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96화 (197/388)

196. 지혜의 샘물

“후…….”

페르난데스는 귀를 막고 끙끙거리는 키르하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소드벨트에 썬더쓰로워를 걸었다. 키르하스는 바로 옆에서 격발된 포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목이 터진 보탄이 풀썩, 하며 쓰러졌다. 놈의 찢어진 목으로 마력과 신성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놈의 몸을 향해 걸어갔다.

[흐……. 후…….]

보탄은 피를 쿨럭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북부 만신전의 지배자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그는 핏발 선 눈을 대굴거리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몸 위에 그림자가 졌다. 페르난데스는 한 손에 대검 칼자루를 쥔 채로 그를 내려 보았다. 곧, 보탄의 눈이 점점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내 심장을 찔러라.]

“어차피 넌 죽는다. 그리고 단번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 자비롭지.”

[아니. 심장이 파괴되어도 살 방법은 있다. 하지만 내 심장에 요르문간드의 낙인이 있어. 어서 찔러라.]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칼자루를 돌렸다. 대검이 빙글 돌며 그대로 보탄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우득, 하고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법이 끊어지는 소리도.

[크흑……. 그래……. 연극이 끝났군.]

보탄은 잠시 경련하더니, 한 손을 들어 더듬거리며 허공을 짚었다. 체계가 달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마력이 그리는 회로는 일종의…… 봉인이었다. 보탄의 주술이 그의 찢어진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좀 낫군.]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육체를 기반으로 나 스스로를 고정시켰다. 적어도 머리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도록.]

-리치화로군.

페이자쉬가 클클 웃었다. 리치는 자신의 육신 일부분에 자신의 영혼을 잠가 고정하는 주술을 사용한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육체는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혼이 지상에 고정된 언데드로서 육체 내부의 영혼 그릇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불사에 가까워진다.

기안-켈의 영혼 그릇은 그의 심장이었다. 대부분의 리치들은 심장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다. 마력 회로가 이어지기 가장 좋은 부위기도 하고, 파괴되기 가장 힘든 부위기도 했으니. 그러나 심장이 파괴된 입장에서 목 아래가 찢어진 보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우득, 하며 놈의 몸에서 머리가 뜯어졌다. 끔찍한 광경에 키르하스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지?”

[적어도 라그나로크를 막아낼 수는 있겠지.]

“이제 와서 회개라도 한 것이냐?”

[아니. 이건 계획의 일부였다. 내 죽음은……. 에다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어. 제기랄. 그래도 미미르 꼴이 날 줄은 몰랐군.]

보탄은 짧게 투덜거렸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매가 보이지 않았다. 격전으로 사태를 온전히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매는 이그드라실 어딘가로 날아간 뒤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그드라실까지 갔다면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그드라실은 이 아스가르드에서 거의 유일하게 악마의 타락을 피한 지역이었으니까.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머리를 움켜쥐고, 제단 위에 올려 시선을 맞췄다.

“차근차근, 설명해 보시지.”

[……재수 없는 자식. 일단 뛰지. 날 들어라. 여긴 곧 무너지고, 저 용암 속으로 빨려들 거야. 저 아래는 무스펠과 이어져 있어. 그 전에…… 뛰지.]

-쿠르르릉!

그의 말과 동시에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용암의 바다 위에 올라와 있던 강철 요새의 일부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균형이 기울어지며 벽돌들이 우르르 일어나 모래성이 무너지듯 빨려 나갔다.

“키르하스! 뛰어!”

“네, 네!”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머리채를 잡고 내달렸다. 고성이 굉음을 내지르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의 등 바로 뒤에서, 용암이 치솟으며 후끈한 열기가 등가를 지졌다.

거의 빈사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혹사당한 육신 탓에 속력을 내는 것이 수월하진 않았다.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씹으며 달렸다. 부서진 벽돌을 밟고, 기울어지는 판자를 박차며.

-탓!

키르하스는 가젤처럼 뛰었다. 급격히 허물어지는 가교를 모로 달리며 그녀는 끊임없이 뒤를 힐끔거렸다. 페르난데스의 걸음이 처질 때마다 그녀는 애타는 듯 그를 바라보며 우물쭈물거렸다.

요새와 대지를 잇고 있던 강철 다리가 그들의 등 뒤에서 완전히 허물어졌다. 페르난데스는 당장이라도 풀릴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보탄이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런 체력으로 어디 펜리르라 불릴 수나 있겠어?]

“그런 별명은 없었는데.”

[……음. 로키가 널 데려온 것 아닌가?]

페르난데스는 근처의 바위 위에 보탄을 내려놓고는 그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수통의 입구를 뜯고 한 모금 목을 축인 후에 키르하스에게 넘겼다.

“로키, 로프트의 다른 이름인가?”

[로프트가 로키의 다른 이름이지. 아시르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필멸자여. 너희와 달리, 우리는 많은 세대에서 많은 이들에게 불리웠거든.]

“그 대단한 분께서 지금은 목만 남은 시체 꼴이군.”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어. 펜리르. 네 진짜 이름이 뭐지?]

보탄은 기이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안대를 덮지 않은 한쪽 눈이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안대 아래에 있는 그의 다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낯선 마력이 느껴졌다. 지옥 마력의 오염이 걷힌 이후, 사실상 저것이 그의 본체일 터였다.

“우리 직업은 이름이 비밀이야. 네 이야기를 먼저 듣지.”

[까탈스럽게 구는군. 그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보탄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페르난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은 미미르였어.]

* * *

아시르 신족은 엄밀히 말하자면 신이라 칭할 수 없다. 신성을 쌓고 필멸자들을 거느려 신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처음부터 강인하게 태어난 하나의 종족이었다.

마치 용들처럼.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준신의 격에 달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영원히 이어지는 삶, 강인한 육체, 끝 모를 마력…….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나날들.

그들이 마침내 비프로스트를 창조해 냈을 때, 이제 그들의 세계관은 차원 너머로 이어졌다. 아스가르드의 정복은 이미 그 시점에서 천 년 전에 마무리되었고, 이젠 다른 차원들과의 긴 정복 전쟁이 남아 있었다.

삶의 지루함에 지친 아시르들은 기꺼이 정복전에 총력을 투사했다. 수많은 차원들이 불타올랐다. 물질 세계라 불리는 제4계. 그 차원에 얽힌 수많은 수평 세계들이 그들의 정복욕 아래에 신음했다.

그 장대한 전쟁의 끝은, 헬하임의 한구석에서 시작되었다.

* * *

[지혜의 샘이라는 것이 있었지. 세계의 모든 지식을……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지식을 준다는 전설이 있는 샘물이었어.]

“미래는 고정된 사건의 집합이 아니야. 그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아, 물론. 미래란 가능성의 실타래들이 묶인 복잡한 털 뭉치에 불과하지. 하지만 개중 가장 높은 가능성, 어쩌면 거의 ‘반드시’ 일어날 가능성의 일면을 엿보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겠나?]

보탄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턱을 쓰다듬었다. 미래의 정보 반사를 인지하는 능력은 대단히 위험하고, 언제나 부작용만을 가져오는 불안정한 기술이다. 그다지 쓸모 있는 능력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보탄은 픽 웃었다.

[그래. 인간들 중 미래를 본다는 놈들은 하나같이 목을 매고 죽었지. 그 정도는 감수할 예정이었어. 그때 나는…… 따분했거든. 멀쩡한 사람을 자살하게 만들 정도로 자극적인 정보가 미래라는 장막 아래에 있다 하니, 어찌 시도하지 않겠나?]

* * *

“대왕이시여. 이 샘을 마시기 위해선…… 그리하여 미래를 엿보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나이다.”

샘물을 지키던 거인이 그에게 말했었다. 대가를 내놓아라. 그 말에, 강대한 정복왕은 비죽 웃었다.

“나에게 대가를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네 동포들의 죽음조차 예견하지 못한 네가 감히 미래를 담보로 나를 겁박하려 드느냐? 좋다. 내가 널 죽일지, 살릴지 맞춘다면. 네 장단에 어울려 주겠노라.”

“대왕께선 미래의 진의와 상관없이 저를 참하실 겁니다.”

“으하하하!”

보탄은 거인의 말에 껄껄 웃었다. 한참 박장대소한 그가 창을 들어 거인의 목덜미에 밀어 넣었다. 창날이 거인의 목젖을 살짝 긁으며 핏물이 그 위로 방울져 내렸다.

“혓바닥이 매끄럽구나. 대가, 네 목숨을 살려 주는 것으로 충분하느냐?”

“한쪽 눈입니다.”

“무어라?”

“미래를 보기 위해, 한 눈을 미래에 두어야 하나이다.”

거인은 천천히 후드를 뒤로 넘겼다. 후드 아래에 가려져 있던 놈의 얼굴은……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이 잔혹한 흉터 아래에 지져져 있었다. 늙은 거인은 그나마 성한, 짓무른 눈으로 비릿하게 웃으며 보탄을 바라보았다.

“또한, 저는 대왕께서 저를 찾아올 것임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동포들이 몰살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나이다.”

“결과론적이군. 정녕코 네가 그 모든 것들을 예견했다면, 어찌하여 우릴 대비하지 않았단 말이냐?”

“의미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거인은 그렇게 말하며 샘물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보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거인은 샘물 위에 서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불타고, 수십, 수백의 세계들 또한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인즉. 그대들, 아시르들이 가져올 우리의 멸망은 그저 같은 결말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대들을 막는다 한들, 피할 수 없는 멸망이 그 후에 도래할 것인데. 어찌하여 우리가 그대들을 막아서겠나이까.”

거인의 말에 보탄은 천천히 창을 내렸다. 그는 근처 바위에 앉아 거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내 삶 동안 그러한 종류의 종말론자들을 무수히 만났으니, 내가 너를 그럼에도 신뢰할 이유가 무엇이더냐?”

“대왕께선 믿으실 겁니다.”

그는 천천히 단검을 그에게 건넸다. 단검엔 기묘한 마력이 얽혀 있었다. 그는 천상의 신성이 이 단검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을 느꼈다. 이건…… 영락한 신의 잔재 중 하나였다.

* * *

“잠깐, 천상 만신전의 잔재물이라고?”

[내 말을 끊지 말거라. 다음 부분이 더 중요하니.]

* * *

보탄은 단검 내부에 잠든 그 신성을 탐냈다. 모든 영적 존재에겐 신성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 길은 아주 멀고, 아주 고된 구도자의 길이었다.

영원한 시간이 곧 완벽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탄은 적어도 아시르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단순히 힘이 강하고, 머리가 좋은 거인족의 일부로 남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신이 되고자 했다. 만신전에 닿을 수 있는, 제3계에 도전할 수 있는, 또는 그 너머로 오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신’이.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자신의 오른 눈에 쑤셔 박았다.

* * *

“천천히 그걸 분석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낼 생각 따윈 하지 못한 것인가. ‘마법사의 신’, 보탄?”

[증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단검에선 정녕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어쩌면 제3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 저 너머의 ‘관념’적 존재들이 만들어 낸 유물일 수도 있어.]

자꾸 말을 끊어 내니 설명하기 어렵군. 보탄은 투덜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

지혜의 샘은…… 거짓이었다. 지혜가 아니라 미래를 담은 것조차 아니고, 심지어는 샘물 자체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맑은 못에 불과했다. 진짜는 이쪽이었다. 샘물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이 단검…… 이 단검 속에 잠든 힘이…… 진정한 지혜의 샘이다.

“끄으으아……!”

보탄은 단검을 떨어트리며 피가 흘러내리는 눈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침과 핏물이 섞여 수염을 가득 적셨다. 핏줄이 불쑥 솟아 꿈틀거렸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뻐끔거렸다.

“보이십니까. 이젠?”

거인이 그의 곁에서 속삭였다. 깊은 계곡 속 작은 샘물, 맑은 물과 깨끗한 자연 환경 따윈 더 이상 없었다. 불에 타들어가는 환상이 보탄의 주위를 가득 감싸고 있었다. 그 사이로 거인의 속삭임이 벼락처럼 우렁거리며 들렸다.

“보이십니까, 대왕이시여. 수천 세계가 불타고, 허물어지는 광경이? 미래가, 과거가, 현재가 뒤엉키는 곳에서…… 하늘이 얼어붙고 대지가 불타오르며 바다가 지표를 휩쓸고, 용암이 바다를 뒤덮는 광경이?”

“으……아아……!!”

그 말 그대로였다. 세상이 수십 년에 걸쳐 얼어붙고, 다시 수십 년에 걸쳐 불타오르며, 하늘의 별들이 그림자 아래로 감춰지고 그 그림자 사이에서 화염에 휩싸인 유성우가 쏟아지는 환상이 보였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비프로스트는 이제 악마의 손에 떨어져, 필멸자는커녕 아시르들조차도 거닐기 어려운 험지가 되고, 차원의 장벽은 스스로 뒤엉켜 미로가 되어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 울부짖는 거인들이 보였다.

악마들은 끝없이 솟아 거인의 피를 탐하고, 거인들은 저 스스로 동족의 가슴을 찌르며 웃음을 터트릴 것이오, 지금껏 본 적 없던 괴물들이 세계를 불사르며 도래할 것이었다.

아시르의 끝이…… 아니, 세계의 끝이 보였다.

“비프……로스트를 불태운다면. 그런다면 이걸 막을 수 있나?”

“미봉책에 불과하겠지요.”

“모든 차원들과 단절하고 우리 홀로 온전히 차원의 장벽을 봉인한다면 어떤가?”

“반드시 언젠가는 그 틈마저 뚫리고, 불타오를 겁니다. 우리들은…… 이 미래를 ‘에다’라 불렀지요. 늙은 노인들이 아이를 겁주기 위해 들려주는 무서운 동화라고…… 어떠십니까.”

거인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환상이 잦아들고, 보탄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그는 거인을 두고, 그 길로 헬하임을 떠났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간교한 잔재주를 짜내던 광대에게…….

천상과 지옥의 전쟁, 그 틈바구니에서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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