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죽음의 기능성
*
“눈이 내리는구나.”
아에렌은 도끼의 날에 내려 앉는 작은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 도열한 전사들의 눈에 긴장감이 흘렀다. 북부,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그들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두려우냐?”
아에렌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악마와 하수인들, 흉흉한 눈빛을 흘리는 카잘리드 씨족의 전사들을 마주했다. 악마의 축복을 깊게 받은 이들은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씨족 전사들의 수준을 상회할 것이다.
적의 수를 극단적으로 줄여 놓았지만 이것이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에렌도,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패잔병 연합군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에리크의 목전까지 기습적으로 치고 올라온 것은 성공했으되, 에리크의 본영에 있는 전사들의 수가 그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두려우냐!”
하여, 아에렌은 목청 높여 소리질렀다. 거칠게 갈라진 허스키한 목소리가 전사들의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후우우웅!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어 놓았다. 갈기를 곤두세운 사자처럼, 먹이를 덮치는 맹수처럼. 아에렌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라! 다만 수치를, 불명예를 두려워하라. 북부의 전사들이여! 우리의 목숨은 이미 신들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
전사들의 눈에 용기가 피어오른다. 아에렌은 그들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선조들 앞에 당당해지리라! 하루를 패배자로 사느니, 한 순간에 명예로이 죽으리라! 그 누구도!”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
“좋다! 북부의 전사들이여, 신들의 자손이여! 악마에, 저 괴물들에 무릎 꿇지 말라! 가라! 전진하라!”
“와아아아아!!”
그녀가 도끼를 치켜들자 전사들이 내달렸다. 대지가 뒤흔들리고 성난 말과 사람들이 하나 되어 전진했다. 전진, 전진, 오로지 전진. 전략의 영역을 지나, 전술의 영역에서 더 협소한 어딘가를 향해.
전술적 차원의 고려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전장 아래에선 그 의미를 잃었다. 오직 야만적이고, 더 없이 순수한 돌진 뿐.
-두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며 두 군세가 격돌하는 이 지점엔, 전략도, 전술도, 심계도, 모략도 없는. 순수한 투쟁 뿐이었다.
“이야아아아!!”
아에렌은 이들과 하나 되어 달리며 도끼를 휘둘러 가장 앞서 달려오는 악마의 머리를 쪼갰다. 뇌수와 피가 비산했다. 피와 살점이 눈 나리는 동토를 녹이는 전장이었다.
*
“저길 봐 친구, 멋지지 않나?”
나무 등걸 위에서 몸을 도사린 페르난데스의 곁에, 로프트가 천천히 나타나며 속삭였다. 페르난데스는 못박힌 듯 전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저 광경이 우리가 꿈꾸던 에인헤랴르의 모습이었어. 악마를 향한, 그리고 종말을 향한 순수한 투쟁의 정수. 그것이 타락하기 전 우리 모두가 꿈꾼 가장 이상적인 전사들의 모습이었단 말이야.”
“날조된 이상이지.”
“맞아, 날조된 이상이지. 그 순도 높은 전사들을 만들기 위해 북부 전체를 우리 입맛대로 가꾸어 놓았으니.”
로프트는 푸른 안광을 빛내며 씁쓸하게 말했다.
“저들 중 얼마나 살아남겠나, 친구?”
“···그리 많은 수는 아닐거야.”
페르난데스는 악마에게 씹히고, 밟히고, 찢겨나가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불길 속으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힘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만큼의 피해를 적들에게 강요하며 쓰러지고 있었으나, 결코 공정한 교환이라 여길 수는 없었다.
적의 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이건 시간 싸움이었다. 에리크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해 던진 저 병력들이 모두 증발하기 전까지의 시간 싸움.
에리크와 바르드에게, 지금 이 전투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정보를 흘리기 위해 수많은 함정을 팠다. 심지어 그 선두에 아에렌을 던졌다. 패잔병 연합의 우두머리가 나타난 것을 보고, 에리크는 승리를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프레이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오?”
-퐁!
나무 등치에서 작은 꽃잎이 튀어나왔다. 붉은 색. 긍정적인 색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눈이 내리는 흐린 밤하늘을 올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죽음이 흔한 시대로군.”
“언젠 아니었나?”
“한때 죽음은 불가해했고, 신비로웠으며, 장엄하고, 극적이었다네. 친구. 사후 세계가 두려움과 신비로움에서 저속한 공포로 변질되기 전까진 말이야. 저들을 보게.”
로프트는 뼈로 이루어진 손가락을 들어 올려 전선에 내달리는 악마들을 가리켰다. 그의 눈에선 경멸이 흘러 넘쳤다.
“영혼을 삼키는 저 괴물들을 보게. 저 자리의 전사들에게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 것 같나? 저속하고 비참한 제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힘 없이 떠도는 바람에 불과하지. 로프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새 생명의 탄생은 언제 어느 순간, 어떤 문화권에서도 축복받는 일이기에 상대적으로 프레이야의 권능은 강대하다.
하지만 로프트, 이 북부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이 신은 그 권능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사그라진 신앙 사이에서 바스라지고 있었다.
다른 문화권 속 죽음의 신들이 갖는 절대적인 권위에 비하자면 처참한 결말이다. 그러나 로프트는 씁쓸한 눈으로,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는 시선으로 웃었다.
“뭐, 동정하지는 말게나. 우리가 저지른 과오의 결말이라면, 난데없는 비극은 아니지 않나.”
장난꾼들의 신은 낄낄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눈발이 거세어져 이제 전장은 고함과 비명 뿐, 시야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구나···. 동토에 시야가 흐려 길을 잃지 않길 바라지. 친구.”
로프트는 그리 말하고는 서서히 사라졌다. 페르난데스는 눈송이를 맞으며 눈을 감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밤과 눈바람이 만들어낸 장막 너머로 사그라드는 생명들을 생각하며.
“늦지 마라. 키르하스.”
천천히 그는 성호를 그었다. 그가 아니라, 스러진 죽음들을 위하여.
*
-푸쉬이익.
에리크는 도끼를 휘둘러 덜덜 떠는 악마의 목을 쳤다. 악마는 검은 안개를 내뿜으며 밤하늘 어딘가로 흩어졌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덜덜 떠는 전사 하나가 거칠게 끌려와 그의 눈 앞에 허물어졌다.
-스르릉.
도끼가 시린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졌다. 전사는 바들바들 떨며 에리크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야를, 야를! 차라리 절, 저를 전선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 이런 죽음은 너무나···.”
“네 희생은 잊지 않겠다.”
“야르을!!”
-콰직.
도끼가 미끄러지며 전사의 목을 치고 지나쳤다. 전사는 입을 뻐끔거리며 머리를 떨어트렸다. 그 사이로 피가 흥건하게 쏟아지고, 동시에 에리크의 곁에 서 있던 주술사들이 일제히 수인을 짚었다.
-화르륵.
전사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핏물 속에서 손과 발, 그리고 비늘 덮인 머리가 솟구쳐 올랐다. 에리크는 뺨에 튄 핏방울을 대충 훔치며 그를 내려보았다.
“말하라.”
“늑대 협곡의 기습은 추격을 실패하고 복귀 중. 다섯 시간이 걸릴 예정. 가닐란 산의 야영지는 붕괴함. 적습을 인지한 즉시 퇴각을 결정한 탓. 해당 지역으로 파견된 기병 도합 400여기는 길을 잃고 있음.”
악마는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옥의 정보를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이를 듣고 있던 에리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도끼를 들어 올렸다.
“시리아드에게 복귀를 명하라. 차스트로스는 추적을 이어가라 하라. 다라실의 곁에 혹 스벤이 있다면, 놈에겐 반드시 최대한 빠르게 이곳 남쪽으로 진격하라 말하라.”
“알겠습니다.”
“가라.”
-서겅.
도끼가 악마의 정수리를 찍었다. 악마는 시체를 남기지 않고 핏물 속으로 다시 잠겨 들었다. 에리크는 피로한 눈매를 쓰다듬으며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또 다른 전사가 끌려왔다. 지루하군. 에리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씨족 전사들의 공포에 찬 눈도, 바지에 실금하며 이 자리로 끌려온 저 이름 모를 전사도.
핏물과 살더미로 변한 이 시체 구덩이도. 그걸 보며 킬킬거리는 주술사와 악마, 그리고 저 타락한 신까지도. 모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야를!”
그때 군영의 밖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전선의 상황을 에리크에게 전달하던 사내였다. 도끼를 들어 올리던 에리크는 잠시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황이 밀리고 있나?”
“아직 교착 중입니다! 하지만···.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곧 밀려나게 될 겁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세라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난 기습, 배수진을 치고 죽음을 각오한 적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회전 대신 야영지의 목책을 중심으로 공성전을 준비해야 마땅했던 상황까지.
거기에 끊임 없이 후방으로 차출되어 제물로 산화하는 전사들로 인한 전력 누수가 겹치며 전선에 나선 전사들은 바닥에 떨어진 사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날뛰는 악마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당장 사분오열되고도 남은 상황이었다. 기실, 주 병력을 모두 외부에 돌린 이 상황에서, 야영지에 남은 전사들은 쭉정이에 불과했다.
통일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다급한 순간이라 할 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전황은 그로서는 결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북부의 거의 모든 씨족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흩어져 숨어든 상황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구심점과 동시다발적이고 조직적인 저항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그건 전략가가 아니라 예언자일 터.
“고작 그런 말을 건네러 여기까지 왔느냐?”
“아! 아닙니다, 야를! 동쪽 능선에서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쪽?”
동쪽으로 파견한 병력이 얼마나 되더라? 누가 그 지역을 이끌고 있었지? 에리크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부터 동쪽이라면 아군 야영지들이 단단하게 요새화된 지역이며, 또한 기습을 알리는 봉화가 올라오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그러니 이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군일 터. 그쪽으론 어떤 명령도 내린 적 없기에, 이 접근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
“시그스텐을 적과 마주하게 하십시오. 적의 분견대의 발을 묶어야 합니다. 시구르드에겐 가장 처음 마주하는 적군을 무시하고, 그 후발대를 공격하게 하십시오. 기습이 산발적이고, 우리의 규모가 거대해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키르하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꽃이 돋아난 나무 판자에 속삭였다. 그녀는 속력을 낮추지 않으며 끊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쫓아오는 전사들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지금 사흘 밤을 거의 꼬박 지새우며 전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다른 지휘관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 모든 순간에 이동을, 또는 교전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치 다른 이들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달린 것 같았다. 전투의 지휘와 직접 칼을 휘둘러 하는 교전도 거의 완벽했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그런 와중에 매순간 전략적 사고를 놓지 않으며 북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벌써 세 번째 집단 전투를 치르고 군단을 진두지휘하며 동시에 전혀 다른 지역의 군사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 수 한 수 계산된 기보의 기물을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게.
“발텐은 후퇴해야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전장에서 이탈해선 안됩니다. 가장 가까운 야영지에 기습을 재시도하도록 하십시오. 적의 대응 병력에 혼선을 주어야 합니다.”
이 순간, 키르하스의 전술 지휘와 프레이야의 정보 전달은 완벽한 하모니를 맞추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텍티컬 벨트에 목판을 걸었다. 그녀는 소매에서 담뱃대를 꺼내 들었다.
“후···.”
적의 귀환 병력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 북부의 어둠과 눈보라 사이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북부 전역으로 흩어 놓은 병력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결코 유의미한 전력이 될 수 없었을 테지만, 키르하스와 프레이야의 지휘 아래에서 완벽한 게릴라 군으로서 운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판도를 뒤흔든다. 거북이를 뒤집기 위해서. 키르하스는 저 멀리 아른거리는 야영지의 횃불을 바라보며 말의 속력을 높였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폐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전투의, 사냥의 향기가 그녀의 비강을 채우고 뇌리를 적셨다.
‘키르하스. 전장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적보다 많은 수의 병력이 아니겠습니까?’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그리고 병력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전선 전체에 뿌려진 병력이 얼마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정말 중요한 것은 교전하는 순간 접촉하는 병력의 숫자와 질 뿐이다.’
키르하스는 지난날 페르난데스가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혀 두고 가르쳤던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주로 무릎의 촉감과 온기를 떠올리려는 것이기야 했지만. 키르하스의 꼬리가 휘적 하고 움직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은공.’
적의 전체 병력은 아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북부의 패잔병 연합은 결속된 세력이 아닐 뿐더러, 그 병력의 질과 수가 모두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전장. 아주 협소한 국지전에서만 우세를 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전장이 적의 수뇌부가 있는 바로 그 장소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선 결코 불가능한 가정이다. 적의 핵심 시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반드시 더 단단한 대비책이 세워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페르난데스가 만들어낸 판도와 그 위에 흩어진 아군 병력들, 그리고 그 병력들을 쫓기 위해 따라 흩어진 적군들. 정보의 혼선과 지휘부의 오판. 동시간대에 동일한 지휘를 내릴 수 있는 프레이야의 존재. 그리고···
대황야 최고의 야전지휘관의 존재가 전장의 판도를 가름하고 있었다.
‘반드시, 뒤집어 보이겠습니다.’
그녀와 프레이야를 함께 두고 떠난 것은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믿고 있었다. 이 거대한 판도, 이 북부에서 그의 발을 맞춰 병력을 전개할 수 있는 지휘관은 그녀 뿐이라고.
그러니 그녀는 그저 따를 뿐. 그녀의 주군이 내린 믿음과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스르릉.
칼날이 뽑혀 나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담배를 털어 뿌리고는 칼을 고쳐 잡았다. 적진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돌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