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막간 : 위기는 기회다
*
“죽여라.”
“야를, 야를!! 기, 기회를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한 번만 더···.”
깊고 검은 밤. 서늘한 눈송이가 드문드문 내려 앉는 밤이었다. 무릎을 꿇은 전사가 눈물을 흘리며 이마를 눈 덮인 대지에 처박았다. 제발, 제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쉿.”
그의 앞으로 어린 소년이 걸어왔다. 검은 망토가 바닥에 길게 끌렸다. 하얗고 어린 피부 위엔 검은 거미줄 같은 흉터가 가득하다. 소년은 자신의 머리 만한 큼직한 도끼를 한 손으로 빙글 돌려 들었다.
“베산. 내가 네게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면, 말해 보거라. 어째서냐?”
“야를···. 저는 선대 야를때부터 오로지 충심으로 당신의 가문을 섬겨 왔습니다.”
“인정은 네 무능함에 대한 변명 치곤 너무나 하찮구나. 나는 네게 또 기회를 주었었다. 네 실패를 변호할 기회를.”
-스르릉.
도끼가 달빛을 머금고 서늘하게 빛났다. 소년은 메마른 눈으로 자신의 눈 앞에 무릎 꿇은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내려 찍을 기세로, 그러나 그대로 멈춰 선 채로 마치 덤벼 보라는 듯이.
“개자식.”
전사는 어금니를 뿌득 갈며 중얼거렸다.
“내 충의의 대가가 고작, 고작 이런 것이었나! 이 배신자! 넌, 넌 인간을 배신했어!”
전사는 벌떡 일어서며 품 속에서 단검을 뽑아 쥐었다. 출수와 동시에 일격. 단검이 섬광처럼 내달려 소년의 목젖으로 쏘아진다. 소년의 키가 작았기에, 급습은 놀랍도록 신속했다.
-챙!
그러나 첫 수에 칼날이 반으로 조각난다.
-서겅.
단검의 칼날이 허공에 튕겨 나가기도 전에. 사내의 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팔이 잘려나가고.
-후우웅—. 콰직.
그 원심력 그대로 빙글 돌아 마침내 사내의 머리까지. 뱀이 똬리를 틀 듯 회전하던 도끼가 사내의 목과 머리를 잘라내었다. 세 번의 동작을 단 한 차례의 출수로 이루어낸 소년은 도끼를 한 바퀴 돌려 도끼날의 피를 털어내고는 허리춤에 찼다.
“치워라.”
어깨 위로 신체 기관을 잃어버린 사내가 힘 없이 허물어지자, 그 뒤에 서 있던 전사들이 묵묵히 사내의 다리를 잡으며 끌고 나갔다. 핏자국이 눈밭 위로 긴 선을 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등 위에 박혀 있는 단검 파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뽑아서 떨어트렸다.
“처형이 아니라 결투였으니, 녀석의 혼이 발할라에 닿았겠지. 그것이 네 충의의 보답이다.”
소년은 휙 등을 돌려 걸어갔다. 검은 망토가 바닥을 끌며 하얀 눈 덮인 대지를 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사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속삭였다. ‘에리크’. ‘위대한 야를’. ‘북부의 왕’···.
칠흑의 에리크. 그의 존재감이 옅어질 때 까지 전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
에리크가 자신의 막사로 돌아오자 하인들이 동시에 다가와 그의 옷가지를 벗기고 따듯하게 적신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았다. 그의 작은 몸은 흉터와 딱지 앉은 상흔으로 가득했기에, 시녀들의 손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한 시녀가 아직 피가 흐르는 그의 손등을 건드렸다. 에리크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시녀는 창백하게 질리며 바닥에 낮게 엎드렸다.
“요, 용서를!!”
“되었다.”
에리크는 덜덜 떠는 시녀의 손에서 젖은 수건을 들어 올려 상처 위를 대충 닦아냈다. 피가 멎고, 순식간에 딱지가 차올랐다. 또 다른 흉터가 생기겠군. 에리크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녀에게 다시 수건을 돌려 주었다.
“물러나거라. 쉬고 싶다.”
“예, 예!”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안개가 모이는 것처럼 한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마음씨가 곱군. 에리크.”
“발두르.”
“하하, 굳이 그랬어야 했나? 응? 나는 네 그 자그마한 몸에 상처가 늘 때 마다 가슴이 아파. 내 대전사. 어차피 심장이 찢긴들 네가 죽지 않을 텐데 말이야.”
발두르의 축복은 ‘무결’. 결점 없이 빛나는 삶, 곧 제왕의 삶이다. 그 축복을 입고 있는 에리크로서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었다.
먼 옛날 발두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대 여신 프리그는 그의 완벽한 자태를 칭송하기 위해 물질 세계의 어떤 존재에게도 상처 입지 않을 축복을 내렸다. ‘무결’은 그 축복의 마이너카피, 물질 세계의 존재에겐 죽임 당하지 않을 축복이다.
그러니, 에리크가 했던 일은 발두르의 관점에선 하등 쓸모 없는 짓이다. 우스운 군상극, 허탈한 꼭두각시 놀음에 불과하다.
“오직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쯧. 필멸자들이란.”
그러나 신들의 축복과 저주는 동의어다. 죽음에 대한 위협이 없다는 뜻은, 오히려 삶을 누리는 감각을 거세당한다는 뜻과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에리크는 오직 상처를 입을 때에만 자신의 삶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발두르는 흉터가 조밀하게 모여 마치 살점이 뜯겨 나간 것 같은 에리크의 왼쪽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 있을 심장 또한 그보다 적지 않은 흉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불쾌했다. ‘완벽’의 신이 직접 가호하는 대전사는 그 외형마저 완전무결해야 옳았다. 발두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가운을 걸치는 에리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섭섭하군. 내 대전사를 만나기 위해 내가 용건이 있어야만 하나?”
“적어도 넌 그래야지.”
에리크의 말에 발두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에리크를 압박했다. 에리크는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그런 발두르의 분노를 마주했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발두르는 제풀에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최근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알아서 잘.”
“그래 그래. 알아서 잘 하시겠지. 성공한 작전이 없겠지? 응? 고작해야 패잔병들, 심지어 제 다친 가족들까지 부양하는 비루한 부족의 비루한 족속들을 찾아 죽이는 것조차도 말이야. 하하!”
발두르가 비꼬듯 말하자 에리크의 표정이 차츰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발두르가 낄낄거렸다.
“당연히 그랬겠지. 바나디스가 개입했으니.”
“···바나디스?”
“그래, 우리 귀여운 사촌누이. 난쟁이들의 창녀, 더러운 교잡종···. 프레이야 바나디스. 그 계집이 깨어났다.”
“우리가 놓친 지하 무덤 중 하나였겠군. 시간이 들더라도 하나씩 뚜껑을 따 볼걸 그랬어.”
“뭐, 그땐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지금은 아니지. 오히려 시간이 부족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그 계집일 터.”
발두르는 시시덕거리며 에리크에게 다가갔다.
“네 부족에서, 너보다 어린 모든 생명을 죽여라.”
“···이유는?”
“바나디스의 권능은 ‘새 생명의 숨결’이야. 그 계집이 작심하고 훼방을 놓기 시작한다면 어린 꼬마들이 있는 모든 지역은 그 계집의 시야 안에 들어온다. 그러니, 모든 어린 필멸자들을 죽여. 어차피 대체품들은 수 없이 많잖나?”
“반발이 적지 않을 거다. 부족 전사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어.”
“하, 이제와서? 제 놈들이 반발해서 어쩌자고? 그리고 그 버러지들은 이제 쓸모가 다 했어. 반항하면···. 뭐, 늘 하던 대로 하지.”
늘 하던 대로···. 에리크는 입 안을 가시처럼 굴러다니는 그 단어를 삼켰다. 반역자들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함의가 그의 목젖에 묵직하게 걸렸다.
“그런 권능을 가진 존재가 놈들에게 합류했다면···. 놈들에게도 구심점이 있단 뜻이군.”
그저 운이 억세게 좋아서 추적을 피했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그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게 돕는 모종의 집단이 암약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부서졌던 씨족들 중 하나일 것이다.
“오, 훌륭해. 그렇지 그런 뜻이겠지.”
“그리고 단순히 더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겠고.”
“그 말도 맞겠지. 바나디스는 아무런 대책 없는 선인이 아니야. 그 계집은 오랜 시간 라그나로크를 대비해 왔지. 그 계집의 알량한 대의는 고작 피난민을 구휼하는 것 따위가 아닐 거야.”
발두르는 에리크의 짧게 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네 부족 전사들을 자극해. 놈들이 널 배신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배신자들을 모조리, 모조리 죽여버려. 더 많은 피가 흐르도록···.”
“무슨 말이지?”
“바나디스가 떠나기 전, 그 계집의 휘하엔 에인헤랴르의 절반이 있었어. 행적이 묘연해진 빌어먹을 군단이 있었다고. 이 북부 어딘가, 아마도 우리가 놓쳤을 지하 무덤 중엔 놈들의 영역으로 가는 관문이 있을 것이고··· 바나디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그 문을 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사들을 풀어 무덤들을 다시 수색하게 해야겠군.”
“아니, 그게 아니지. 꼬마야.”
발두르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놈들이 의기양양하게 해야지. 우리가 함정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여기게. 함정을 더 깊게 파라고 해야지. 명심해. 함정이란 건 위협이고, 기회야. 함정을 파고 우리를 상대하려면 놈들의 모든 힘과 역량이 그곳에 집중 될 테니까. 그것만 치우면 이 지루한 전쟁이 끝난다.”
기실 직접적인 회전이나 대규모 교전은 전쟁 초기 이래로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도주하는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나, 흩어진 피난민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단순히 무력으로 이 북부를 통일하자면, 에리크의 군단은 전력 과잉이다. 씨족 전사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제물로 바쳐 현계시킨 악마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으니.
“내 전사들의 배신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지? 그 여신이 자기 군단을 소환한다면 회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의 병정들로 에인헤랴르를 막겠다고? 재밌는 농담이군, 하하하. 에인헤랴르는 오직 에인헤랴르로 막아내야 하고, 에인헤랴르의 남은 절반은 발할라에 있지. 그리고 발할라의 문은 언제나 전사들의 죽음에만 열리는 법이니···.”
내 대전사야. 너의 전사들을 전장에서 몰살시켜서 발할라로 향할 문을 열거라. 타락한 신이 에리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하여 배신할 엄두도 내지 못할 꼭두각시들을 제외하고, 죽은 모든 전사들의 핏물 위로 발할라의 문이 열릴 것이며. 에인헤랴르가 지상에 내려와 전쟁을 준비하고, 기나긴 핌불베르트(Fimbulvert ; 신들의 겨울)가 끝나고, 마침내 대지가 불타며, 늑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요. 바다가 증발하고 구름이 불타는 세계 위로···. 요르문간드가 내려오리라.”
고대의 주술사가 광기 속에서 예언을 읊듯이, 발두르는 천천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리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신들의 운명, 라그나로크···.
“그리하여 대지가 무너지고 하늘이 어그러지는 그 시대가 끝나면, 퇴비가 된 옛 폐허 위로 새로운 시대가 잉태되리니, 나 발두르. 약속된 왕이 그 세계의 오롯한 지배자가 되리라. 애송이 에리크. 이 파멸이 두려우냐?”
발두르는 뱀이 쉿쉿거리는 것처럼 속삭였다. 에리크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발두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에리크의 검은 눈이 불길에 휩싸인 대지처럼 이글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발두르는 하얗게 웃음 지었다.
*
[개짓거리를 시작했군. 발두르.]
지휘부 막사 안에서 정좌한 채로 눈을 감고 있던 프레이야가 문득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닷새간 거의 눈도 붙이지 않고 전황을 조율하던 키르하스가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사촌이 나의 존재를 눈치 챘다. 여전히 빌어먹게 간사한 개자식이야.]
“타락한 에시르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깨끗한 척은 혼자 다 떨던 고까운 위선자 말이다. 아이야. 이 몸, 위대하신 바시르 프레이야께 감히 ‘교잡종’이라 불렀던 재수 없는 자식이 하나 있단다.]
프레이야는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굳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놈이 나를 눈치 챘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그 놈이라면 저지를 법한 끔찍한 짓을 벌이고 있구나. 막고 싶지만,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니 서둘러야겠다.]
“무슨 뜻이신지요?”
[그 자식이 놈들의 군단 인근의 모든 어린 생명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내 눈을 피하려는 얕은 수작이지만···.]
“놈들의 사기가 바닥을 쳤겠군요. 어쩌면 내분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말이 맞다.]
프레이야는 자신이 펼쳐낸 화원을 내려보았다. 꽃으로 표현된 북부의 지도를 바라보며, 프레이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새 생명의 여신. 그녀는 모성과 자비의 관념을 상징하는 여신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린 아이의 죽음은 언제나 고통으로 남았다. 그녀는 가슴어림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까딱였다. 지도의 붉은 꽃들이 파르르 떨며 까맣게 죽어갔다.
[이 몸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 중에 분명 내분이 있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저기. 놈들의 비대해진 전선에 균열이 생겼구나. 내전이 일어났다.]
“그건··· 기회로군요.”
[서둘러야 한다. 놈이 내전을 완전히 다스리면 발할라의 문이 열릴 거야. 페르난데스가 바시르의 관문을 열어 나의 군단을 이끌고 올 때 까지,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은 가장 귀중한 전략 자원이다. 바시르의 에인헤랴르는 본디 피난민들을 규합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고안된 작전이었지만, 모든 전황이 작전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법 위협적인 변수였지만 키르하스와 같은, 어떤 종류의 경지에 닿아 있는 야전사령관들에겐 위협이란 동시에 기회다.
키르하스의 눈이 밝게 빛났다. 프레이야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하스는 자신의 뒤에 시립한 전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야를을 불러라. 개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