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사다르켈리사, 용들의 종말 (1)
사다르켈리사는 이 불가해한 상황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대악마들은, 으레 천상의 대신들이 그렇듯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뭄토의 ‘죽음’, 타이반의 ‘파괴’, 우르카시아의 ‘역병’과 같이, 사다르켈리사는 ‘광기’를 담당한다.
따라서, 그녀의 존재감엔 광기의 저주가 흐른다. 석화의 마안과 광기의 존재감이 가지는 시너지, 모든 힘을 되찾는다면 시간마저 동결시킬 수 있을 강대한 마력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한낱 필멸자들은. 설령 신성을 얻어 개화하는 준신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광기엔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어째서?]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사다르켈리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혼란이나 광기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서늘하게 벼려진 시선이 사다르켈리사의 정신을 침범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팅.
저 소리. 그녀가 존재감을 떨치려 들 때마다 들려오는 저 맑은 거문고 소리가 그녀의 광기를 해체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감을 지워내며, 그녀의 영역을 짓밟고 있었다.
불가능하다. 설령 신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격이 부족하다. 격이란 무릇 경험과 시간에 비례하여 영혼에 쌓이는 더께인 법. 이천 년을 지옥 마력 속에서 개화한 그녀의 격을, 그녀의 광기를 고작 스물 남짓, 전생의 시간을 고려한들 백 년도 되지 않을 저 필멸자가 뛰어넘을 수는 없다!
[네 영역은…… 그래. 그랬군! 넌 오직 사다르켈리사에게 대항하기 위해 네 다른 가능성을 희생했구나!]
불현듯 깨달음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상의 대신들이 그렇듯, 지옥의 대악마들이 그렇듯. 신성을 쌓아 가기 시작한다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오직 사다르켈리사의 광기에 저항하기 위해 선택한 저 필멸자만의 고유한 신성은…….
[이성!]
사다르켈리사는 쉭쉭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 * *
페르난데스는 사다르켈리사가 홀로 분을 못 이겨 날뛰는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빠르게 전략을 점검하고 있었다.
‘출력을 좀 더 높여.’
-과부하를 고려해야지. 이게 최선이야.
‘최선으로는 부족해. 과부하? 우리 삶의 부하 중 더 이상 과한 것이 있던가?’
-아주 인간이기를 포기하려 드는군. 마음에 들지 않아.
페이자쉬는 투덜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곧 페르난데스의 등판에 그려진 루네글리프 중 하나가 타들어 갔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차갑게 식은 이성은 여전히, 그리고 온전히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지지직!
톱니바퀴가 맞물려 도는 것처럼 루네글리프 문신들이 비틀린다. 그리고 동시에, 두 다리에서 푸른 번개가 튀었다.
-슬레이프니르, 준비 끝났다.
‘적응 과정이라 생각하자고. 가 보자.’
-탓.
디모니카의 육신은 인간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보장한다. 그러나 그 한계,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신성이 흐르는 몸에는 마력이 깃들 수 없다는 한계가.
필멸자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성장 한계다. 성직자는 정점에 도달하는 검사처럼 움직일 수 없다. 성직자는 위대한 마법사가 될 수 없다. 디모니카가 되는 것을 선택하면서, 페르난데스가 감안한 페널티였다.
그러나, 그 한계는 ‘인간 육신’의 태생적인 한계인 법. 그리고 마법사는 언제나 세계의 제한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하는 족속이다. 페르난데스는 통, 하고 가볍게 발을 굴렀다.
슬레이프니르. 보탄의 전투마. 바람을 밟고 달리는 여덟 다리의 말. 이를 의미하는 루네글리프가 불타오르며—
-콰지지지직!
두 다리에서 전류가 튀며 잠시 제자리에서 스텝을 밟던 페르난데스의 몸이 썬더쓰로워의 총탄처럼 튀어나갔다. 키르하스조차도 순간 잔상을 좇지 못할 정도의 속력으로!
-두두두두!
말발굽이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다르켈리사의 몸통을 타고 올랐다. 페르난데스는 인지능력을 초월한 속도감 속에서 거의 본능의 영역으로 다음 스텝을, 그리고 다음 스텝을 밟았다.
-스르릉.
대검을 쥔 칼이 서늘한 소리를 냈다. 부딪치는 바람의 저항에 몸이 트롤에게 난타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의 가속은 위험하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몸을 틀어 스스로 튕겨 나가며 사다르켈리사의 공격을 피했다.
[신성을 얻고, 심지어…… 아시르의 육신을 입었구나!]
“추측이 늦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었다. 속도가 온전히 담긴 강대한 일격이 사다르켈리사의 팔뚝을 깊게 치고 지나갔다.
-콰직!
핏물이 비산하고, 강철 같던 비늘들이 박살나며 흩어졌다. 사다르켈리사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빼냈다. 다음 공격을 하려 시선을 돌리는데, 이미 그 자리엔 페르난데스가 없었다.
[이 파리 같은 놈이!]
사다르켈리사는 고개를 높게 치켜들며 이그드라실의 정상을 빠르게 훑었다. 불타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꼿꼿이 선 채로 그녀를 노려보는 페르난데스가 보였다.
[굳어라! 무너져라!]
온전한 힘을 발휘한다면 설령 시간이라 할지라도 굳힐 수 있는 그녀의 주문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눈이 페르난데스를 똑바로 포착하고, 곧이어 그녀의 두 눈에서 술식이 매듭지어졌다.
‘슬레이프니르를 해제한다. 연산을 보조해!’
-주문을 글레이프니르로, 준비 끝났다. 네가 나를 보조해.
-파지지직!
페르난데스의 등에서 다른 루네글리프가 비틀리고, 곧 그의 양다리에 머물던 전류가 흩어졌다. 페르난데스의 두 손이 허공을 움켜쥐듯 꺾이고, 곧 그의 등 뒤에서 여섯 개의 팔이 사방으로 뻗어, 각기 다른 수인을 맺었다.
글레이프니르. 끊어지지 않는 사슬. 본디 사슬이란 물체와 물체를 엮기 위한 도구이며, 현대 마학의 영역에서 사슬은 주문의 연계를 의미한다.
차례대로, 한 수, 한 수, 다시 한 수. 수인이 파도를 치듯 허공을 짚고, 다시 짚고, 이내 찢어발긴다!
-콰드드드득!
사다르켈리사의 주문에 마력으로 직조한 사슬이 달라붙는다. 굳이 명명하자면 지배의 술식! 대악마가 직접 사용하는 주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법의 형태를 담고 있는 한, 반드시 마법의 구성 조건을 따라야 하니.
마법의 구성은 제1계에서 내려오는 세계 전체의 규칙이다. 사다르켈리사의 고유 주문마저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특정한 리듬을 갖춘 마법은 반드시 해주할 수 있다.
그 이상은 난이도의 영역! 페르난데스는 뇌수가 들끓는 감각 속에서도 얼음을 깎는 듯 서늘한 이성을 유지하며 수인을 짚었다.
평소대로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수준의 고난이도 역주문이다. 대악마의 시그니처 스펠을 카운터 친다는 것은, 인간의 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예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하다. 아시르의 육신을, 보탄의 가호를 받고 있는 지금이라면!
-콰드드득!
주문이 비틀리고, 찢겨나가며 석화의 저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굳어버린 불, 낙하하지 않는 재, 박제된 바람이 이그드라실을 감싸고, 지금 이 순간 활기를 가진 존재는 오직 사다르켈리사와 페르난데스. 단둘뿐이었다.
[너, 필멸자! 애꾸눈의 힘을 이었구나!]
“그뿐일까.”
페르난데스의 손에서 튀던 전류가 흩어져 나갔다. 술식이 깨어지며 그의 등 뒤에 빼곡히 그려진 루네글리프가 한 조각 더 사그라들었다.
‘잔량은?’
-아시르 화신체는 약 5분 정도 더 유지될 거야.
‘충분해. 주문을 궁니르로.’
-이미 준비하고 있었어. 잡아라.
-콰지지직!
대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잡았다. 이와 동시에, 주먹을 타고 전류가 흘렀다. 등 뒤에서 루네글리프 한 조각이 비틀리고—
-콰득, 콰득, 카드드득!
주먹에 감긴 전류가 점점 더 거칠게, 맹렬하게 타오르며 회전한다.
궁니르, 보탄의 창. 일격에 필중하지 못할 대상이 없는 신의 벼락이 그의 손아귀 아래에서 불타오른다.
[잔재주는 거기까지다!]
-콰아아앙!
그가 서 있는 자리로 사다르켈리사의 거대한 발톱이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거의 동시에 뛰어올라, 팔뚝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발판 고맙군!”
그리고 달린다. 팔을 타고, 이젠 이그드라실의 거대한 가지 밖으로. 사다르켈리사의 머리를 향해 곧장!
석화의 마안이 다시 시전되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사다르켈리사는 재빨리 팔을 털어 그를 떼어내려 했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 높이. 설령 아시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 없는 고고도에서.
-후우우웅!
거친 바람이 페르난데스를 당장이라도 날려 버릴 것처럼 불어닥쳤다. 비늘 덮인 둥그런 팔뚝을 내달리는 것은 초인적인 균형 감각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디모니카들은 기본적으로 초인이다.
인간의 가능성, 그 총체를 상징하는 육신.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시르의 감각으로!
-탓!
비늘을 밟고, 균형을 잡고, 허공을 뛰어올라—
[죽어! 죽어라! 죽으라 하지 않았느냐!!]
구름 너머의 하늘, 붉은 석양이 자욱한 먹구름을 들판 삼아 너울지는 창공의 황혼을 등에 지고.
-아시르 화신체, 이제 출력 한계다.
‘충분해!’
신의 벼락이, 사다르켈리사의 머리를 향해 내려 꽂혔다.
[-----!!!]
-콰아아아앙!!
순간, 사다르켈리사의 동공이 힘없이 풀린다. 최대 출력의 궁니르, 페르난데스의 등에서 루네글리프가 바스라져 흩어지며 추락하는 그의 궤적을 따라 잔상을 그렸다.
아직 끝이 아니다. 대악마의 눈에 다시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궁니르의 일격은 설령 대악마라 할지라도 타격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녀를 죽이기에 충분하진 않았다.
광기를 잠재우는 일격. 그 한 조각의 퍼즐을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페르난데스는 힘이 빠진 왼팔을 대검의 칼자루 위에 얹었다. 양손으로 굳게 칼자루를 쥐고, 그대로 추락해 사다르켈리사의 미간을 향해서—
육신 전체를 포환으로 삼아. 속력과 충격력을 고스란히 칼끝에 담고, 내려 꽂힌다!
‘지배의 술식!’
-준비 끝났다! 각오해!
‘내 각오는 이미 전생에 끝났어!’
-콰아아아앙!
다인 왕의 대검. 공간을 갈아내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 묵빛 강철이 새카만 궤적을 그리며 뱀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연민. 인간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대검이 대악마의 비늘을 찢어발겼다.
맹렬한 충격이 페르난데스의 몸을 당장이라도 튕겨낼 것처럼 흔들었지만, 아직 한 발. 더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일 년여 전. 인퍼머르 지하 무덤에서 아벨레사스의 두개골에 했던 것처럼!
-촤르르륵!
검은 사슬이 그의 몸을 타고 내려 대검의 검신을 피뢰침 삼아 용의 비늘을 뚫고, 그 아래로. 두개골 밑, 뇌간의 사이. 영성의 근간을 구축한 그녀의 혼백 그 자체를 향해 뻗어 나간다.
-지지지직!
[------!!!]
사다르켈리사의 거체가 움찔 떨리며 소리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술식이 완성되었다. 현대 마학의 관점에서 사슬은 연계를 의미하니.
육신 그 자체를 넘어 영혼과 영혼이 맞닿아. 서로의 심상을 향해 섞여 들어. 그 안으로.
사다르켈리사의 심상 세계로 페르난데스를 이끌었다.
-여기부터는 너 혼자 해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페이자쉬.’
페르난데스는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웃었다.
‘지금 ‘우리’는 이성의 신이잖아. 그런 비이성적인 말은 하지 말자고.’
-하.
페이자쉬의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페르난데스의 정신이 사다르켈리사의 영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