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보탄
보탄의 요새는 방어를 위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과시욕과 지배욕을 벼려 낸, 하늘을 향한 어금니처럼 보였다. 갤러리엔 죽은 전사들의 해골들이 장대에 걸려 부패하고 있었고, 까마귀들이 그 사이를 날아다녔다.
요새로 이어지는 길은 악마의 시체로 덮여 있었다. 강철과 바위가 어지러이 흩어져 지반을 이으며 아치형 다리를 그렸고, 그 아래로 용암이 흘러내렸다.
-쿠구구궁…….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지진이 이따금씩 대지를 흔들었다.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의 팔에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나?
‘뭐가.’
-고통.
흑마법사는 고통에 대단히 익숙한 이들이다. 악마를 위한 제물로는 피, 영혼, 육신 따위가 우선되고, 이것들을 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해였으니.
페이자쉬의 온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문신들은 비단 주술적 의미만을 내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해로 인한 수많은 흉터들을 덮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농담에 가까웠다. 날 서고 예민해진 페르난데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농담이다. 따라서, 페르난데스는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디모니카의 육신을 얻고 나서 가장 좋았던 점이 셋 있다면, 적은 수면욕, 빠른 회복력, 그리고 강한 인내심이야. 설령 양팔이 모두 으스러지더라도 견딜 만하다.’
-그건 다행이군. 아, 그래. 디모니카 놈들이 이상하게 터프하긴 했지. 아무리 힘들여 사지를 찢어도 꿋꿋하게 덤비던 놈들이었으니.
페이자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과장된 몸짓에 페르난데스는 큭 하고 웃었다. 덕분에 정신이 조금 더 맑아졌다.
-욱신.
그렇다 하더라도 통증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사용하던 신체 기관이 망가졌다는 것은, 단순한 신경성 통증 이상의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본능적으로 팔을 움직이려 들 때마다, 걸음걸음마다 고통이 밀물처럼 뇌리를 적셨다.
그러나, 아직은 견딜 만했다. 페르난데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점차 걷는 데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었다.
“은공. 제가 있습니다.”
페르난데스가 호흡을 다스릴 때마다 키르하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마치 기운을 전달하려는 듯이 작지만 강인하게 되뇌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제법 도움이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밀어냈다.
“으, 은공?”
“혼자 걸을 수 있다. 키르하스. 혼자 걸어야 하기도 하고.”
-스르릉.
왼팔을 등 뒤에 돌려, 대검을 끌어내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시리게 들렸다. 키르하스는 당황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궁…….
보탄의 요새로 향하는 길, 그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붉은 녹이 유화처럼 번져 있는 거대한 강철 문이, 그들의 접근에 발맞추어 느리게 열렸다. 키르하스는 그 광경을 보며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은공, 제 곁에서 멀어지지 마세요.”
“하하, 키르하스……. 네가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키르하스는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한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만하기도 하구나. 보탄.”
거대한 문 너머, 길게 늘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회랑의 끝에. 황동과 강철로 이루어진 제단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긴 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 노인이 그들을 내려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만함이라……. 글쎄, 당연함이 아니겠느냐.]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결코 소리 높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먼 거리를 꿰뚫고 그들에게 닿았다.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불었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는 나의 영역이며, 너희는 불청객에 불과하다. 필멸자여. 오만, 오만이라. 나는 아시르의 왕이며, 승리와, 전쟁과, 전사와, 마법과, 신비를 관장한다. 모든 아시르 중 나보다 오래된 자 없으며, 나보다 위대한 자 역시 없노라.]
-끼이이익……. 쿵.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회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등 뒤에서 대문이 닫혔다. 녹슨 경첩이 비틀리며 저 스스로 잠기고, 철창이 내려와 문을 틀어막았다.
“은공. 갇혔습니다.”
“내가?”
페르난데스는 왼손으로 능숙하게 대검을 빙글 돌려 고쳐 잡았다. 그는 빠르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결코 만전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적은 제 영역을 온전히 구축한 마법사이자 영성의 끝에 도달한 신이다.
-신을 죽인 적은 없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겠군.’
보탄의 몸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진득한 지옥 마력의 악취가……. 흑마법사의 경험과 디모니카의 후각이 겹쳐지면, 결코 오인할 수 없는 타락의 악취가 느껴졌다.
그리고, 타락이란 어떤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같은 결과를 낳는다. 자기 파괴라는 결과를. 자신의 힘이 늘어나고, 수많은 비의를 접하더라도. 지옥 마력에 의한 힘은 제 영혼을 저당 잡히며 얻어낸 부채에 불과하다.
“네 동족을 얼마나 죽였지?”
[셀 수 없이.]
“얼마나 많은 영혼을 제물 바쳤느냐?”
[셀 필요도 없을 만큼.]
마치 시구를 건네듯 둘의 대화가 맞물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가까워졌다. 친선 대련을 하듯 서로에게선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익숙함뿐.
[네게선 익숙한 느낌이 나는구나. 너는…… 지옥의 비의를 익혔군. 네 영혼의 결에서 씻을 수 없는 죄악이 보이는구나.]
보탄의 외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세 눈이 달린 까마귀가 그의 어깨 위에 퍼득거리며 내려앉았다.
“한때는.”
[이 힘을, 이 지식을 갈구했었다면 알고 있겠지. 네겐 승산이 없다. 하지만 네 영혼의 격을 높게 사겠다. 위대한 뱀 또한 네게 관심이 많으시다는구나. 자……. 네 곁의 그 계집을 참하고, 내 앞에 무릎을 꿇거라.]
-후우웅…….
한순간, 페르난데스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끈적하고 뜨거운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대검을 쥔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으득, 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법이다. 정신계 마법의 일종이군. 이 요새, 이 회랑에 배치된 장식물들과 요새의 구조가 얽히며 일종의 공방을 이루고, 그 가운데에서 보탄은 단지 언령만으로 심령을 제압하고 있었다.
“크윽.”
“정신 똑바로 차려라, 키르하스.”
키르하스의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보탄은 다만 페르난데스에게만 마법을 건 것이 아니었다. 키르하스는 어금니를 바싹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보탄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 죽여라.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속삭임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감각이 들었다. 페르난데스는 실체가 있는 진동이 아니란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영혼의 깊은 곳, 본능의 영역에 직접 놈이 언령을 새기고 있었다.
“닥쳐!”
-챙!
대뜸, 키르하스가 칼을 뽑아들며 으르렁거렸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는 사납게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보탄이 비죽 웃었다.
[의지가 견정한 아이로구나. 자, 필멸자여. 네 영혼의 격, 그 아슬한 경계를 내가 허물어 주겠노라. 나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추어라. 아시르의 권위에 복종해라. 내 너에게 진정한 힘의 편린, 루네글리프의 지혜를 하사하겠노라.]
“이미 익혔다.”
[뭐?]
페르난데스는 부들부들 떠는 키르하스를 옆으로 밀었다. 상처 가득한 육신이 아찔하고, 대검을 쥔 팔이 멀게만 느껴졌다. 힘들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유혹은, 힘과 안온함을 약속하는 저 유혹은 강렬했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당하는 편보다 타인을 유혹하는 편에 가까웠다. 힘을 빌미로 하는 약속, 권력을 보증하는 어음, 안전을 보장하는 계약……. 그곳의 끄트머리엔 언제나 그가 있었고, 상대는 그의 계약서에 날인을 찍는 입장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괜찮다. 고작 정신계 마법이라면. 광기와 유혹이라면 익숙하기까지 하다. 이건 흑마법사의 전술이었고, 그는 그런 전술에 통달했다.
“천상 전쟁 시절을 기억하나, 아시르?”
[나는 그 시절 너머, 상고와 태초의 비전으로부터 탄생했노라.]
“그렇다면 말레이른이라는 엘프를 알겠군.”
[저 스스로 일천 가지 마법의 달인이라 주장하던 어린 신살자 말이구나. 제 신을 참살하고 신성을 강탈할 정도로 영민한 아이였지.]
-화륵.
페르난데스가 검을 쥔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팔뚝에 감겨 있던 붕대들이 한 꺼풀씩 저 스스로 타오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 문신이 빼곡히 박힌 피부가 드러났다.
말렌글리프. 말레이른이 북부의 루네글리프를 연구해 집대성한 새로운 주술 체계. 그 이해의 기반은 루네글리프에 있었으니. 결이 같고, 인과가 정해진 마법의 구조에 대하여, 설령 그것이 신의 주술이라 한들.
-파지지직.
만류귀종이라. 세계에 산재한 수많은 마법 학파들. 개중 악마와 지옥의 비의를 담은 일흔다섯 가지 학파의 주문. 그 안에서 다시, 추리고 추려 열다섯 핵심 파벌들…….
그 모든 학파의 모든 주문, 모든 의식과 제의를 모아 정수로 짜내어 창시한 학파. [엔소서리].
붕대가 모두 잿가루로 변하며 떨어져 나가고, 문신이 한 문장씩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로 헤일로가 타올랐다.
[마법사……? 하, 감히 마법의 아시르에게 마법으로 대항하려 든단 말이더냐?]
보탄이 이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페르난데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철컥, 칼자루가 차가운 소리를 냈다.
엔소서리의 종사로서, 그의 말년. 마침내 하나의 학파를 창시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을 그 시점에 그는 이미 마법전의 영역에서 적수가 없었으니.
페르난데스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팔을 들어 올린 채로 보탄을 노려보았다.
“정말 현명하다고 여겼나? 네가 얻은 그 힘이, 정녕 네 것이라 여겼나? 네 손에 쥐어진 힘은 쉽게 얻은 만큼 쉽게 사라질 수 있으며, 그 힘을 얻기 위해 네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법. 나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 이 마력은, 이 세계는 나에게 복종한다!]
-쿠르르릉!
보탄이 소리 지르며 창을 휘두르자, 대기가 뒤흔들리고 돌연 암녹색 벼락이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강대한 힘을 품은 벼락이 한순간 사방을 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보탄은 그 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오만한 것, 네가 감히 내게 설교를 하느냐! 네 약함을 깨닫고, 비참함 속에 죽어라!]
“부디 그렇게 해라.”
-화륵.
벼락이 사라진 곳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페르난데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연신 수인을 바꿔 짚으며 한 걸음씩 보탄에게 다가갔다.
[죽어라! 죽어!]
-쾅! 콰아앙!
벼락이 치고, 강철 송곳이 튀어나와 찔러 들어오고, 검은 사슬이 사방에서 조여 들어 휘감고, 녹색 안개가 쏟아졌다. 이 모든 공격을 퍼붓는 동안 보탄은 수인을 맺지도,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다.
이곳 이 요새가 바로 그의 영지였으며, 이 대기의 마력은 모두 그의 언령에 복종하고 있다. 사다르켈리사가 선사한 지옥 마력의 통제력이 그의 심장을 달구며, 엄청난 전능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나는 무적이다. 보탄은 한순간에 수십 가지 공격 주문을 쏟아부으며 웃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공격이 사라진 곳에서. 페르난데스가 다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어째서……?]
“본디 마법이란 신비롭고, 음산하며, 그 격이 고아하여 범인의 이지에 닿지 못해야 하는 법. 너는 스스로 신위를 박차고 떨어져 나왔으니. 네가 얻은 그 힘은 상승이 아니오, 오직 네 신성을 불태워 만들어진 잔상에 불과하다.”
손이 허공을 빙글 돌아 수인을 짚었다. 극도로 정밀한 마력 쐐기가 허공에 맺히는 다른 주문을 타격하고, 무효화시켰다. 모든 공격에 대하여 주문이 매듭지어지는 속도에 거의 어떤 시간 차도 없이 마력 쐐기가 틀어박혔다.
주문이 깨어지며 지옥 마력이 화려하게 비산했다. 마치 빗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파괴된 주문의 잔향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를,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걸어갔다. 보탄이 고함치며 주문을 맺으면, 동시에 페르난데스가 그 틈을 찢고 마법을 파괴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이제 그들의 거리는 숙련된 전사라면 닿을 수 있을 수준의, 지척에 가까운 간격뿐.
“동족 살해, 신위의 포기, 악마와의 결탁, 사욕을 위한 살인과 학살, 방화와 방조, 협박과 간계로 물질 세계의 도리를 어지럽힌 그 죄로, 이단 재판을 시작하겠다. 보탄.”
[마법사 주제에! 네가 무슨 권리로 신을 심판한다는 것이냐! 나는 북부 거신족들의 왕이오, 판관이오, 곧 율법이니라!]
“신이란!”
페르난데스는 대검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신이란 다만 군림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신은 신도들의 등대이며, 또한 모범이어야 하는바. 너는 더 이상 신이 아니오, 그저 영락한 잔재에 불과하다! 힘을 위해 신성을 포기하고, 그 탓에 도리어 약해졌구나. 보탄!”
[닥쳐라!]
-쒜에엑!
보탄이 한순간에 창을 휘둘러 찔러 들어왔다. 페르난데스는 왼팔을 틀어 공격을 튕겼다. 묵직하게 얽힌 힘이 순간 팔을 짜르르 울렸다. 과도한 루네글리프 주문 사용으로 왼팔의 신경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법전보다 오히려 육박전이 더 힘들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랬듯 보탄 또한 마법사이며 동시에 전사였고, 타락으로 약화된 신성 탓에 주문 자체의 격이 떨어졌다 한들. 타락이 주는 물리적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보탄은 산을 찢고, 성벽을 허물 기세로 창을 휘둘렀다. 캉! 맑은 소리와 함께 대검이 치켜 올라갔다. 힘이 부족했다. 한 팔로는 모자라다. 페르난데스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축 늘어진 오른팔을 느끼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쒜에에엑!
[네 입담의 절반만큼도 힘을 쓰지 못하는구나! 좋다. 이제 연극은 끝이다!]
보탄은 괴성을 지르며 창을 찔러 왔다. 피하기엔 늦었다. 차라리 한 번 찔린다는 각오로 몸을 던져—
“은공.”
그때, 그의 오른팔을 감싸 쥐며 키르하스가 뛰어들었다. 그녀는 날아드는 창을 예리하게 튕겨 내며 그의 앞에 섰다.
[하찮은 버러지들이 감히!]
보탄이 다시 주문을 짜 올렸다. 페르난데스라면 몰라도 저 수인족 계집은 간단한 정신계 마법으로도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의 주문이 빠른 속도로 맺히며 허공 위에서 마력을 얽기 시작했다.
-콰직!
그러나, 그 사이로. 마력이 이어지는 마디와 마디, 어절과 어절 사이로 쐐기들이 틀어박히며 마법이 깨어져 나간다. 지옥 마력이 오색 빛으로 산란하며 쏟아지고—
“네가 내 방패가 되어라. 키르하스.”
“은공께서 방패가 되시지요. 칼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 당찬 말에 페르난데스는 픽 웃었다. 그는 키르하스의 뒤에서 대검을 놓고, 빠르게 소드벨트로 손을 얹었다. 철컥,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키르하스의 어깨 너머로 팔이 올라갔다.
정교한 톱니바퀴가 얽히며 돌아갔다. 한때 대악마를 봉인한 적 있던 드워프들. 그들의 마법 공학의 정수가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 위로, 주문을 덮어씌운다. [축조], [파괴], [단절], [등대]!
-챙!
보탄의 창은 키르하스의 칼에 막혀 튕겨 나가고, 거친 힘이 키르하스의 몸을 뒤흔들었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핏물이 배어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어떻게든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러니, 주인 된 도리로 호응해 주어야겠지. 철컥. 약실에 탄환이 걸리고 톱니바퀴가 돌며 해머를 올려 고정했다. 방아쇠울을 반 바퀴 쓰다듬으며 미끄럽게 그 안으로 검지가 파고든다.
놈과 지옥의 연결. 신성을 포기하며 얻어낸 사다르켈리사와의 단말. 그 마디를 찢어 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페르난데스는 지옥 마력이 휘몰아치는 회랑에서 천천히 숨을 멈추고, 가늠자를 노려보았다.
보탄이 창을 들고, 던지려는 듯 팔을 치켜 올리는 순간—
“만신전이여 가호하소서. 개자식아. 사형을 선고한다!”
-타아앙!
키르하스의 어깨에 얹은 손, 그 끝에서 폭음이 울리며 보탄의 목이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