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90화 (191/388)

190. 칠흑의 에리크 (2)

*

[난쟁이들의 유물이로군··· 재미있는 잔재주였어.]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비늘이 돋아나고, 흩어진 피륙이 모여들었다. 꾸륵, 거품이 이는 소리가 들리며 뼈와 살이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곧, 놈의 머리칼이 다시 너울져 흘러내리고 노란 눈이 빙글 돌며 자리를 잡았다.

“뱀인줄 알았는데, 도마뱀이었군. 머리가 꼬리랑 다를 바 없나 보구나.”

[짜증나는 혓바닥을 가지고 있군. 뽑기 좋겠어.]

에리크는 크흐, 하고 웃으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놈은 짐짓 목을 꺾어 풀며 자세를 잡았다. 페르난데스는 썬더쓰로워를 허리에 차고 대검을 양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내 생전에 에리크와 검을 부딪치게 될 줄이야.’

[놈이 전성기에 비해 얼마나 약할까?]

‘약할까? 글쎄, 사다르켈리사가 아주 주의 깊게 키운 사냥개인데.’

전생 시절 인류 문명의 몰락을 알린 두 인물이 있었으니 하나는 북부의 왕, 칠흑의 에리크이며. 다른 하나는 오천 대(大)게르의 카간, 카라드스카르라. 문명 사회를 거의 박살내다시피 했던 저 두 괴물들이 특별히 놀라운 점은, 놈들이 악마의 하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저 둘은 모두 자신의 백성들에겐 ‘영웅’이었다.

산산이 조각나 서로 끊임 없이 상잔하는 백국마족의 게르들을 통합하고, 내분의 위험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진격을 시작한 카라드스카르는 물론, 에리크 또한 나날이 부족해지는 식량과 물자, 서로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씨족들 사이에서 몰락하는 북부인들을 남부로 이주시키기 위해 천명한 것이 대남진 전쟁이었다.

비록 저 둘 모두 악마 추종자들을 수하로 거두어 들였으며, 말년이 곱지 못했지만. 전성기 시절 저들은 분명코 자신의 힘과 의지, 그리고 대의를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착잡한 눈으로 비릿한 표정을 짓는 에리크를 바라보았다. 놈은 완전히 사다르켈리사에 의해 타락해 있었다.

‘우리 때문이겠지?’

-뭐, 그 외의 변수가 있었겠나.

북부 만신전의 타락엔 여러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사다르켈리사를 지키는 봉인이 약해진 이유, 그건 선신 만신전이 봉문한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사다르켈리사가 몸이 달아 직접 대륙에 간섭하기 시작한 계기는 뭄토의 죽음 탓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북부 전체를 책임지며 장렬히 산화했던 영웅, 칠흑의 에리크. 악마의 간섭, 또는 타락한 아스가르드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의 미래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철컥.

그러나, 이제와서 모두 의미 없는 이야기다. 어차피 에리크는 죽어야 했다. 그의 대남진 전쟁으로 인해 박살난 대륙 동부와 북부, 그리고 특히 제국은 추후에 몰려올 카라드스카르와의 전쟁을 막을 여력을 상실할 것이다.

그 이후엔 종말을 향해 굴러가는 눈더미 뿐이다. 카라드스카르가 파괴한 대륙엔 빈곤과 폐허만 가득할 것이고, 시궁쥐와 악마, 그리고 타락은 그런 현장을 선호하므로.

설령 에리크가 타락하지 않았었다 하더라도, 그는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다.

[기도는 끝났나, 사제?]

“그래.”

네 가능성을 꺾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라면, 이미 충분히. 페르난데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과거로 돌아와 미래를 바꾸게 된 시점에서 이미 그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짓밟으며 나아가기로 맹세했다.

그의 대의, 그의 목적에 비하자면 이건 그럴 가치조차 없는 자기반성, 또는···.

-위선이다.

‘맞아.’

위선이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를 향해 보이는 연민이 얼마나 역겹던가. 페르난데스는, 그리고 페이자쉬는 이미 전생에 그러한 이들을 너무 많이 봐왔고, 그들을 주로 장대에 꽂아 거리에 걸어 두는 편이었다.

-스릉.

대검이 허공을 그으며 위치를 바꾸었다. 상단을 막는 자세, 거의 교본에 가까운 대검 검술의 방어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순간 웃음을 흘린 에리크가 섬전처럼 달렸다.

-카아앙!!

도끼와 대검이 얽히며 불똥이 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에리크의 하얀 비늘, 그리고 먹물처럼 검은 머리칼이 물처럼, 그리고 뱀처럼 흐른다.

-샤아앗.

놈의 혀가 쇳소리를 냈다. 페르난데스는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검을 내려 그었다. 대검이 도끼의 날을 빗겨내고 빙글 돌아 목을 노린다. 하지만,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 에리크는 순식간에 공격을 벗어났다.

-카앙!

페르난데스의 반백 곱슬머리가 흩어진다. 흰색, 검은색. 그 둘의 구분이 희미하지는 어떤 한 지점에 도달해—

-콰직!

대검의 날이 도끼를 파고들었다. 놈의 도끼가 뒤로 크게 튕겨나가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그대로.

-카앙! 캉! 콰드드득!

강철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듯이,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에리크의 가슴을 깊게 쪼개어 놓으며 위로 치솟았다. 에리크는 쿨럭, 하고 핏물을 토해내고는··· 웃었다.

[훌륭하군. 사제.]

-꾸드득.

그대로 도끼가 날아들었다. 일반적인 생명체였다면 당장 빈사에 빠졌을 중태에도, 에리크의 도끼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달려 들었다. 도끼를 간신히 막아 흘리며,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불사의 축복···.”

그 말을 들으며 에리크는 비릿하게 웃었다. 처음 목이 날아갔을 때 어느정도 눈치를 채긴 했지만···. 페르난데스는 이젠 숫제 몸을 깎아내며 달려드는 에리크의 공세를 연신 막아내고는 혀를 찼다.

‘까다롭군.’

-하하, 반대 상황이 되어보니 어떤가?

‘확실히 짜증나는 축복이야.’

에리크는 당초에 페르난데스가 즐겨 쓰던 전술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사소한 공격을 모조리 몸으로 맞으며 살을, 아니 심지어는 뼈를 주더라도 적의 뼈를 깎는다는 식의 싸움이었다.

뻔한, 그러나 대응하기 극도로 까다로운 공격법이었다. 차라리 놈이 몸만 믿고 밀어 붙이는 악마들과 같았다면 수월했겠으나, 놈은 지독하게 예민하고 날렵한 전투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콰드드득!

도끼를 대검 끝에 걸었다. 디모니카의 반사신경이 만들어낸 정교한 기예였다. 칼 끝을 쳐 날리며 그대로 목을 찔러 넣었다. 에리크는 굳이 방어하지 않으며 몸을 오히려 깊게 파고들었다.

[잡았다.]

“아니, 잡혔지.”

-꾸득.

페르난데스의 팔뚝에서 힘줄이 꿈틀거린다. 놈의 몸이 날렵하고 재빠르다는 것은 도리어 놈의 약점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대로 에리크의 몸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 꽂았다.

[크흡···!]

“몸에 칼을 박고 끌어당기는 것, 이미 해봤다.”

죽지 않으리란 보장만 있다면, 그리고 사소한 통증을 무시할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전투법이다. 당연히, 페르난데스 또한 해본 적 있는 방식이다.

-콰아앙!

으스러질 듯 꽉 움켜쥔 주먹이, 건틀릿 채로 에리크의 미간을 내려 찍는다. 다시, 쾅, 쾅, 쾅. 망치질을 하듯이, 완벽하게 조여진 마운트 포지션에서 페르난데스는 한 손에 대검을 놈의 목에 박아 넣은 채로 주먹을 내려 꽂았다.

[크흐으···!!]

발작적으로 놈이 도끼를 휘둘렀다. 페르난데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도끼가 갑옷을 으깨며 어깨에 틀어 박혔다. 그러나, 멈춤 없이 다시금 주먹을 휘둘러 꽂아 넣는다!

-콰앙!

먼지가 풀썩 일고, 놈의 몸이 경련했다. 불사라 하더라도 통각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통각을 이겨낸다 하더라도 감각기관이 충격으로 마비되는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에리크는 연신 눈 앞에 새하얗게 질리는 감각 속에서 움찔 떨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직!

마침내, 한 번. 도끼가 페르난데스의 목을 쳤다. 이겼다. 뭉개진 얼굴 아래에서 에리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 하하, 하하하! 튼튼하지만 아둔하구나!]

-꾸드득.

페르난데스의 목에 박힌 도끼를 뽑아내며 에리크가 떨었다. 이 쾌감, 이 감각. 생명이 넘쳐 흐르는 이 감각, 죽음을 등에 지고 위태하게 걷는 이 감각이 짜릿했다.

[아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이제 뒤졌다는 느낌도 알려주지.”

-콰아앙!

망치처럼 단단하게 움켜쥔 주먹이 그대로 내려 꽂혔다. 에리크는 바닥에 처박히며 끅, 하는 소리를 질렀다.

[어, 어떻게?]

“나도 해봤다니까.”

찢어진 목을 우득 돌려 붙이며 페르난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슴팍에 품고 있는 로프트의 겨우살이 나뭇가지가 조금 짧아진 것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오랜만에 죽어봤군.’

-익숙해지면 안 된다.

‘알아, 로프트는 완전히 믿을 수 없지.’

목의 상처가 빠르게 달라붙으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뜯어져 나간 혈관이 이어 붙으며 혈류가 뇌리에 돌아 차갑게 식어가던 머리가 뜨겁게 달아 올랐다.

-꾸드득.

에리크는 목에 대검이 박힌 채로 억지로 몸을 틀어 뜯어버리고는 잠시 굳어 있던 페르난데스에게서 빠져나갔다. 놈의 머리가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차갑게 그의 주위에 몰려드는 마력을 바라보았다.

‘축복이 영혼에 한정되어 있군.’

-육신은 관문에서 공급받은 마력으로 조형하고 있어.

‘좋아. 놈의 본체는 놈의 영혼 또는···.’

-관문 그 자체.

머리를 잃고도 기억과 감정, 감각의 누수 없이 그대로 육신을 복구하는 종류의 불사. 그것은 베이타서스의 축복을 입었던 시절의 페르난데스에게도 어려운 수준의 고등한 축복이다.

죽음은 어떤 순간에 확정되는가. 단순히 숨이 멎는 순간에? 혈액이 응고하는 순간인가? 심박이 멈추는 순간? 또는, 육신이 부패하는 순간? 죽음은 대단히 애매하고 관념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같아 보이더라도 불사는 그 개념마다 다른 특질을 지닌 별개의 축복이다. 페르난데스가 베이타서스에게 받았던 축복은 ‘복구’였다. 치명상을 입은 시점에서 그 직전으로 육신의 시간을 되돌리는 종류의 것.

그러나 에리크의 축복은 ‘고정’이다. 육신이 아닌 영체를 현세에 강제로 고정시키는 종류의 것이다. 육신을 완전히 상실한 영체는 영, 성, 백, 혼으로 나뉘어 흩어지기 마련. 에리크는 영체를 현세에 고정시키고 관문의 마력을 통해 파괴된 육신을 수복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한 불사란 존재할 수 없다. 저 천상의 대신들조차도, 저 무저갱의 대악마들에게도. 일견 무한하게 보이는 천구 저 너머의 별들마저도 언젠간 빛을 다한다.

하물며, 일개 필멸자에 불과한 우리에게야. 페르난데스는 에리크를 바라보며 대검을 치켜 올렸다. 잘 죽지 않는 괴물끼리 치고 받아 보자고.

*

“돌아가야 합니다.”

키르하스는 능선까지 병력을 이끌고 후퇴하던 와중에 말머리를 돌렸다. 관문에서 쏟아져 나온 악마들은, 일부는 흩어지고 일부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 대부분은 야영지 외부에 둘러쳐진 전선에 들이 받고 있었다.

일견 수월히 막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악마들은 관문이 열릴 때 마다 끝이 없는 듯 쏟아졌고, 그에 반해 해골 군단은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젠 전선에 열린 틈을 비집고 평야 너머로 달려나가는 악마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언젠간 붕괴할 것이다. 비단 키르하스의 전술 판단력이 아니더라도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그 광경을 내려보며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이, 북부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다.

“퇴각해서 병력을 추스르고···.”

“아벨.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너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이 병력을 이끌고 간들 그건 장렬한 옥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우리의 뒤에는 생존이 있을지라도 승리는 없습니다. 승산은 오직 정면에 있을 뿐.”

-키이잉.

키르하스는 장검을 뽑아 정면을 가리켰다. 관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영향력이 느껴져 몸이 오싹 굳었다.

“저 지점. 보이십니까?”

“···그래.”

그곳에선 페르난데스와 에리크가 싸우고 있었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는 먼 거리였지만, 키르하스와 아벨에게 이 정도 거리는 충분한 수준의 가시범위에 해당했다.

그건 끔찍한 싸움이었다. 서로의 몸에 오직 칼을 한 번 더 박아 넣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방어를 도외시한 혈투였다. 검술의 기예는 그 근간을 보호에 우선시 한다.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유효타를 넣으려는 시도가 검술의 시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들의 싸움은 더 이상 기술의 영역에 있지 않았다. 오로지 야성과 야만에 의존한 혈전 뿐이었다.

아벨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옳다. 저 자리에 설령 죽음만이 우릴 기다린다 하더라도, 패배와 절망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그이를 홀로 둘 수는 없겠구나.”

“예, 아벨.”

두 사람은 말을 몰아 다시금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