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88화 (189/388)

188. 라그나로크 (3)

*

“후퇴해라! 물러나!”

키르하스는 겁에 질려 주춤거리는 전사들을 독려하며 달렸다. 야영지의 깊숙한 곳까지 치고 들어온 탓에, 이 근방은 관문의 영향력 바로 아래에 있었다.

피아의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이 절망과 공포에 절어 덜덜 떨고 있었다. 심지어는 악마를 보는 일에, 또는 악마의 명령을 따르는 일에 주저 없던 카잘리드의 전사들마저 그랬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키르하스, 그녀 혼자 뿐이었다. 그녀는 강아지의 뒷목을 잡아 이끄는 어미 개처럼 딱딱하게 굳은 전사들을 끌어내며 외쳤다.

-짜악!

“크읍···?!”

“정신차려! 여기에 있으면 죽는다!”

키르하스의 눈에 푸른 길 따윈 없었다. 사방, 온 사방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핏빛과 같은 붉은 예감이 그녀의 주위에 흘러 넘쳤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이대로 멈춰 설 수는···.

‘은공, 어떻게 그런 순간에도 움직일 수 있으셨습니까?’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낙관하거나 절망하는 것보다 유익하다. 키르하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곧 퇴보하는 것과 같다.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따라서 너의 적들은 언제나 그 시간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단다. 능력이란 상대적인 것이니, 네 능력이 멈췄다면 그건 적에 비해 퇴보한 것과 같아.’

키르하스는 죄어오는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페르난데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래, 움직이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언제 어떤 순간에라도 절망하는 것보다는 낫다.

“따라와, 달려! 포기하지 마라! 너흴 결코 버리지 않겠다!”

죽음이 만연한 지역에 무력하게 스러진 부하를 버리고 홀로 생을 도모하기엔 그녀의 심성이 너무 올곧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전사들을 수습하며 달렸다.

-쿠구구궁···!!

그 순간, 그녀는 비틀거리며 주저 앉았다. 강대한 진동이 대지를 강타하고, 사방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청록색 눈이 필사적으로 주위를 훑었다. 죽음, 죽음···. 어디에도 사지 뿐이었다.

“은공.”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영혼의 문제였다. 압도적인 존재감 아래에서 그녀는 거미줄에 묶인 나방처럼 무력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은공, 제가··· 제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키르하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방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기에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끈적한 공기가 마력을 담은 채 그녀의 살갗을 핥으며 스쳐지났다.

“일어나거라.”

“···아벨.”

잠시간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키르하스는 힘없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앞에 선 아벨이 그녀를 내려보며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에 힘 없이 걸린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키르하스를 부축하며 속삭였다.

“포기하기엔 이르다.”

“어째서 오셨습니까? 여긴, 살아날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당신은··· 당신 만큼은 살았어야 했습니다. 제가 어떤 심정으로 당신을···”

“쉿. 투정은 일이 끝난 후에 듣겠다.”

천천히 열리는 지옥 관문의 존재감 아래에서도 오로지 아벨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듯 움직였다. 정지된 시간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그녀는 여유롭게 키르하스와 주위 전사들을 끌어 당겼다.

용의 영혼은 준신의 격에 달한다. 필멸자의 영성을 넘어선 그 경지, 위대한 존재들과 같은 시선을 담고 있는 저 눈. 그 아래에서 전사들이 하나 둘 숨을 헐떡이며 토해내고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겨울 눈발이 제 아무리 거세다 한들, 이듬해 봄에 새싹이 트이지 않겠느냐.”

아벨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키르하스의 허릿춤에 매달린 나무판자를 꺼냈다. 나무판자 위엔 작은 꽃망울이 반쯤 시들어간 채로 매달려 있었다.

“아니 그런가. 바나디스?”

-퐁!

하얀 꽃이 나무판자 위에 돋아났다. 그리고 곧—

-퐁!

-퐁! 퐁!

꽃망울들이 이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점점이 이어져 나갔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길이 그녀의 눈 앞에 펼쳐졌다. 아벨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직 길이 있다는구나.”

*

“움직여, 움직여!”

아에렌은 핏발 선 눈으로 도끼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엄지, 검지, 중지··· 천천히 손가락들이 꿈틀거리며 도끼를 움켜 쥐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싸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녀는 결코 힘 없이 스러져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리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것이 다가오는 순간을 가름하는 단 하나의 조건은 이 도끼의 앞이냐, 또는 그 뒤에 있느냐 뿐이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것들에게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씩 도끼를 휘둘러줄 생각이었다.

-뿌드득.

단단히 굳은 어깨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뻐근하지만, 괜찮다. 아직 움직일 만 했다. 그녀는 바싹 굳어있는 전사들을 내려보며 낄낄거리는 악마를 향해 손에 쥔 도끼를 집어 던졌다.

-콰직!

“크흐읍!”

“이 머저리들아!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녀는 거칠게 외치며 허릿춤에서 다른 도끼를 꺼내 들었다. 전신이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전장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과 그녀의 차이였다.

악마들은 그녀의 모습을 내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곧 어머니께서 도래하신다. 너의 작은 발악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너는, 너의 이 한 줌도 되지 못하는 전사들은 오늘보다 오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상관--! 없다--!!”

아에렌은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그녀의 머리칼이 사자의 갈기처럼 떠올랐다. 마력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좋은 징조였다. 적어도 싸우다 죽을 수는 있다는 뜻이니까.

그녀는 도끼를 쥔 채로 허리를 펴고, 쓰러진 악마의 시체 위를 타고 올랐다. 딱딱하게 굳어 덜덜 떠는 그녀의 전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팔이 있다면 무기를 들어라! 팔이 떨어지거든 어금니를 박아라! 전사들이여! 북부의 전사들이여! 죽음에 순종하지 말라, 죽음은 우리의 적도, 상전도 아니오. 다만 우리의 친구였으니!”

전사들의 눈에 열정이 담긴다. 가냘프고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힘과 정의의 사르디엘. 그녀의 영혼 속에 잠든 대천사의 격이 깨어나며 그 영향력을 사방에 떨치기 시작했다.

-화르륵!

그녀의 머리 뒤에서 찬란한 빛이 내렸다. 사자처럼 넘실거리는 머리칼이 새하얗게 빛나고, 그 빛을 쪼인 전사들이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무기를 고쳐 잡기 시작했다.

“그대들, 북부의 영웅들이여! 죽음의 노예로 살지 말라! 일어서라, 일어서라! 우리의 운명은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으며, 하루를 겁쟁이로 연명하느니 한 순간 영웅 되어 죽으리라! 누구도,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전사들이 그녀의 연설에 맞춰 소리치며 두려움을 떨쳐냈다. 그 모습을 보던 악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곧, 저 너머. 야영지 너머에서 기괴한 진동과 소음이 울려 퍼졌다. 폭풍 아래에서 불이 꺼지듯 별빛들이 사그라지고 바람 속에 끈적한 기름 냄새, 유황의 냄새, 또는 피와 살과 진물의 냄새가 섞였다.

다가오는 악마와 절망.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더라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싸움의 종막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끼이이이익—!!

그 소리는 마치 천상이 내지르는 비명과 같았다. 아에렌은 도끼를 움켜쥐고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악마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하나라도 더 데려가겠다. 결코 홀로 죽지 않으리라.

“연설은 잘 들었네, 친구.”

그 순간. 그녀의 머리 위헤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에, 아에렌은 소름이 오싹 돋아 자신을 내려보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감동적이군. 그래, 맞아. 나는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길 바랐지. 그러니 ‘친구’. 내 친구들이여. 이렇게 사그라들기엔 너무나 아쉬운 목숨들이 아닌가. 응?”

사방으로 뻗친 더벅머리, 뼈가 드러난 얼굴과 팔다리로. 로프트는 흥얼거리듯 다가오는 악마들을 바라보았다.

“신의 전장은 신에게 맡기고, 라그나로크는 에인헤랴르에게 맡겨야 하는 법.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금껏 준비해 왔으니···. 자, 그렇지 않나 보탄? 프레이야? 바나디스, 네 힘을 빌리겠다.”

-쿠구구구궁!!

그의 몸 주위에 떠 있던 푸른 빛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비가 내리는 것처럼 작은 파란 불똥들이 그녀가 서 있는, 그녀의 전사들이 서 있는 자리 바닥 깊은 아래로 스며들었다.

악단의 지휘자처럼 로프트가 뼈가 드러난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웃었다.

“자, 바나디스. 너의 권한으로···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이 권한으로. 에인헤랴르의 전당을··· 열겠다.”

-콰드드득.

아에렌은 움찔 떨며 물러섰다. 그녀가 딛고 선 자리 아래에서 흙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곧, 뼈가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이어서 녹슨 강철 무구, 빛 바랜 갑주와 삭은 문장들···.

아아, 아에렌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바싹 마르고 삭고 썩어들어갔지만, 저 빳빳한 모직물들 아래에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문양들은 그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하자트 하란, 하자트 카잘, 하자트 투란···. 그 외의 수많은 씨족들. 이미 멸망했거나, 지금은 잊혀진 씨족들까지. 출신에 상관 없이···.

그녀와 그녀의 군사들이 딛고 있는 바닥 저 아래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해골들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머나먼 고대, 북방 만신전이 순수했던 그 시절. 명예를 위해 투쟁하던 전사들이 일어서고 있다. 에인헤랴르, 죽은 뒤에도. 세계의 종말을 막아 내리라 맹세한 전사들이 영면의 전당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영원한 투쟁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갈아 한 자루의 검으로 벼려내던 이 전사들이. 고대의 강철로 벼려진 갑주와 삭아 흐트러진 사슬 갑옷, 녹슨 철검, 근육도 혈액도 남아있지 않은 차디찬 유해.

그러나 그들의 혼과 백은 물질의 한계에 머무르지 아니하니.

-쿠구구구궁!!

악마들의 격류가 코 앞에 닥쳤다. 해골 전사들이 무구를 들어 올리고 정면을 겨누었다. 이윽고 거친 충돌이 전장을 휩쓸었다. 피와 살점, 또는 부서진 뼈들이 사방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밀리지 않는다. 이 거대한 악마의 군세 앞에서도 결코 밀리거나 분쇄되지 않으며. 해골 전사들이 묵묵히 앞으로, 느리고 힘겹더라도 한 발자국 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콰앙! 쾅! 콰지지직!

전장의 소음이 사방을 덮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침묵에 가까웠다. 전장이라면 으레 들려야 할 고함, 비명, 신음 따위의 소음은 일절 없었다.

낡고 이빠진, 녹슨 철검이 악마의 강인한 흉갑을 으스러트리고 솟아 올랐다. 끝없이 밀려드는 악마들을 막아내며, 이 고요한 전사들은 오로지 정신적인 고함을 터트리고 있었다.

[···!!]

아에렌은 멍하니 전선 앞에서 턱을 딱딱거리며 칼을 휘두르는 고대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내뱉는 정신적인 외침이 천천히,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낯선 어휘와 어투, 그리고 투박한 외침이었다. 이들은 한 마디. 단 한 마디를 끊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발—할라아—!!]

오로지 그 말 뿐이었다! 망자들의 합창은, 전투 구호는, 단말마는, 그리고 비명과 신음과 고함과 괴성은. 그 모든 어휘들은 오로지 발할라의 영광과 명예, 그리고 의무를 위할 뿐!

에다, 종말을 예언한 그 고대의 서사시 속 한 장면이, 전설 속의 장면들이 눈에 닿는 모든 전장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아에렌은 곧 정신을 다잡고, 멍하니 서 있는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가라! 선조들을 따라 가라! 물러서지 마라!”

방금까지 겁에 질리고 적의 수에 압도되었던 전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무구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눈에서 새로운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쟁의 시작이 어떠했든, 끝은 이곳일 것이며. 가장 최악의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그건 고작 죽음에 불과할 테니!

죽을 것이 뻔하다고,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다고 도망치려던 전사들. 차라리 죽는 편이 편하겠노라 자조하며 무기를 늘어트렸던 전사들마저도. 그들의 앞에 서서 나아가는 선조들을 바라보며 전의를 다잡았다.

“싸우고! 죽어라! 영원히 사는 이 따윈 없으며!”

“오로지! 영광만이 영원할지니!!”

“북부의 영웅들이여! 싸우고, 죽어라!”

“발—할라—!!”

전사들은 그들의 선조와 같은 단어를 입 밖으로 쏟아내며 일제히 전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건 라그나로크의 시작이었다. 로프트는 그 광경을 내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보탄. 이게 우리가 바라던 북부의 모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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