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잠입과 돌파의 경계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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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낮게 숙이고, 나뭇가지 아래로 북부군의 야영지를 내려보고 있었다.
북부인들은 체계화된 군단 편제를 이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역사상 이들의 전투는 씨족 중심의 부락 단위 전투, 또는 수 개의 씨족이 연합한 공동체 간의 전투였으므로. ‘야영지’라는 것은 같은 씨족의 전사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의미했다.
대단히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전사들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차출해서 한 공간에 밀어 넣고도, 이들 사이에 분쟁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같은 씨족의 전사들만으로 전투 단위를 만들어내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이들은 지도자의 말보다, 씨족 원로들의 말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야영지 간의 알력 싸움은 있을 수 있어도, 야영지 내부의 내분은 거의 불가능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야영지에 대치하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사소한 이웃간의 분쟁이라기엔 살기 어린 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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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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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순 없습니다.’”
선두의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것을 또렷하게 노려보며, 페르난데스의 입에서 같은 단어가 흘러 나왔다. 겨울철, 그가 바라보는 사내의 입모양, 코와 입에서 나오는 입김의 강도, 사내의 제스처와 목젖의 움직임까지.
디모니카의 순간인지능력과 시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디모니카는 군신이 직접 벼린 칼날, 오로지 전투를, 인간보다 압도적인 존재를 적으로 상정한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기능성의 총화다.
인류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의 극의, 인간의 형상을 띈 무력의 상징. 디모니카의 축복 과정을 견디어내고, 그 스스로의 영자를 군신의 신성으로 채워 넣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그 위로, 페르난데스의 사고가 덧씌워 진다면. 매의 눈으로 사람의 언어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는 이목구비가 간신히 보일 거리에서, 놀랍도록 정교한 독순술을 펼치고 있었다.
빠르게, 동체가 그 옆에 서 있는 노인에게 향한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덩치 큰 노인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중년 사내에게 맞서 소리치치고 있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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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다 같이 죽자, 이 소리더냐?”
“제기랄, 빌어먹을. 우리 손으로? 결단코 그럴 순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리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우릴 도살할 것이야! 이 어리석은 놈. 자식은, 자식은 다시 낳으면 되지 않느냐!”
“개소리 집어쳐!”
사내가 버럭 소리지르며 노인의 멱살을 틀어 쥐고 들어 올렸다. 노인은 컥, 하는 숨막힌 소리를 냈다. 노인의 등 뒤에 서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그에 맞서 사내의 등 뒤에 선 전사들 또한 무기를 집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내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우리가 카잘리드 그 개자식들에게 투항한 이유는 단 하나요. 우리가 싸우다 뒤질 걸 두려워해서 항복했나? 아니! 우리는 그냥, 그저 이 난리통에 우리 피붙이나마 살려 보자고 투항했던 거였소!”
“모두, 모두 죽이자는 건 아니었어. 커흑. 이, 이놈아. 나, 나라고 좋아서 그런 소릴 듣고 여기에 온 줄 아느냐?”
노인의 말에 사내가 침을 퉤 뱉고는 노인의 멱살을 놓았다. 노인이 컥컥이는 소리와 함께 몸을 옹송그리자, 이를 내려보며 사내가 도끼를 꺼내 들었다. 노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사내를 올려보며 말했다.
“지금 참지 못하면··· 지금 헛짓거리 하면 우리 씨족 모두가 뒤진다. 바레인. 정신, 정신 차려. 이 멍청한 것아···. 너는, 너는 다음 야를이 되어야 하는 사내다.”
“아이들을 죄 죽이고 그 위에 야를이 된 들 무슨 소용이 있소? 부끄러운 줄 아시오! 다들! 너희, 이 머저리들아! 사내란 것들이 제 자식을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그냥 돌아와?”
“그 자리에서!!”
노인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질렀다.
“그 자리에서! 그 개자식의 말에 저항했던 씨족은···. 본, 본보기라며 목이 잘렸다. 얼마나··· 얼마나 죽었을 것 같나? 응? 절반! 놈에게 항복했던 씨족의 원로들 절반이 그 자리에서 죽었어!”
“같이 죽었어야지! 제 씨족의 아이들을 제 손으로 죽이겠노라 맹세하고 돌아오는 대신! 선조들의 낯에 오물을 쏟아 붓기 전에 차라리 죽었어야지!”
“나라고 그러기 싫었다더냐!”
노인은 곧 허리를 폈다. 겉보이는 나이에 불구하고 장대한 체구, 노인이 젊을 적 얼마나 뛰어난 전사였을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허릿춤에서 한손 도끼를 꺼내 들며 외쳤다.
“차라리 싸우다 죽고 싶었다! 그러면 명예롭기라도 했겠지! 이 늙은 나이까지 살아 허덕이는 대신, 위대하게 죽었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 머저리야. 이 머리만 굵은 철부지야···.”
노인은 곧 도끼를 늘어트리며 슬프게 속삭였다.
“에리크는···. 저항한 씨족의 원로들을 죽이고는 말했다. ‘윗물이 더러우면 아랫물도 더러운 법.’ 무슨 뜻이겠느냐···? 그 원로들이 포함된 씨족 전체를 몰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차라리 죽겠소. 싸우다 죽겠어! 카잘리드가 큰 씨족이긴 해. 놈들은 심지어 악마도 부리지! 하지만 절반이라고? 절반이나 되는 씨족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고도 놈들이 여전히 강맹할까 싶소?”
사내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카잘리드가 제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하자트 카잘의 군단은 에리크가 거느린 군단의 절반이 채 되지 못했다.
남은 병력은 개전 초기에 하자트 카잘에 기꺼이 투항했던 근방 약소 부족들 뿐. 전쟁이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나, 들불처럼 군단을 산개한 탓에 군단과 군단 사이의 연계는 약했고, 곳곳에서 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기나긴 전선을 유지할 가닥이 없었다.
그 틈을 노려야 한다. 듣자 하니 최근 저항 세력들이 결집하고 있다 했다. 그쪽에 붙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일단 아이와 여자들을 피신시키고···..
[내가 왜 필멸자들을 좋아하는 지 아나?]
장내의 전사들이 일제히, 움찔 떨며 굳었다. 노인도, 중년 사내도, 그들을 둘러싸고 소리지르던 다른 사내들까지도.
사내들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야영지의 경계, 목책을 대충 둘러 쌓은 경계를 바라보았다.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어둠이 그 근방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림자가 뭉친 것 같은 어둠 따위가 아니다. 햇빛이 흐려지고, 안개가 둘러싸는 것처럼 인지가 왜곡되는 감각에, 사내들이 몸서리쳤다. 자주색과 노란색, 또는 푸른색을 띄는. 오염된 강물 위를 떠다니는 기름처럼 공기가 반짝이며 산란했다.
그 사이로, 시체처럼 창백한 사내가 목책 위에 앉아서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아나? 너희가 먹는 간식거리랑 비슷한 거야. 왜 그 곡물과 과일 같은걸 말려서 굳힌 것 말이야. 달큰하게 바스라지는 촉감이 너무 좋아. 희망이라는 건.]
창백한 사내가 킬킬 웃었다. 입술이 귀 밑까지 쭉 찢어지고, 그 사이에서 면도날 같은 이빨이 반짝였다. 놈의 숨결에서 색채가 바스라지며 흩어졌다.
“악···마···.”
[그렇게 부르는 놈들도 있지. 발두르는 뭐, 이럴 경우 모조리 죽이라 했지만···. 그건 재미가 떨어지잖아. 그러니 안심해, 필멸자들아. 나는 그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악마는 턱짓으로 창백하게 질려 두려움에 떠는 노인을 가리켰다.
[날 봤지, 늙은이?]
“저, 저 자식이다. 바레인, 저 녀석이야. 저항하는 원로들과 전사들을 저 녀석과 같은 놈들이 모조리 학살했다.”
노인은 침을 삼키며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악마가 킬킬거렸다.
[걱정하지 말래도. 자, 하던 것을 계속 해 보거라. 희망을 가져! 너희 필멸자들이 잘 하던 짓 아닌가. 기왕이면 서로 물어 뜯어 주었으면 하는데. 어디, 이렇게 말하면 희망이 좀 생기나?]
악마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는 전사들을 내려보았다.
[마지막 한 놈은 살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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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놈이로군.
페이자쉬는 큭, 하며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표정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멈춰 서서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제 놈들이 저들끼리 신경쓰고 있다면 돌파하는 데에 문제가 없겠어.
이 지역은 에리크의 긴 전선을 관통해 올라가는 길목 중 하나였다. 사방을 감시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위치에, 심지어 맑은 대기까지 더해진 탓에 페르난데스는 밤이 찾아올 때 까지 사태를 관망하려 했다.
그러나 예상 외의 내분, 이 길목을 건너기에 너무나 적합한 순간이다. 그의 존재가 드러나면 대전략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위협 탓에 며칠간 나무 위에서만 생활했던 그에게, 지금은 천금과 같은 기회였다.
‘잠시만.’
-쯧.
페이자쉬는 페르난데스의 망설임을 느끼며 혀를 찼다. 페르난데스의 왼팔이 꿈틀거리며 대검 손잡이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여간, 머리가 너무 뜨겁다. 페이자쉬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속삭였다.
-놈들의 사이에 내전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나? 지금 저런 상황이 단지 여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야. 세상은 언제나 지옥이었어. 페르난데스, 지옥 위에 흔한 비극 한 줄 더 쓰여지는 것 뿐이야.
‘사실 지킬 생각 없는 약속이긴 했어. 지킬 필요도 없고, 맹세를 올렸던 대상조차 이젠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
갑작스럽게, 페르난데스가 다른 말을 꺼냈다. 페이자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내려보았다. 페르난데스는 못박힌 듯 전사들과 악마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날, 알트베르트에서 말이야. 그 지하에서, 다인 왕에게 서임을 받던 순간. 기억 하나?’
-···그래.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인 왕의 기억을 봤어. 죽음을 통해 그의 기억과 광기를 나누어 갖으며 영체를 이었지. 그 덕에 다인 왕이 이성을 되찾고 쓰러졌지만···. 내 몸엔 아직 그 시절의 기억들이 떠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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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슬픔을 감내할 수는 없더라도, 홀로 되어 주저 앉는 이는 없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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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 아래 쓰러진 거인의 눈을 감겨주며 그가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그 거인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형제와 백성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하기 이전에 거인의 삶을 연민했다.
혼자 되어 세상을 떠돌며 타인의 멸시와 증오만을 삼켜야 했던 거인의 삶을. 당시의 청년 기사는 묵묵히 거두어 들이며 그 업을 나누어 받겠다고 다짐했었다.
-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그때 반대한 거였어. 네 영혼에 타인의 영체가 섞여 들어간 이후에 너의 존재가 흐려질 것을 경계했었다. 너는 변했어 페르난데스. 나아갔다는 의미가 아니야, 변질되었다는 뜻이지.
‘그게 나쁜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였던 시절이 얼마나 좋았다는 뜻인가?’
-적어도 우리가 ‘우리’일 수는 있었지. 내가 ‘나’일 수는 있었어.
‘사람은 누구나 변해.’
-자기파괴와 자기수복은 영체의 본질에 영향을 끼치지 않아. 너의 경우엔 외부의 오염이 있었다. 너는 오염된 거야 페르난데스.
‘외부? 타인과의 교류에서 변해가는 인성을 오염이라 말하는 증상을 알고 있는데··· 그걸 ‘자폐증’이라 하더군.’
-···하.
페이자쉬가 침묵하자, 페르난데스는 대검의 칼자루를 움켜쥐고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행동은? 남들은 그걸 위선이라 하더군. 우리의 손이 선함을 주장한다 한들. 이제와서 깨끗한 물에 그 손을 집어 넣어 본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목적이, 우리의 행동들이 그다지도 선하고 고결해지더냐? 우리에겐 이유보다 목적이 중요하고, 선의는 가장 무가치한 이유 중 하나야.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뛰어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위선은 언제나 위악보다 나은 법. 그리고 목적이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페이자쉬. 아들을 위해서, 그 어린 영혼을 위해서···.’
그가 수립했던 대전략은 은밀한 기습. 후방의 교란.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자트 팔란에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다.
적들 사이에 광범위한 내전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전면전까지 상황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봐야 했다. 제 아무리 하자트 팔란의 준비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들, 프레이야가 있는 이상 적들의 가장 나약한 지점을 공략하는 것은 키르하스에겐 손쉬운 일일 터.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곁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벨을 마주보았다. 아벨은 독순술로 페르난데스가 했던 말을 듣고는, 당장이라도 뛰어 나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함께 가주시겠소?”
“기꺼이.”
아벨이 선하게 웃었다.
-아들을 위해서. 그래.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설령 세계를 불태워 새로 기워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위선에 불과한 선행. 그것이 역겨운 자기위로와 기만에 불과하더라도. 더 나은, 그 아이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다만 그것 만을 위해서.’
페르난데스는 칼을 한바퀴 돌려 움켜쥐고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렸다. 아벨이 그와 함께 나무를 박차고 내려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야영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