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불타오르는 이그드라실 (2)
로프트는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아니,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벨로서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눈 대신, 뚫려 있는 안저 아래에서 빛나는 안광. 반 이상 드러나 입술이 없는 탓에 웃는 것으로도, 으르렁거리는 것으로도 보이는 아래턱. 도드라진 뼈에 빼곡하게 새긴 화려한 음각 문신까지.
그래서, 아벨은 그가 꺼림칙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로프트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기에. 북부 만신전과 연이 있던 그녀로서는 로프트의 변화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여기까지 닿았군.”
로프트는 이그드라실의 거대한 가지 위로 매를 이끌며 말했다. 매는 허공을 길게 선회하고는 나뭇가지 끝에 내려앉았다. 토르가 다소 창백해진 얼굴로 나뭇가지 위를 굴렀다.
“오, 비행이 다소 거칠었나. 친구?”
[죽여, 죽여 버리겠다.]
“아쉽지만 난 이미 죽었는걸!”
로프트는 낄낄거리며 토르의 등을 두드렸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 나뭇가지 아래를 바라보았다. 온 대지가 부서지고, 그 사이사이로 흩어진 악마들이 내려 보이는 아스가르드는…… 끔찍했다.
지옥의 한 구획을 잘라 덮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로프트는 혀를 끌끌 차며 유쾌하게 말했다.
“몇몇 희생이 있었지만 말이야!”
“……몇몇?”
“너무 걱정 말게! 모든 일은 순리대로 돌아갈 테니.”
“카라드펠린의 안위만 확인하고 곧장 되돌아갈 거야. 내겐 아스가르드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어.”
“하하, 그렇게 성마르게 굴지 말게나! 사랑, 사랑이라. 내 친구. 나도 한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
로프트는 안광을 빛내며 갑작스레 박장대소했다.
“함께 걸을 때면 시간이 멈추고, 함께 누울 때면 세상이 내 품에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단 말일세! 이 차갑게 식은 심장이 한때 뜀박질할 때의 일이지만……. 하지만 내 친구, 그건 모두 허상이라네. 언젠간 스러질 시간, 언젠간 스러질 감정에 불과해.”
“요툰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벨은 차가운 눈으로 로프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매에서 뛰어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요툰, 아시르, 바니르. 용과 엘프. 거인들과 신들. 그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장생족이야. 장생족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우리의 심장에도 빛이 머문다. 한 조각의 추억, 한 조각의 희망……. 우리는 우리의 긴 삶 동안 그 하나를 영원히 곱씹으며 남은 시간의 외로움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존재들이야.”
“감동적이군. 진심이야.”
로프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네가 얌전해진 이유겠지. 화염의 전령?”
“그건 너무 옛날 별명 아니야? 날 부끄럽게 만들려는 속셈이라면 성공했다고 하겠어.”
“뭐, 맞아. 네 말대로 우리는 단 한 조각의 추억을 곱씹으며 남은 시간을 견디지. 너에겐 그것이 뭔가,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그런 귀여운 감정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어.”
로프트는 클클거리며 뒤를 돌았다. 아벨은 그의 넓은 등에 빼곡히 그려진 문신을 볼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사이한 주술들을 묘사한 문신이 그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문신 그 아래로…… 깊은 흉터가 보였다.
흉터들이……. 채찍에 의한 찰과상, 인두로 지져진 화상, 짓무르고, 으스러진 피부 조각과 이따금씩 드러나는 뼈가. 문신은, 그의 흉터를 가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벨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녀는 한때 아시르들과 어울렸던 적이 있었으므로. 광대이자 재담꾼, 아시르 한가운데에 떨어진 요툰. 적국의 어린 볼모에게 가해진 수많은 학대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유쾌함은 어딘지 비틀려 있었다. 삶 그 자체를 해학으로 바라보는 종류의 유쾌함이 아니라, 그건 일종의 해탈에 가까운 해학이었다.
“그만 엿듣고 나오지 그러나. 헤임달. 내 친구여.”
“오래 걸렸군. 로키. 네 약속보다 더 오래.”
“그래그래. 오랜만이야. 나도 반갑네.”
-스륵.
이그드라실의 무성한 잎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중갑을 걸친 사내가 로키의 눈앞에 서서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투구 바이저 아래에서 이글거리는 눈이 보였다.
“네 접근은 이미 보고 있었다. 로키, 내 형제와 아버지의 마지막 또한.”
“모든 일은 보탄의 계획대로 되어갈 거야.”
“……그리고 너의 계획대로 되어 가겠지. 그게 부디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길 바라마.”
헤임달은 잠시 로키를 바라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거대한 잎사귀와 나뭇가지들이 스스로 비틀리며 아치형 문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키르하스, 맡긴다!”
“예, 은공!”
최단 거리로, 그리고 최단 시간으로. 엄밀한 시간제한이 걸려 있는 작전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산술급수적으로 불리해지는 전장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 작전은 로프트와 페르난데스의 합에 성패가 걸려 있었다. 그가 비프로스트의 관문을 모두 개방해 각 세계의 군대가 몰려오기 전에 이그드라실에 닿아야 했다.
보탄의 궁정에서 이그드라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엔 악마들의 진영이 포진되어 있었고, 광활한 평야에서 잠복한 채 교전 없이 관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거니와 시간 낭비였다.
따라서,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는 질주를 선택했다. 올곧게 일직선으로 이그드라실을 향해!
-Xhiii-!
비늘 덮인 악마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곧 정찰 병력으로 보이는 소규모 집단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정예였고, 그 정도로 따지자면 뎀드리자드 컬트가 소환했던 악마들에 모자람이 없었지만—
‘그 시절 키르하스가 아니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어떤 이는 다른 이들보다 더욱 ‘공평’하게 시간을 소비한다. 각 세대를 휘어잡던 영웅들이 보내는 성장기의 일 년이, 일반적인 한 해와 같은 시간 개념을 가질 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키르하스의 발전은 눈이 부시다 못해 전설적이라 할 만했다. 일 년여 전, 노예 시장에서 구출될 당시의 그녀는 그저 몸이 재빠르고 감각이 예민한 수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대황야 전역을 지배하는 호족 연합의 대족장이자 동시대 동년배에 비견될 이가 없는 전사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잠재력, 우수한 훈련 시스템, 수많은 실전 경험, 미래의 전투 경험과 지식, 종족 신의 선택을 받으며 일깨워진 본능까지!
“무릎을 꿇어라!!”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의 앞으로 뛰어나가며 자세를 낮췄다. 청록색 눈동자가 차갑게, 그러나 맹렬하게. 마치 겨울밤의 폭풍처럼 빛나고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칼자루를 휘감는다!
“주군의 행차시다!”
‘아, 저런 건 가르친 적 없는데.’
-나만 부끄러운 거 아니지?
키르하스의 검은 머리칼이 급류처럼 흘렀다. 마치 바람에 색을 입혀 놓은 것과 같은, 벼락같은 몸짓. 그녀가 악마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돌연 섬전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악마들의 목이 허공을 난다.
핏방울이 비산하고,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가 비틀거리며 쓰러질 때, 키르하스는 이미 그들 너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은공!!”
“그래…… 잘했어.”
칭찬해 달라는 듯 귀를 쫑긋거리기에 한마디 해주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악마의 시체를 타넘었다. 그는 전투력을 온존하기 위해 행군 동안의 교전 전체를 키르하스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악마를 만날 때마다.
“무릎을!! 꿇어라!!”
키르하스는 신이 나서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물어다 바닥에 내려놓고 꼬리를 흔드는 사냥개처럼 보여서,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뭐, 스트레스 푸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우리 스트레스는?
‘난 스트레스가 좀 쌓인다고 성능이 떨어지지 않잖나.’
-빌어먹을 디모니카들.
페이자쉬는 툴툴거렸다.
* * *
비프로스트의 관문을 걸어가며, 헤임달이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로프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가 데려온 필멸자들. 훌륭하군.”
“오, 그새 확인했나?”
“그렇게 요란하게 다가오면 보지 못할 방법이 없지. 지금 저 벌판의 악마들이 온통 그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어.”
“위험하진 않겠어?”
아벨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헤임달이 픽 웃었다.
“위험이라. 글쎄, 그렇진 않을 것 같군. 펜리르와 함께 있는 여자. 그 필멸자가 아주 걸물이야.”
“우리 키르하스가 참 유능하긴 해.”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난데스와 키르하스가 모두 무사하다면 어쨌건 안심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눈앞에 새하얀 빛을 내뿜는 관문이 나타났다. 관문을 바라보며, 쭉 묵묵히 걷던 토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라드펠린의 성소…… 오랜만이군.]
“자주 찾아오지 그랬나.”
관문 너머에서 중저음의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게. 마중 나갈 상황이 아니라 미안하군.”
관문의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그 너머가 보였다. 푸른 들판과 맑은 하늘, 그리고 수은이 매끄럽게 흐르는 은빛 강줄기가 보였다. 강물이 모이는 거대한 호수와, 그 위에 자리 잡은 새하얀 제단까지.
그들은 관문을 넘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호수 위엔 아름다운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 백색 목조 다리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수은 호수 위에 느긋하게 떠 있는 제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포근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관문 너머의 아스가르드와는 전혀 다른…… 마치 정말 낙원 같은 공간이었다.
공기 중에서 신성을 품은 기묘한 마력이 흘렀다. 여행으로 지친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감각에, 일행 주위를 감돌던 긴장감이 슬슬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리 오게나. 마실 것이라도 내어 주고 싶지만……. 액체라곤 수은뿐이니 아쉽군. 마시진 말게, 몸에 좋지 않다네.”
“못 본 새에 농담이 많이 늘었군. 카라드펠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젠 농담 정도뿐이라.”
일행이 다리의 중간을 막 지날 무렵부터, 제단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무릎 꿇은 사내가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이 길게 내려와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니,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하얀 나무 제단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아벨은 당황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카라드펠린!”
“오, 아벨레사스.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좋구나. 내 누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그가 팔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그 이상 다가오진 마. 위험할 수 있으니.”
“……스스로 봉인했어?”
“더 이상 참기 어렵더군.”
-스르륵.
그가 고개를 들자, 머리칼이 옆으로 밀려나며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벨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너, 너 얼굴이……!”
“알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
보석처럼 반짝이는 하얀 피부에 대조되게, 검붉은 비늘이 그의 얼굴 위로 마치 종양처럼 얼룩져 있었다. 그의 오른 눈은 아벨의 것처럼 하늘을 닮은 파란색이었지만, 다른 눈은 잉걸불처럼 새카맣게 타오르는 질척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파충류의 것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으로, 그가 슬프게 웃으며 아벨을 올려 보았다.
“얼마 전부터 봉인이 약해졌어. 로키, 약속된 시간이 온 것 같군.”
“……친구. 날 용서하겠나?”
“용서라 할 만한 것이 있겠나.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카라드펠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로프트는 안광을 일렁이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운명…… 아니, 사다르켈리사를 타락시킨 것은 나였고, 자네는 그저 그 일에 휘말린 피해자에 불과하네.”
“그것 또한 운명이었겠지. 자네가 그녀를 타락시킨 것도, 이 아름다웠던 땅이 더럽혀진 것도.”
“위로 고맙네.”
로프트는 천천히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곧 그의 손에서 단검이 들려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헤임달이 당황해 말했다.
“잠깐, 무슨 짓이지? 봉인을 강화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나?”
“라그나로크를 막아 내러 온 것이었네만.”
“그래! 그게 아버지의 계획이었겠지! 지금 저 용을 죽이는 것이 라그나로크를 막는 일이라고? 저 용이 죽으면……!”
“알아. 요르문간드가 깨어나지. 그 뱀의 봉인이 저 친구의 심장이니까.”
로프트는 카라드펠린의 목에 단검을 겨누며 말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선…… 일단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야 하는 법이라네. 친구.”
그렇게 선언하고는, 로프트는 단검을 휘둘렀다. 살갗을 긋는 소음도, 목이 꿰뚫리는 순간의 단말마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날 용서하지 말게나. 친구여. 지난 천 년. 고생 많았네.”
-쿠구구구궁!!
그 말과 동시에, 진동이 호수 위의 제단을 뒤흔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