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87화 (188/388)

187. 라그나로크 (2)

*

그 순간, 대기가 숨죽이고 짐승들이 몸을 감추며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제 둥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기묘한 정적이 이 전장 위를 감돌았다.

-고오오···.

하늘이 울부짖는다. 거센 눈발 저 너머에서 마력도, 신성도 아닌 어떤 존재감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바싹 굳은 탓에, 전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숨 돌릴 한 순간을 얻었음에도 전장의 전사들은 오히려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눈 앞의 악마를 상대하거나, 악마와 함께 전선을 구축하는 전사들이 초자연적인 일에 겁을 먹었다는 것은.

“크, 크흐흐··· 흐흐하!”

돌연, 전장의 악마가 광소를 터트렸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한 반응이고, 악마들은 입을 찢어지게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고는 폭소하기 시작했다.

전장엔 웃음소리와, 바람소리, 눈이 내리는 소리. 방금 전까지 이어졌던 격전 탓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전사의 신음소리, 쏟아진 장기를 주워 섬기며 헐떡이는 부상병의 단말마가 흘렀다.

“아에렌.”

군나르는 긴장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아에렌에게 접근했다. 아에렌은 피에 푹 젖은 채로 도끼를 들고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군나르는 짧게 감탄했다. 이 순간에 광기에 젖지 않은 것은, 또는 두려움에 굴종하지 않은 것은 적어도 이 전장에서 그녀가 유일했다.

군나르는 남들보다 ‘눈’이 좋다. 그건 특수한 육감의 영역에 걸쳐 있는 능력이었다. 수많은 사선을 건너며 그의 생명줄을 잡아준 그 능력이 지금 온 사방에 붉은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피해야 한다. 여기에 있다간 죽어.”

“···뭐가 보이나, 군나르?”

“아니. 나도 모르겠군. 보이지 않아. 보이지···.”

군나르는 잠시 침을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싹 얼어붙은 전사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기를 떨어트리고 고개를 처박거나, 도망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밤하늘을 거쳐 거미줄처럼 흩어지며 창공을 뒤덮고 있었다. 그 아래에선, 이들은 경직된 사냥감들일 뿐이다.

살 길이 있는가? 그리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여기 이들. 북부 문명 사회의 마지막 불꽃들을 내버리고 도주해서 미래가 있는가? 군나르는 신음 섞인 비명을 흘리며 속삭였다.

“살 길이··· 보이지 않아.”

“그런 것 같군.”

-쿠구구궁···.

대지가 떨렸다. 심장 박동처럼, 천천히, 점점 더 맹렬하게! 저 멀리 어둠과 눈보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저 먼 야영지에서부터 이곳 전장의 첨단에 이르기까지 이 광활한 대지를 뒤흔들며···.

“라그나로크가 시작되었어.”

아에렌의 말은, 군나르에겐 단어 그대로의 사실 명시에 가까웠다.

*

-쿠구구궁···.

대지가 울린다. 페르난데스는 왼손 손가락을 번갈아 풀고, 잠시 품속에 집어 넣어 얼어 붙은 손을 녹였다. 그는 수풀 속에서 몸을 도사린 채로 야영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관문이 열렸어.

‘승산은?’

-사다르켈리사의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

‘기도해보자고, 페이자쉬. 사제 답게 말이야.’

-누구에게? 저 빌어먹을 무능력한 신들에게?

‘하하, 설마.’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뽑고는 빙글 돌려 고쳐 잡았다. 대검의 검신에 적인 글자 ‘다인’. 용의 말로 연민이라···. 그는 묵빛 대검의 차가운 검신에 짧게 입맞추고는 그대로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렸다.

‘우리 자신에게. 신도, 악마도 우리의 목적을 대리하지 못하니.’

-그거 좋지.

*

-콰직!

아무 말 없이 악마를 베어 넘기던 제피스는, 코끝을 자극하는 기묘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그 틈을 타고 어금니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악마의 머리를, 바로 곁에서 파비아노가 썰었다.

-촤악!

“형제님?”

“냄새가 난다.”

그들에게 달려드는 악마가 점점 더 적어지고 있었던 시점이기에, 당초의 목적지였던 야영지의 지휘 막사는 어느새 코 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삼 분? 아니, 일 분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을 압박하는 악마를 모조리 도륙내고 타락한 적의 수뇌부를 심판하는 데까지 그 정도 시간이면 족했다.

그러나 제피스는 타오르는 눈으로 야영지를 노려보았다.

“악마의 냄새가 난다.”

“이 주위엔 악마들 뿐입니다. 당연히···.”

“아니, 더 큰··· 더···.”

-쿠구구궁!!

그 순간, 심지어 디모니카들마저 비틀거릴 강대한 충격이 그들의 몸을 휩쓸었다. 이단심문관들은 재빨리 대지에 발을 박고, 휘청이는 형제를 붙잡았다.

“형제, 괜찮나?”

사르벨리오는 엔마기카였다. 비록 단단히 무장한 채로 디모니카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지만, 그의 역할은 마법전과 견제에 치우쳐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잠시 자신을 부축하는 브랜드를 바라보았다.

“형제여.”

“말하게, 펠리치아노 형제.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형제여, 저를 죽이십시오.”

사르벨리오의 얼굴에 혼란이, 그리고 곧 공포가 흘렀다. 그의 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신성한 종류의 성광이나 열정이 아닌···. 지옥 마력에 가까운 암녹색 빛이 흘렀다.

“보입니다. 형제··· 보여요. 뱀이··· 우주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불길과··· 죽어가는 형제, 형제님들, 형제여. 세상이 불타고 만신전이 열리며, 천사들이 장대에 걸리고.”

“형제!”

[너희의 신과 너희, 가련한 꼭두각시들은 내가 만들어낼 종말 아래에서 무력하게 으스러지겠지.]

사르벨리오의 눈이 타오르고, 안구가 함몰되어 피와 살점이 덮인 안저가 드러났다. 눈과 코, 그리고 입에서 핏물을 쏟아내며 뱀의 얼굴을 드러낸 혓바닥이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는 실패하고, 너희의 무의미한 저항들은···.]

-스겅.

당황한 브랜드의 눈 앞에서 빛이 번쩍였다. 어느새 쏜살같이 튀어나온 건틀릿이 광기에 젖어 소리치는 사르벨리오의 머리를 잡고, 거의 동시에 섬전처럼 대검으로 목을 썰었다.

“혀, 형제!”

“이제 그는 형제가 아니네.”

-촤아악.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제피스는 잘린 사르벨리오의 머리를 바닥에 던졌다. 머리는 바닥을 구르며 긴 혀를 내밀고 있었다. 혀가 뱀처럼 구불거리고, 비늘이 돋아나며 저 홀로 키득거렸다.

“작전이 끝나면 정화성사를 시행하겠다. 형제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준 정신오염 상태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형제들. 다섯 걸음에 한 번씩 서로의 음성기호를 말하라.”

“···막토.”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제피스는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는 사르벨리오의 시체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성호를 그을 시간도, 그를 위해 기도할 시간도 부족했다.

-쿠구구구궁!!

어두운 밤이었다. 불길에 녹아 일그러진 유화처럼, 온갖 색채가 유영하는 화려하고, 음산한 밤이었다. 제피스는 자신의 몸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대하게 부푸는 관문을 바라보았다.

대검의 무게가, 그리고 전투 망치와 무장의 무게가 점점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공기가 끈적하게 피부를 핥았다.

-끼이이익···.

그건 문이 열린다기 보다는 차라리 짐승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러한 소리가, 일반인이라면 전의를 잃고 실신하거나, 공포 속에서 광기에 젖을 소리가 대기를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제피스는 관문이 기동하며 그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악마들을 바라보고는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건 다른 이단심문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국에도 우리 자리는 있겠지요. 형제님.’

베오른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리며, 제피스는 대검을 높게 쥐고 묵묵히 달려 나갔다.

*

-끼이이이이···!!!

페르난데스는 급류처럼 쏟아지는 악마들을 베어 넘기며 비명을 내지르는 관문을 향해 달렸다. 잔챙이부터 마졸, 군데군데는 마장에 이르기까지. 데미드라코, 파라실, 첼라세스···. 종과 계급에 상관 없이 악마들이 날뛰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콰직! 콱! 카드드득!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대검이 춤을 춘다. 페르난데스의 시간감각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건 지옥 마력에 의한 타락일 수도, 또는 생사의 기로에 선 필멸자 특유의 생존본능 탓일수도 있었다.

막혀 있던 재능, 신성이 흐르는 디모니카의 혈관 탓에 돌파할 수 없었던 그 어떤 한계가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다. 목적은 분명하고, 행동도 적확했으나. 그의 의식은 점차 흐려져 갔다.

-서겅.

악마가 내뻗는 팔 그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며 대검을 휘두른다. 한 번, 빛이 스치고 악마가 두 조각이 나며 쓰러졌다. 그 다음. 페르난데스의 목을 노리고 떨어지는 악마의 칼과 창이 다섯 조각나 흩어진다.

-카득!

왼손, 다른 대검이 그의 손에 이끌렸다. 두 자루의 대검을 양 손에 쥐고 페르난데스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몸을 튕겼다.

-스겅.

다음 악마, 또 다음 악마. 그의 눈이 다른 대상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공격과 적의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전투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시간감각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십 분의 일 초의 찰나, 그 찰나를 쪼개어 순간. 그 한 순간 한 순간을 눈으로 읽고 몸으로 반응하며 앞으로. 그렇게 앞으로.

-콰아아앙!

그러나 동시에 전장을. 자신의 위치를. 그리고 이 전투의 끝을. 멈춘 것 같은 시간 감각 속에서 오직 그만이 자유롭다는 듯이. 더, 조금만 더 나아가면 무언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언젠가 대황야에서 다리안과의 결투가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그 시간감각이 다시 그의 몸을 일깨우고 있었다. 북부의 찬 바람 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몸이 뜨겁게 달구어지며, 입에서 단숨이 흘러나왔다.

방해다. 숨결마저 시야를 가리며 거슬리게만 느껴졌다. 극도의 예민함 속에서 페르난데스는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친구.”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악마를 썰고, 또 썰며 나아갔다.

“친구, 발할라의 입구가 열렸다네.”

로프트는 악마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페르난데스의 보폭에 맞추어 함께 걸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해주었어. 정말 잘 해 주었어.”

악마가 그의 손끝에 걸려 쓰러질 때 마다 그 몸속에서 푸른 영혼이 솟아나 로프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로프트는 때때로 그런 영혼들을 손가락 끝으로 간지럽히거나 굴리면서 웃었다.

“에인헤랴르의 전사들··· 악마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우리의 비수들. 종말의 번견들이여.”

-촤아아악!

제법 큰 체구로 페르난데스를 압박하던 악마가 반으로 갈라졌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악마의 몸을 타고 넘으며 그 위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로프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나의 펜리르. 잘해 주었어. 정말 훌륭하군. 내 도박이 또 다시 적중했구나. 보탄.”

그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에 있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악마들이 저기에 닿을 때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며, 지옥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바싹 굳은 인간들은 그 격류에 휩쓸려 도살당할 것이 뻔했다.

오, 안 되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로프트는 큭, 하고 웃으며 천천히 몸을 띄워 하늘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듯이 사뿐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보탄, 이번에도 내 승리인 것 같군.”

타락한 발할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며, 에시르의 힘이 그의 몸 속에 흘러 넘쳤다. 페르난데스가,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이 쓰러트리고 있는 악마들. 그들의 혼백이 흩어지며 로프트에게 빨려 들어갔다.

지옥 마력에 오염되기 시작한 창공을 바라보며, 로프트는 혀를 차고 웃었다. 무릇 종말이란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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