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칠흑의 에리크 (3)
*
도끼날이 빛을 난반사시키며 떨어져 내린다. 뒤이어 맞서 대검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방어를 무시한 공격, 공격, 공격!
-촤악!
피가 튄다. 그보다 빠르게 놈의 육신이 되돌아온다. 갈빗대를 썰며 파고들었던 대검이 그 결에 튕겨져 나왔다. 이쪽 역시 마찬가지로, 도끼 날이 어깨를 내려 찍었다. 왼팔이 떨어져 나가며 허공을 빙글 돌았다.
-착.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공중에 잠시 던지고, 그대로 왼팔을 잡아 상처 부위에 가져가 댔다. 상처가 순식간에 이어 붙는다. 이쪽의 경우, 흘러내린 혈액은 복구할 수 없지만 육신의 손실을 즉각적으로 수복할 수단 정도는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전투의 양상은 오로지 서로를 향한 순수한 파괴 뿐이었다. 에리크는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괴물 같은 녀석.’
에리크의 삶에서 이토록 치열한 전투는 처음이었다. 그는 점점 무뎌져 가는 감각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의 파충류처럼 변한 얼굴 덕에 표정이 놈에게 드러나진 않았겠지만, 그는 지금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 내가 수읽기에서 밀리고 있다고!’
에리크가 바라보는 페르난데스의 몸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순히 위축된 탓이 아니다. 실제로 놈의 공격이 그의 감각보다 더 앞서 다가와 몸을 할퀴고 있었다.
부활을 거듭할수록 무뎌져가는 감각 때문일까. 에리크는 뜨겁게 휘발되는 이성을 느끼며 보다 더 조급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카직!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도끼의 옆면을 긁어내며 뻗어왔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공방의 일체. 야만성을 그대로 내비치는 이 치열한 격검 속에서도 놈의 공세는 검술의 이치를 따르고 있었다.
-캉!
대검이 도끼를 튕겨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에리크는 뺨의 비늘 몇 장이 뜯겨 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지쳤나.”
[요르문간드의 마력이 있는 한, 나는 무적이다!]
“실험할 가치가 있겠군.”
[···뭐?]
에리크는 당황 속에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검을 세운 채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갑주와 피부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전신이 누더기인 채로, 간신히 회복되어 가는 옛 상처들과, 그 위에 새로이 덮여 가는 새 상처들을 온몸에 끼얹은 채로.
“내게 그런 말을 했던 놈들 중에, 정말 무적이었던 녀석이 없었으니. 너는 다를지 시험해봄직 하다.”
[오만한 놈!]
에리크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쉿쉿거렸다. 분노로 인해 이성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지옥 마력이 불러 일으킨 끈적한 광기가 몸을 사로잡았다.
-놈을 막아라.
그의 귓가에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낱같이 남은 이성은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에리크는 어쩌면, 체념한 것처럼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
혈액의 누수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차라리 죽음보다 이쪽이 더 괴로웠다. 페르난데스는 이젠 거의 잔상만 보이는 시야를 애써 붙잡으며 혀 끝을 씹었다.
저릿한 통각이 일시적으로 정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동시에—
-캉!
반사적으로 휘두른 대검이 놈의 도끼를 막아낸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나아가 놈의 정수리를 향해 올곧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에리크는 뱀처럼 휘몰아치며 공격의 틈 사이를 빠져나갔다.
막을 필요는 없다. 치명상은 아닐 것이다. 전사의 전투는 자기보신을 우선으로 두지만, 마법사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마법사는 버림패와 승부수를 구분할 줄 아는 족속이며, 스펠카운팅의 정점에 있었던 그에게 있어선 이는 본능에 가깝다.
-콰직!
도끼가 옆구리를 깊게 쪼개고 지나쳤다. 피가 울컥이며 쏟아지는가 싶더니 곧 아물었다. 공격을 허용한 대가로, 페르난데스의 대검이 에리크의 척추를 반으로 가르고, 깔끔하게 걷어 차 놈을 튕겨냈다.
[크흡···!]
에리크는 헐떡이며 자세를 추슬렀다. 거의 동시에 관문의 마력이 놈의 육신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 또한 상처가 아물고 있었지만··· 혈액의 손실이 이젠 정말 위험한 수준까지 다다랐다.
디모니카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치유력과 내구성, 그리고 로프트가 선사한 불사의 축복이 만들어낸 조화였다.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은 로프트에 의해 수복되고, 감당할 수 있는 상처들은 디모니카의 신성이 치유해 나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지금 페르난데스는 거의 트롤에 근접한 자기수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부서진 뼈가 붙고, 찢어지고 터진 상처가 이어진들, 이미 흘러내린 혈액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손발 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얼굴 근육이 굳어버린 탓에 블러핑은 완벽했지만, 승산은 희박했다.
-계속 이렇게 싸울 순 없어.
‘나도 아는 걸 다시 말해줘서 고맙군.’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축복이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다섯 번쯤.
로프트의 가호는 무한하지 않다. 그가 건넨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승부를 걸어야 할 타이밍이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헐떡이는 에리크를 삐뚜름하게 바라보았다.
-스르릉.
그리고 대검을 납도했다. 그 광경을 보며 에리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곧, 놈의 머리칼이 빳빳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이 노옴! 날 얼마나 더 모욕할 셈이냐!]
“널 모욕하는 데에 내가 가세할 필요는 없다. 에리크. 너 스스로가 너를 모욕하고 있으니.”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왼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들려 올라갔다. [축조].
-착.
한 수, 한 수. 정성스럽게. 떨리는 손과 무딘 감각으로도 장인의 솜씨로 마력이 얽힌다. 청동 왕좌의 마력 회로가 맹렬히 돌아가며 주위에 만개한 지옥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쿨럭.”
핏물이 목구멍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아깝다. 페르난데스는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혈액의 누수가 심각한 상황에서 마력이 스며들며 디모니카의 신성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내장 조직이 찢어져 나가며 선혈을 울컥거리고 있었다. 생명이 빠르게 식어간다. 그리고 사라지는 생명의 빈자리에 정비례하여—
-화르륵!
그의 머리 뒤에 검은 헤일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리크는 그 광경을 보며 달려들었다. 놈이 무엇을 준비하든, 갑작스레 빈틈을 보인 지금이 기회다!
-후우웅!
에리크의 도끼가 페르난데스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어떤 거목이라도 단숨에 쪼개어 놓을 법한 강대한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놈은 이걸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가만히 허공에 멈춰 있던 페르난데스의 왼손이 빛살처럼 다가와 허공에서 에리크의 목을 잡아 챘다.
[컥!?]
-우득.
에리크는 소년의 몸을 가지고 있다. 반면 페르난데스는 디모니카 치고는 다소 작은, 그러나 평균 남성보단 확실히 우월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 에리크의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쓸모···없는··· 발악을!]
“생각보다 가볍구나.”
페르난데스의 머리 뒤로 떠오른 헤일로가 하늘을 살라먹듯 타올랐다. 우드득, 왼손에 잡힌 목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리크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페르난데스의 오른손을 보았다.
수인을 짚고 있는 손은, 지옥 마력의 침착으로 거미줄 같은 실선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퍽,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의 한쪽 눈이 저 스스로 터져 나가며 검은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어리다.”
페르난데스의 이마 한 가운데가 저 홀로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비전 시야]가 그의 이마에서 반짝이며 나타났다.
혈액 누수로 시력이 부족하다면, 마법으로 기능을 대신한다. 전신의 힘이 빠져나간다면 마력을 때려 박아 움직인다. 제 몸 자체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여, 한계에 가까운 출력을 내고 있었다.
-우드득.
에리크는 압착기에 목이 짓이겨지는 느낌을 받으며 발악했다. 도끼가, 발이, 주먹이 그의 가슴과 배, 어깨와 머리를 때리고 찍었다. 그 공격을 모두 받아내며, 페르난데스는 그대로 에리크를 바닥에 처박았다.
-쾅!
[크으악!]
“네 영혼은 구원받을 여지가 없다. 에리크, 설령 네 스스로 회개한다 하더라도. 네가 개종한다 하더라도. 이미 네 스스로 널 구원할 시기는 지났어.”
[개소리··· 개소리!]
에리크는 핏발 선 눈으로 소리지르며 저항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은 채 그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고, 연신 바닥에 그를 내리 찍었다. 끊임 없이 부서지고, 수복되며, 점차 놈의 몸이 원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젠 거의 비늘 덮인 살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놈은 그럼에도 야성을, 분노를, 그리고 광기를 품은 채로 증오심을 담고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페르난데스.
‘알아, 이건 위선이야.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를 연민하는 꼴이 얼마나 역겨웠던가.’
페르난데스는 발작하는 에리크를 바닥에 찍어내고 발로 밀어 눌렀다. 소드벨트에 매달려 있는 썬더쓰로워를 집어 들었다. 텅 빈 약실에 탄환이 하나 물렸다. 철컥, 복잡하고 정교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탄환이 약실 내부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봐.’
전생 시절의 에리크는 북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투쟁하던 용사였다. 북부의 왕, 대야를.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악마의 농간 속에 놀아난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무수한 파괴로 인해 형체를 잃고 뭉그러진 살더미. 그것은··· 그것은. 어쩌면 아들의 최후와 닮아 있었다. 광기에 잠식된 두 눈을 내려보며, 저주를 퍼붓고 침을 흘리는 입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눈을 감은 채로 총구를 가져갔다.
“선신 만신전이 보장하는 권한으로 널··· 성사해주마. 스스로 기도하겠나.”
[나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로프트.”
이제 거의 끄트머리만 남은 겨우살이 가지가 부르르 하고 떨렸다. 어느새, 그의 곁에 로프트가 나타나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 도움이 필요한가, 친구?”
“불사는, 죽음의 반대항이다.”
“그래, 맞아. 그렇지.”
“내 축복을 거둬가라. 네가 이걸 내게 건넬 때, 이 순간을 바랐던 게 아니었나?”
“애초에 겨우살이 가지는 발두르, 그 멍청한 꼬마를 죽이려고 준비한 것이었지만··· 뭐, 결과적으로 보면 동일하지. 좋아. 그렇게 하자고.”
로프트는 손뼉을 짝 치며 웃었다. 겨우살이 가지가 가루로 변해 흩어지며, 썬더쓰로워의 총구 끝에 스며들었다.
-그건 마지막 보루였는데.
‘우리에게 언제나 모든 순간은 마지막 보루였어.’
이제 또 다시 필멸자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일 뿐. 바뀌는 것 따윈 없다. 페르난데스는 헐떡이는 에리크의 미간에 총구를 밀어 넣고는 속삭였다.
“네 업은 내가 이으마.”
[널 증오한다. 이 세계도, 신들도! 나는, 나는 이 북부를···!]
“내가 해주마.”
-탕!
총의 반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 말단까지 찢어진 왼팔을 마력으로 이어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던 탓에. 그의 몸에서 더 이상 감각을 수용할 기관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리크의 죽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아들의 목숨을 끊었던 그 순간처럼.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의 몸 위에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식량이 고갈되어 가는 싸늘한 북부. 여름에도 볕이 들지 않는 지옥 같은 땅. 영원한 투쟁만이 영광을 증명하기에 언제나 서로를 향해 칼자루를 돌리며, 민족 전체의 역량을 끊임 없이 깎아들어가는 백성들.
그 사이에서 전투로 아비를 잃은 어린 소년은, 그 시절의 에리크는 굶어 쓰러진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며 생각했었다. 이들을 구원하리라.
발두르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총구 끝을 스쳐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기억들을 곱씹고 있었다. 에리크의 영혼이 조각나며 그 혼백이 그에게 빨려 들고 있었다.
잠시, 전율이 일었다. 멈춰가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북부인 특유의 강인한 분노가 그의 감정을 덧칠해가고 있었다.
증오와 광기가 그의 영혼을 뒤틀기 위해 손을 뻗어내는 듯 했다.
-페르난데스.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의 전생, 그리고 그로 인해 뒤바뀐 미래.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 이 모든 것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민한다. 공감은 이해에서 나오며, 영혼이 섞이는 이 순간 그는 에리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증오와 분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철컥.
썬더쓰로워를 다시 벨트에 걸고서, 천천히 대검을 뽑아 들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며 전신에 혈액을 급여하기 시작했다.
“로프트,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문을 열어라.”
“오, 친구. 항상 험지로 몸을 던지는군. 목숨이 수십 개는 되는 줄 알겠어.”
로프트가 키득거리며 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관문의 끄트머리에 앉아서 살점으로 이루어진 문을 쓰다듬었다.
“아, 발두르. 이 모자란 것. 왕이 되겠다는 놈이 고작 해낸 것이 비프로스트였느냐.”
로프트가 손뼉을 치자 천천히 관문 너머에서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