개나리와 합류한다. 곧 개나리와 붓꽃이 동시에 사그라들고, 안개꽃이 그 자리에 만개했다. 아군이 다른 피난민과 접촉해 합류를 시도한다는 뜻이었다.

-꾸드득.

거대한 테이블 위에 만개한 꽃잔디들은 매 순간 다른 꽃들로 변하고 있었다. 붓꽃, 설앵초, 국화, 황매화, 양지꽃, 고들빼기. 코스모스, 능초화, 범꼬리, 설앵초···. 오색 창연한 꽃망울들이 만개하고, 시들고, 다시 피어나며 온갖 향취가 피어올라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잎새와 가지들, 시든 꽃들을 그 지반으로 삼아 디디고 새로이 피어 오르는 꽃망울들이 뒤섞인 이 지도를, 신이 바라보는 북부의 전역을···.

‘은공···.”

테이블 위에서 음울한 청색 매발톱이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지도상에 그 움직임이 잡히고 있다는 것은, 축척을 고려했을 때 말도 안되는 고속 기동 중이라는 의미였다.

아군을 의미하는 푸른 꽃더미 중에서,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짙푸른 색을 지닌 군청색 매발톱. 페르난데스를 뜻하는 꽃이다.

‘무탈하소서.’

지도의 정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붉은 꽃무덤의 너머로 끊임 없이 북상하고 있을 그녀의 주인에게로, 키르하스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눈을 떴다. 이따금씩 페르난데스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

“아르네. 전사 열둘을 이끌고 장애물에 상관 없이 직진하여 동쪽으로 이틀, 일곱 번째 만나는 구릉지를 기준으로 북쪽 능선의 계곡을 수색하여 피난민을 구출하고 본대와 합류하라. 반드시 남쪽 능선을 타고 하루간 직진한 후에 본대 방향으로 꺾어 와야 한다.”

“예, 사령관님.”

그녀의 등 뒤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전사 하나가 통역병의 말을 전해 듣고는 꾸벅 인사하고 떠났다. 키르하스는 굳이 등을 돌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다.

다음, 다음. 그리고 다음. 페르난데스가 멈춰 서지 않는 이상, 그녀 또한 멈춰 서지 않을 기세로. 숙식을 이 자리, 지도 앞에서 해결해가며 오직 명령을.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질 명령을.

페르난데스가 떠나기 전에 했던 주문은, 최대한 적은 손실로 최대한 많은 아군을 확보하라. 오직 그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가 전날 밤에 해주었던 말.

‘너를 믿는다.’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을 쓰다듬던 그의 따듯한 손길에 보답하기 위하여. 키르하스는 지도를 바라보며 명령을 이어갔다.

*

나무 위에서,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이틀 내리 전력으로 질주하며 또한 동시에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디모니카에게도 녹록한 행군이 아니었다.

하물며 일반인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에겐 가혹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쌔근거리는 아벨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한 이후의 백래시를 고려한다면 아벨은 최고의 동행인이다. 루네글리프의 사용은 신경을 불태우고, 사용 이후에 직접적인 교전에서 크게 무력화되는 그의 입장에서. 마법이나 기타 다른 수단의 보조보다는 확실한 무력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검술과 백병전에서 디모니카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는 아벨을 결코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용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일반인 수준의 근지구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괜찮소?”

“낭만··· 후, 미안하다. 숨이 조금 차는구나. 으음. 낭만적이지 않느냐?”

아벨은 굵은 나뭇가지에 기대어 앉은 채로 숨을 고르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무성한 침엽수림, 나무와 나무 위를 타고 달리는 끔찍한 행군은 단순한 근력과 지구력 뿐만 아니라, 눈에 젖은 나무 등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낭만?”

“그래. 공기가 차고, 숲이 맑구나. 불을 품고 있을 시절이라면 모르되 지금이라면 이 풍광을 있는 그대로···. 아니. 너희 인간들의 시선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감각···. 이것이 네가 바라보는 세상인 바.”

아벨은 흐읍, 하고 기지개를 켰다. 곧게 선 허리가 파르르 떨리며 근육이 풀어졌다.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같은 공기를 맛보며, 같은 기억을 남긴다. 페르난데스. 나는 이 순간이 더 없이 낭만적이라 여겨지는구나. 너도 그러하느냐?”

페르난데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녀는 언제나 직설적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고아함을 잃지 않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쉽게, 함부로 대답하는 것은 바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프레이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가 말하기를 ‘가장 사랑하는 이의 외모’. 그건 아리아의 얼굴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느꼈던 분노와 회한은 단순한 기억에 그치지 않았다.

대황야, 뭄토의 환각 속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그저 환상이나, 또는 왜곡된 기억과 경험이라 부를 수 없는 순간들이다. 그 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아벨에 대한 추억이었으나···.

설령 그것이 환상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그의 전생, 그 기억을 토대로 구축한 환각에 불과하더라도···. 세상을 그려낸 명공의 화폭이 단순한 현실의 모사이겠는가.

페이자쉬는 그에게 ‘더 이상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확언했지만. 그럼에도 전생은 그의 근간이며 또한 토대였다. 그는 과거를 부정할 수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후회가 그의 동력이며, 회한이 그의 명분이었으므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겠구나.”

아벨은 따듯하게 웃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슬픈 기색을 담고 있는 것처럼도, 그리고 오히려 기쁨에 반짝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상반된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이 아닌 한 여자를 생각하는 사내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그리고 그 순수함과 애절함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곧 그의 진솔함을 의미하기에 기쁨을.

“네 생각과 사고를 나의 색으로 덧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페르난데스. 너에게 오직 나만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구나.”

용은 장생족이며, 생물보다 정물에 더 가깝다. 먼 고대에 용들은 자연의 풍경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존재였다. 그들은 삶의 희로애락에 반짝이는 필멸자들과 다른 시선,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인간들은 장생족 특유의 느긋함이라 표현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용들은 다만 자신의 감정을 더욱 깊게, 더 진하게 우려내며 곱씹는 종족이다.

“밤하늘이 아름답구나.”

“···그렇군.”

아벨은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밤하늘의 한 귀퉁이를 짚었다. 멀지 않은 과거, 황무지의 밤에 그녀가 일러 주었던 별자리를 향해서.

아벨레사스 자리. 그녀는 황금색 별과 푸른 별이 아름답게 꾸며진 긴 선을 손가락으로 그어냈다.

“별이 많구나. 그것 아느냐? 북방의 별자리는 대륙의 별자리와 위치가 다르다.”

“알고 있소. 위도에 따라 천구의 형상이 달라지지.”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만···. 너는 이따금 너무나 낭만이 없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아벨은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고 밤하늘 위로 덧칠하듯 흔들었다.

“어느 먼 옛날에,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북부에 오를수록 내가 모르는 별들이 더 많고. 남부로 내려가면 또한 그럴 것인즉. 저 밤하늘엔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별들이 있겠는가. 또,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별자리들이 그려지겠는가.”

아벨의 머리칼이 흘러내려 뺨을 감쌌다. 그녀는 슬며시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밀밭 같은 머리가 밤바람에 흔들리고,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너는 아는 것이 많으니, 혹시 말해줄 수 있느냐?”

“···셀 수 없지.”

현대천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아니. 근미래의 천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많다. 마법이 발달했던 페이자쉬의 시절엔 육안보다 뛰어난 관측 도구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수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준이라는 것을 페르난데스는 알고 있었다. 한 점으로 보이는 별이 사실 들여다보면 세 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경우도 있었고, 작은 먼지구름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다른 대답을 하려 할 때, 아벨의 손가락이 그의 귀밑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마음속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사적인 감정에 쏟을 시간이 없다는 점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 저 밤하늘 단 한 폭 별들의 수, 그 절반 정도만. 아니, 그조차도 너무 많다면 그 반절이라도······.”

또는, 그 반절의 반 뿐만이라도 좋으니.

“다만 그 정도로만이라도 나를 생각해다오.”

“아벨···.”

“대답은 듣지 않겠다. 나쁜 녀석. 난 처음이었고, 그걸 당당하게 빼앗아간 사내에게 내가 이런 말을 먼저 꺼내야겠느냐.”

아벨은 눈을 돌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차양처럼 흩어졌다. 디모니카 특유의 동체시력이 머리칼 사이에서 반짝이는 눈물 방울을 포착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단어를 고르다보니 이미 대답하기엔 때가 늦은 기분이었다.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그건 거북하거나 불편한 종류의 침묵이 아닌, 한밤의 달콤한 꿈결 같은 고요함이었다.

밤이 깊고, 유성 하나가 긴 선을 그리며 밤하늘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북부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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