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197화 (198/388)

197. 불타오르는 이그드라실 (1)

“녀석과는 요툰하임에서 처음 만났지.”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는 뜻인가?”

“그래. 프레이야와 로키는 일종의…… 볼모이자 평화 사절이었어. 우리가 다른 세계들을 침략할 당시, 저항이 특히 거세던 민족들과는 다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거든.”

장난꾼의 신, 연극의 신, 보탄의 궁중 제일 참모이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재담꾼, 로키. 요툰하임의 왕 우트가르트의 아들. 그는 요툰하임과의 평화 조약을 위해 볼모로 넘겨받은 왕자였다.

으레 볼모가 그렇듯이, 그의 취급은 아시르 궁중 안에서도 썩 좋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넉살 좋은 성격과 구김살 없이 유쾌한 장난으로 아시르 궁내 대신들은 곧 그를 보탄의 가신단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녀석은 머리가 좋았어.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지. 내 말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장 손쉽게 이뤄냈지. 만일 내게 아들놈들이 없었다면…… 내 사위로 삼아 왕국을 물려주려고도 했다.”

보탄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가 아는 모든 이들 중 가장 영리하고 재치 있는 청년.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하던 그라면, 이 상황에서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타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로키를 남몰래 불렀다.

* * *

“폐하, 날 불렀…… 다쳤군. 친구. 어의가 필요해 나를 불렀나?”

로키는 보탄의 침소 주렴을 걷고 들어서자마자 코를 찡그렸다. 매캐한 약초 타는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 코끝이 저릿하게 마비되는 것을 보니, 마약성 약초였다.

이따금 마법의 비의를 탐구하고자 보탄이 마약을 들이켜고 기행을 저지른 적은 종종 있었으되, 이건 결이 달랐다. 이건 감각 그 자체를 무디게 만드는 약초였다. 그런 약초가 필요한 경우는 단 하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뿐이다.

로키는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침소의 내부로 다가갔다. 침상에 쳐진 커튼 안에, 담뱃대를 물고 있는 보탄의 실루엣이 보였다.

“헬하임의 군사 수준으로는 아시르의 왕에게 중상을 입힐 수 없었을 텐데…… 무슨 짓을 저질렀지, 친구?”

“미래를…… 봤다네.”

“나도 가끔 본다네.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뜰 거야.”

로키는 킬킬 웃으며 커튼을 열었다. 침대에 길게 늘어져 담배를 물고 있는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보탄, 강대한 정복왕. 그러나 정기 넘치던 눈이 탁하게 흐려져 있고, 그나마 한쪽 눈은 검은 안대에 감겨 있었다.

그리고 핏물이 그 아래에서 스며 나오고 있었다. 로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보다 보탄이 나약해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때, 보탄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다네.”

“말해 봐. 뭐지?”

“종말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 주게.”

보탄의 말에 로키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근처 테이블에서 포도를 한 알 뜯어 입에 굴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헬하임에서 약이라도 했나? 혼자만 즐기지 말고 나도 나눠 주지 그랬나.”

“지금도 보인다네……. 로키. 종말이, 세계의 마지막 숨결이 보여. 내 눈…… 내 눈 하나를 미래에 두고 왔다네.”

“내 보기에 그건 칼로 난 상처 같은데?”

“이걸 보게.”

보탄은 비척거리는 손짓으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로키에게 건넸다.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강인한 신성에 로키는 작게 감탄했다.

“대단한 유물이군. 이걸 눈에 박았나?”

“자네도 해 보겠나? 클클, 미래가 보인다네.”

“난 처음 보는 유물을 내 몸에 직접 실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자네 꼴을 보니 미래를 본다는 놈들이 왜 다들 하나같이 자살하던지 알 것 같군.”

그래, 뭐가 보이던가? 로키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탄을 바라보았다. 보탄은 천천히 허리를 들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 짙은 담배 연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보탄은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로키에게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을 말해 줬지.”

“사다르켈리사에게 멸망하는 과정을 말인가?”

“아니, 그건 그저…… 배역에 불과해. 종말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그러면서도 포괄적인 개념이지. 세계의 종말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네.”

첫째, 기나긴 겨울. 핌블페스트. 모든 식물이 얼어붙고, 모든 곡물이 말라붙어 시작되는 기나긴 기아.

“이를 막기 위해 바나디스가 필요했지. 봄의 처녀가. 꽃을 틔우고 작물을 가꾸어 우리를 겨울 안에서도 살아 있게 만들 수 있는 존재.”

둘째, 요르문간드. 아스가르드를 이루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을 휘감는 거대한 뱀. 종말의 순간 독액을 내뱉어 세상을 더럽히고, 아시르들을 집어삼킬 존재.

“그 배역에는 여러 존재들이 거론되었네. 마침 용들이 거닐던 세계가 있었거든.”

“주 물질계……?”

“그래, 말이 빨라 좋군. 자네가 온 그 세계. 우리는 그곳을 미드가르드라 명명하기로 했네.”

종족 다양성이 가장 높고, 다른 차원에선 발견되지 않는 토착 종족…… 용들이 살던 땅. 천상이 주시하는 땅이자, 악마의 위협이 가장 옅던 땅.

일정한 결을 가지고 반쯤 고정된 채로 사그라드는 다른 세계와는 달리, 수많은 문명이 피어나고, 불타고, 다시 일어서는 격동의 땅. 그래서 명명하기를, 미드가르드라.

* * *

로키는 턱을 쓰다듬으며 양피지에 적힌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고개를 내저으며 줄을 하나 그었다.

“카라드펠린은 아니야. 그 꽉 막힌 녀석은 천상에 너무 가까워졌어. 녀석에겐 다른 역할이 있을 거야.”

“다음은?”

“라크리시르는…… 보류하지. 녀석은 너무 약하고 작아. 다음.”

“아벨레사스는?”

“가장 적절한 재목이긴 한데……. 아니, 아니야. 언젠가 갑자기 얌전해져서 동굴에 틀어박혔다는 소문이 있더군.”

“다음은?”

“사다르켈리사.”

로키는 양피지의 한 귀퉁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충분히 강력하고, 충분히 야심 넘치고, 충분히 귀가 얇지. 땅과 하늘에서 패권을 잃은 불쌍한 용……. 우리가 보듬어 주자고.”

로키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 * *

“그래서 녀석이 미드가르드로 향했지. 요르문간드를 구워삶아 보겠다고 떵떵거리면서 말이야. 그리고…….”

“아니, 잠깐만.”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말을 끊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말은 된다. 가능한 시나리오지만……. 웃기는 일이지 않은가. 종말을 막겠답시고 제 종족을 멸종시킨다는 것이.

“네 종족이 그렇게 이타적인 녀석들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다른 세계들의 총체적인 종말을 막겠다고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비극적인 미담이지만…… 거짓말 같군.”

“라그나로크의 조건은 요르문간드가 끝이 아니었어. 우리가 멸종하고 싶었다면 어째서 바나디스가 필요했겠나?”

보탄은 슬쩍 웃었다.

“요툰헤임의 군단이 맹약을 끊고 아스가르드로 진격하고, 헬하임이 그들의 뒤에 이어 공세를 펼칠 때, 마침내 아스가르드의 지반이 무너지고 무스펠의 악마들이 지상으로 기어 나올 때. 차원과 차원의 틈이 허물어지며 세계가 붕괴할 때. 그때 비로소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지.”

보탄은 마치 고대의 예언자가 선언하듯이 말을 늘였다. 그는 곧 눈을 감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프레이야. 바니르 종족의 여왕을 볼모로 받는 대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바나하임은 우리에게 터전을 약속했다. 그리고…… 바나하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 땅으로 향하는 모든 비프로스트를 끊었어.”

“프레이야는 지금 미드가르드에 있을 텐데?”

“맞아. 프레이야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내가 그녀를 미드가르드에 봉인했지. 그녀는 저 스스로 도주한 것이라 믿고 있겠지만…….”

순수한 것. 보탄은 쿡쿡 웃었다. 곧 그는 예언을 이어갔다. 그의 안대 낀 눈, 그 아래에서 음울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페르난데스의 정신에 어떤 이미지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로키가 비프로스트의 무너진 가교를 이으리라. 헬하임, 요툰하임, 무스펠헤임……. 아시르의 모든 적들이 이곳, 아스가르드로 모이리라.”

불타는 아스가르드의 모든 지역에 관문이 열리고, 옛 전쟁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를 갈던 다른 세계의 군단이 몰려드는 환상이 주위를 수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선두는 곧 당황하고 만다. 낙원이라 불리던 아스가르드는 없다. 오직 불타는 대지, 오염된 하늘, 그리고 들끓는 악마들뿐…….

이곳 아스가르드엔 아시르가 없다. 그들의 눈에……. 유일하게 낙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땅이 보인다.

-이그드라실…….

“불타는 대지 위에서, 그들은 진군하리라. 복수…… 정복욕…… 또는 아시르 문명에 대한 갈망…… 무엇이 되었든. 종말 앞에선 허망한 법……. 그들이 이곳 투쟁의 전당 아래에 모이게 될 때. 그들은 오직 한 존재만을 마주하리라. ‘요르문간드’! 세계의 파괴자가 도래할지니!”

궐기한 까닭, 전쟁의 명분이 어찌 되었든. 비프로스트가 완전히 개방되어 차원 간의 교류가 자유로워질 때에, 전쟁은 그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투쟁에 불과하다. 지옥의 악마들로부터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한 투쟁!

에인헤랴르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탄은 애초에, 사다르켈리사를 격퇴하기 위하여 세계의 관문을 이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미래는 가능성의 총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예언 자체를 가장 승산 높은 가능성으로 이끌면 될 뿐! 필멸자여, 이그드라실로 향하라. 바나헤임, 요툰하임, 헬하임, 아스가르드, 그리고 미드가르드. 다섯 세계의 정병들이 모여든다면, 설령 요르문간드라 할지라도 능히 대적할 만하다!”

보탄의 눈에서 푸른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는 이제 묵묵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죄가 없다 하지 않겠다. 미드가르드의 신도들을 우리의 목적대로 이용한 죄, 수평 세계를 침탈한 죄, 지옥의 악마를 규합하고, 이를 방기한 죄……. 네 말대로 나의 죄는 회개할 여지가 없을 테니. 그러나, 나를 들어라. 이그드라실로 가 다오. 우리 민족의 죄는 나 홀로 이고, 전장에서 눈감으며 참회하겠노라.”

보탄은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육신이 없는 그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지루한 인생에서 자극이 될 만한 것을 좇았다고 했던가. 이 늙은 왕은 자신의 백성을 안전한 땅으로 피난시키고, 남은 몇몇의 왕족들로 하여금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참작의 여지를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페르난데스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가 아니라, 목적이었으니.

-쓸모가 있겠군.

‘그리고 마음에 들어.’

리치화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면 모르되,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그는 다시 육신을 되찾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몸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사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의나 정의, 또는 명분의 영역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보탄의 머리를 허리춤에 걸었다.

“흔들려도 참아라. 이제부터 달릴 테니.”

페르난데스는 가볍게 몸을 풀고는, 키르하스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정면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그드라실의 그림자 아래로, 이제 남은 거리가 멀지 않았다.

제 1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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