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거북이를 뒤집는 방법 (1)
*
“단순히 자비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한 것이 아니리라 믿소.”
“물론.”
관목이 울창한 숲 속, 페르난데스는 뒷짐을 진 채로 나뭇결과 그 사이에 곱게 뻗어 나온 작은 겨우살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레인과 그 전사들이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벨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따듯하게 그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니오, 무게를 잡아야 하오. 페르난데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애써 표정을 굳혔다.
“내분이 너희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그렇소. 다들 흩어진 채로 각개격파 당할 운명이겠지만.”
“하자트 카잘이 발호한 이래 모든 씨족들이 같은 운명에 처해 있지. 상관 없다.”
그 판도를 뒤집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니. 페르난데스는 겨우살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꽃망울이 그 사이사이에 얽혀 있었다. 그가 피식 웃자, 겨우살이의 가지가 작게 흔들렸다.
*
“세상에···.”
키르하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순식간에 생육하고 사멸하는 꽃들의 지도를 내려보았다. 매순간 변화하던 지도였으나, 지금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키르하스는 정신없이 만개하는 꽃들을 보며 탄식했다.
-퐁!
노란 꽃들이 붉은 꽃무덤 속에 산발적으로 발아하고, 순식간에 시들었다. ‘잠재적 아군’을 의미하는 노란 꽃들이 지도 전체에 피어오르고는 절반 이상 시들고, 또한 그 위치를 옮겨갔다.
적들 사이에 내분이 일었다는 정보가 그녀의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에리크에 저항하는 세력이 적들 사이사이에 피어 오르고 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만큼 다시 죽어나가고 있다.
저 틈바구니. 꽃망울로 표현된 수많은 생명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지도 아래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가. 북부의 모든 생명들이 도살당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키르하스는 소름이 돋았다.
화려했다. 지독한 독을 품고 사는 정글의 독사들처럼. 형형색색의 꽃들이 터져 나가고, 그 위로 붉게 피어오르며 그 밑, 신이 바라보는 북부의 시야 아래로 죽음이 거닐고 있다.
“프레이야 님···. 이건···.”
[쉿. 아이야. 지금 네 주인이 너를 찾고 있구나.]
“그 분을 보고 계십니까?”
[그 사내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어찌 화답할 수 있겠습니까?”
대전략을 짜는 시야와 이를 추진하는 담력. 그 모든 방면에서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그녀가 자립하길 바랐지만, 그녀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것이 이제 고작 이 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은 그의 과욕에 가까웠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노력했다.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그리고 페르난데스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그럼에도, 이런 급변하는 상황과 만개한 죽음 위에서 그녀에겐 페르난데스가 필요했다.
[내가 어찌 지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 생각하느냐?]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면 결단코 일어날 수 없는 이적. 나무 테이블 위에 계절과 종자에 상관 없이 꽃을 피워 올리는 능력. 그리고 모든 새 생명이 숨을 쉬는 곳에 감각을 공유하는 능력까지.
[너는 지금 그와 같은 것을 보고 있다. 이제, 말하라. 이 몸께서 전해주마.]
프레이야는 곱게 정좌한 채로 눈을 감고,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눈 앞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분께 지도를 보여주십시오.”
*
“오, 오오오···.”
“기적이야···.”
전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꽃망울들을 보고 있었다.
하자트 팔렌의 지휘본부에도 이와 동일한 광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프레이야가 제공하는 지도는 아름다웠다. 울창한 관목의 나무 둥치와 가지들 사이로 수많은 꽃봉오리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신이 바라보는 북부의 시야다. 하자트 팔렌의 지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불친절하다는 점, 그리고 조금 더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이야는 페르난데스의 판단력과 직관을 믿고 있었다. 꽃들은 그 색, 크기, 분포로 지도상에 더 많은 정보들을 표기하고 있었다. 이건 완성된 전술 지도에 가까웠다. 이 북부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을 수준의 지도였다.
“으음···. 나는 이런 것, 보고 있어도 이해하기 어렵구나.”
“상관 없소. 내가 이해하고 있으니.”
관목은 나무 테이블과 달리 평평하지도, 이어져 있지도 않았다. 아무리 울창하다 한들 침엽수림은 테이블처럼 평면적인 조건을 제공할 수 없었다. 데인 왕국의 전술 지도에 익숙한 아벨에게는 이런 조건들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구나. 적들이 나누어 지고 있어.”
“총 세 개의 방면으로 갈리고 있지. 그 사이에서 지금도 전투가 일어나고 있고.”
“저 검은 부분은 무엇이냐?”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지역이오.”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설마···.”
“그렇소. 프레이야가 볼 수 없는 지역··· 새 생명의 숨결이 완벽하게 제거된 지역이란 뜻이오.”
인간은 물론이고 식물과 짐승, 하다못해 벌레들까지도 완벽하게, 그리고 편집증적으로 불사른 지역이란 뜻이다. 아무리 북방이라 하더라도, 제 아무리 험난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생명이 움트기 마련이나···.
“점점 넓어지고 있구나.”
“사흘.”
페르난데스는 지도에서 눈을 뗐다. 그는 그의 등 뒤에 도열해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을 향해 북부어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다. 사흘.”
“에리크가 사흘 안에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뜻이오?”
“아니, 이 정도의 속도로 생명을 도살한다면. 사흘 안에 북부의 재활 가능성이 제거된다는 뜻이다. 설령 승리한다 하더라도, 북부는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지도는 불타오르는 듯 붉고 검은 꽃들로 만개하여 그 지역이 시시각각 넓어지고 있었다. 적의 전선은 거대하고, 이제는 심지어 그 정보조차 확실히 알기 어려운 이 때.
한껏 불리하기만 한 상황, 승산은 희박하고 지켜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페르난데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지도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이제부터 흩어져서, 너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을 빼돌려 도주하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뭐, 자살이 인생의 목표라면 상관 없지만. 권장하는 삶의 자세는 아니군. 너희의 죽음은 곧 그 만큼의 악마가 현계하는 제물이 될 것이고, 그건 후방에 있을 너희 가족들의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아주, 끔찍한 죽음을.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레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하면 좋겠소? 무턱대고 이 근방 진지들을 들쑤시고 다니면 되겠소?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놈들에겐 악마가 있지 않소.”
“적과 조우하면 반드시 도주하고, 아군을 포섭하면 그 순간 흩어져라. 가능하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적어도 넷 이상의 무리를 나누어서.”
“···? 그럼 그저 탈영병들에 불과할 것이오만? 이 북부 저 험준한 산 여기저기에 흩어진 전사들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오?”
차라리 하자트 팔렌을 향해 모두 함께 도주한다면 적어도 생존해서 본대에 합류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소? 바레인이 그렇게 묻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건 초식동물들의 사고방식이다. 북부인.”
무리를 지어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하책 중 하책이다. 무리에 이탈하는 병력, 도주에 소모되는 병력. 그 모든 인원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 때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사항이다.
그러나 산맥에 뿔뿔이 흩어진다면, 당장의 회전에 도움이 되는 병력이 될 수는 없더라도 각각 개인의 생존률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적들의 병력이 아무리 많다 한들, 뻔히 회전을 준비하고 있을 하자트 팔렌을 눈 앞에 두고 산맥에 흩어진 탈영병들을 수색하기 위해 투사할 인력자원은 없다.
수색이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지루한 작업이다. 당장 먹음직스러운 제물들이 뭉쳐서, 희망 없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이 때에. 하자트 팔렌에 지원을 할 수 없는 개개인들은 다만 성가실 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에리크는, 그리고 바르드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일단 저항 세력을 모조리 박살내고, 느긋하게 겨울 사냥을 즐기자.
‘정확해.’
탈영병들이 설령 하자트 팔렌의 저항군에 증원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나쁘지 않다. 적들의 입장에선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던 저항군들이 결집된다는 것만으로도 대규모 회전을 노릴 수 있게 될 테니.
그러니 방기할 것이다. 의도적으로, 오히려 도망쳐 보라는 식으로. 놈들이 원하는 것은 아군의 일점붕괴이며, 이를 통한 전과 확대, 그리고 최대한 많은 제물의 확보일 것이다.
지금까지 저항군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되 그 실체를 최대한 은닉했다. 그들은 정보의 우위를 통한 지독한 게릴라와 구출 작전만을 고수해왔다.
이를 인지한 적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놈들은 세력을 불려 회전을 노리고 있다.’겠지. 당연하게도 함정이다.
그러니 내분을 일으킨 탈영병들을 방기한다. 숲 속으로 도망친 잡졸들을 굳이 하나하나 지워내지 않는다. 그러나 숲은 곧 생명의 요람이며, 북부의 모든 생명은 프레이야의 시야 아래에 있다.
“매가 거북이를 사냥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나?”
“···?”
“우선, 뒤집지.”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뽑아 들어, 지도를 내려 찍었다. 콰직, 꽃망울이 매달린 나뭇가지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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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인의 전언이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만. ‘거북이를 뒤집는다’ 라고 하더군.]
프레이야는 눈을 뜨며 말했다. 지도의 일부분이 칼로 베인 것처럼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지역을 잘라냈다. 무슨 의미겠느냐?]
“거북이··· 거북이라···.”
키르하스는 칼자국이 박힌 지도를 내려보았다. 적진의 긴 전선, 저항군의 주요 세력들과 인접한 남쪽 아주 끝을 얇게 저며내듯이···.
‘거북이를 뒤집는다···. 들어올려 뒤집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만약, 매나 독수리처럼 손이 없는 짐승이 거북이를 뒤집으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르하스는 조심스럽게 칼자국이 난 전선의 정반대, 북방 전선을 단검으로 찔렀다.
-콰직.
*
꽃이 파스스, 하며 저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칼로 베어낸 것처럼 깔끔하게. 페르난데스는 그 광경을 보며 깊게 웃음지었다.
“정답이다.”
모의 체스를 두는 마음으로. 또는 체스 기보의 묘수 해설을 하는 심정으로. 그와 그녀 사이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한 수씩 번갈아서, 칼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콱, 콰득.
-파스스. 콰직.
꽃이 만개한 화원이 천천히 깎여 나간다. 붉은 꽃잎들이 사그라들었다. 적들은 저항군이 충분한 병력을 소집할 때 까지 기다리며 내부의 분쟁을 해소하려 할 것이다.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저항군의 최선이 그들에게 있어서 위협이 되지 못할 뿐더러, 설령 규모가 충분히 커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놈들에겐 호재에 불과했다. 더 많은 제물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더 강한 악마, 더 거대한 악마, 마침내는···
‘사다르켈리사까지.’
그렇게 대악마가 소환될 법한 전장으로. 에인헤랴르를 소환해 적들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작전은, 놈들의 자충수로 의미가 퇴색되었다. 전술은 상황에 맞추어 항상 변할 수 있는 법이나, 전략의 영역에서의 목적은 언제나 변치 않으니.
페르난데스의 목표는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 뿐이었다.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 수 밖에 없도록.”
-콰직.
후방의 교란, 정보의 우위. 산맥에 흩어진 잠재적 아군. 내분으로 잠시 경직된 적들의 군영들까지. 웅크린 거북이를 자극해 머리를 내밀도록, 그리고 단단한 등껍질을 뒤흔들어 거꾸로 뒤집기 위해서.
그러니 여전히, 그의 전술은 창과, 창과, 창이다.
“너희는 지금부터 최대한 많은 병력을 산개시켜라.”
지도에 칼을 박아 넣으며, 페르난데스가 바레인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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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을 시작한다더니, 여기에서 여전히 지도나 보고 있었군. 남부인?”
완벽하게 무장을 갖춘 아에렌이 막사를 걷으며 들어섰다. 그녀는 초췌해진 얼굴로 테이블을 짚고 서서 멍하니 지도를 내려보는 키르하스를 향해 혀를 찼다.
“뭘 하고 있나?”
“이걸 봐요.”
아에렌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키르하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밤을 지새운 것인지 그녀의 얼굴엔 피로가 짙게 눌러앉아 있었다.
지도는 칼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이 남부인 계집이 미친 것인가? 소중한 작전 지도를 찢어버린 것에 분개하려는 찰나, 키르하스가 손가락으로 한 귀퉁이를 툭 짚었다.
“우리.”
다시 다른 귀퉁이를 짚으며.
“적들.”
그리고 적진의 한복판에 흩어져 있는, 부서진 노란 꽃잎들과 보라색 꽃들을 짚고는.
“은공.”
이제 아에렌 또한 지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이건 부서진 지도가 아니었다. 지도 자체가 종이나 양피가 아닌, 꽃과 잎들로 이루어진 탓에 그 위를 잉크 대신 칼로 그어 놓은 작전 구상도였다.
적진은 여전히 굴강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내분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탓에 세력이 위축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저항군에 비해 그 병력이 두 배는 웃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어딘가가 불안정해 보였다. 화려하게 물든 오색 꽃망울들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거북이가 뒤집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