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사다르켈리사, 용들의 종말 (2)
-촤르륵.
무슨 소리지? 페르난데스는 어두운 시야 속에 인상을 찌푸렸다. 촤륵, 촤르륵. 사슬이 끌리는 듯한 소리, 또는 금속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화륵.
이윽고, 횃불이 저 멀리에서 스스로 타올랐다. 그제야 흐릿하게 주위가 밝혀졌다. 황금, 온 사방이 황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시대의 동전, 어떤 시대의 유물, 또 어떤 시대, 어떤 세계의 보석과 부장품들……. 통일성 없는 온갖 보물들이 사방에 늘어서 있었다.
-땡그랑.
그를 중심으로 언덕처럼 쌓여 있는 보물들 사이에서, 투구 하나가 맑은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금과 은, 그리고 보석으로 아름답게 조각된 투구는 전투용보다는 예장용에 가까웠다.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굽혀 투구를 집어 들었다. 용과 악마의 모습이 복잡하게 그려진 예술품이었다.
-지이익.
그리고 투구의 텅 빈 바이저 사이에서, 핏물이 한 줄기 흘러 그의 손을 적셨다. 페르난데스가 투구를 던지고 다른 보물을 들었을 때, 또 다른 보물과 유물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의 모든 예술품들은 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횃불 아래에 밝혀진 이 거대한 보물의 언덕은, 그 존재만큼의 혈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피가, 황금이 사방에서 흘렀다.
“아름답지 않느냐? 그것이 너의 죄악이다.”
그리고 저 높이. 보물 언덕의 첨단. 황금과 진은으로 짜 올린 거대한 옥좌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피에 물든 손을 꾹 쥐고 그녀를 올려 보았다.
“혼란스럽지 않은가 보구나. 너는, 용의 심상 세계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니었구나. 누구냐. 아벨레사스. 그 멍청한 계집의 세계였더냐?”
-절그럭.
사다르켈리사, 뱀의 형상을 닮은 여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발치의 유물들을 쓸어 만졌다. 그녀의 하얀 손에 핏물이 번져 붉게 물들었다.
“그 계집의 세계는 어떠했느냐? 박제된 인간의 영혼들이 늘어서 있던가? 그 머저리의 머릿속은 어떠했는지 말해라.”
“무덤들이 있었다.”
“하. 무덤이라. 아벨레사스답기도 하군. 수의라도 차려입고 애도하던가? 제 ‘자식’이라며 보듬어 키우던 버러지들의 무덤가에 앉아서? 영원히? 멍청한 것.”
-쾅!
뱀이 발을 내딛자, 쌓여 있던 유물들 중 일부가 터져 나가며 굉음을 냈다. 그 사이에서 거대한 눈이 드러나며 번들거렸다.
거대한, 붉게 타오르는 눈이 페르난데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쉭쉭거렸다. 이글거리는 동공 사이에서 끔찍한 광기, 끈적하고 치명적인 광기가 흘러넘쳤다.
[우리는 용이다! 아타일라틀, 린드부름, 드래곤, 그래. 뭐라 부르든! 우리는 지배종이며, 지배자는 군림할 뿐, 결코 노예들의 하수인이 되지 않는다! 아벨레사스 그 머저리는 저 스스로 가장 천한 노비가 되기를 자처했구나! 인간에게 보물처럼 매혹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용은 결코 보물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쾅! 콰앙!
그건 난동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용이 날뛰며 사방에 쌓인 보물들이 으스러지고 비산했다. 보석들 아래에 잠들어 있던 용의 거체가 온전히 드러나며 폭포가 쏟아지듯 피와 황금이 흘러내렸다.
페르난데스는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미쳐 날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던 사다르켈리사가 멈칫하며 그를 내려 보았다.
[너는 사다르켈리사를 죽이기 위해 왔느냐? 사다르켈리사를 넘어 너희의 그 하찮은 영광을 쟁취하려 드느냐? 보아라, 네 손을 보아라!]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힐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핏물이 범벅이 되어 흐르는 거친 손이 보였다.
[네 죄악을 보아라. 네 광기를 마주해라! 네가 살기 위해 쌓아 올린 네 살육을 보란 말이다! 심판이라 하였느냐? 회개하라 하였더냐? 너는 그러했느냐? 대저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이냐! 저 천상? 저 만신전의 대신들마저도 한 점 죄악 없이 떳떳하다더냐? 누가, 어떤 자격으로! 감히!]
-콰아아앙!
사다르켈리사의 광란이 점점 더 커져 갔다. 분노가 실체화한 모습으로, 그녀는 붉은 눈을 이글거리고 시뻘건 화염을 입가에 흘리며 소리 질렀다.
[생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죽음을 소비하노라! 살아온 시간만큼 누군가를 죽여 온 존재들이여. 사다르켈리사의 죄악을 논하기에 앞서, 그대들 자신의 위선을 마주하리니!]
-콰아아앙!
사다르켈리사는 천장을 향해 불길을 내뿜었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불기둥이 천장을 박살내고 저 먼 하늘, 밤의 별무리가 흐드러진 하늘 너머로 흩어졌다.
거대한 공동, 그 위에 한켠의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사다르켈리사는 밤하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이 세계, 그리고 수천 세계의 모든 위선자들을 파괴하고, 그들의 모든 흔적을 말살하겠다! 사다르켈리사는 만물의 궁극적인 종말이니라!]
-쿠웅!
사다르켈리사의 앞발이 페르난데스의 눈앞에 떨어졌다. 그 발 아래에서 황금과 보석들이 으스러지며 갈퀴 아래에 가루로 문드러졌다.
[너를 죽이고 여기서 벗어나겠다! 네 노력은 무의미하며, 네 의지는 헛되었으니! 페이자쉬! 시대의 악몽! 더러운 피의 흑마법사! 칼림부르크 학회의 총수, 다섯 왕의 사절……. 이 자리에서 네 유언을 남기거라!]
-쿠르르릉!
용이 비명을 내지르고, 고함을 치며 몸을 뒤틀 때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일그러지며 피를 쏟아냈다. 용은 광기에 휩싸여 소리 지르며 꼬리를, 다리를, 날개를 휘둘렀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거센 진동과 압박감, 그리고 영혼마저 불사르는 광기와 분노가 페르난데스를 옥죄고 있었다.
[네 마지막 흔적을 즐겨 주마! 너를 으깨고, 짓밟고, 삼켜서! 이 이후로 너는 존재하지 않으며, 네가 아끼는 모든 것들 또한 네 종말 이후 너와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겁에 질렸군.”
페르난데스의 차가운 말에, 사다르켈리사의 몸이 움찔 굳었다. 페르난데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며 말했다.
“무엇이 두렵나. 용. 회유가 실패하니 설득하고, 설득이 실패하니 이젠 협박을 하는구나. 나를 죽이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겠다라……. 나를 죽이지 못하면 여기에 수감된 꼴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처럼 들리는구나.”
[……감히!!]
-쿵!
페르난데스의 옆에서 이그드라실의 가지만큼 두꺼운 꼬리가 바닥을 내려찍었다.
“왜지? 왜 제 심상 안에 봉인된 것처럼 굴지? 아……. 하하. 그렇군.”
페르난데스는 말하던 중간에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다르켈리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 보는 와중에도, 그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광기의 대악마. 너, 제정신이었구나?”
[무슨 소리냐!]
“영성…… 신위의 영역. ‘광기’라는 영역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이성을 자신의 영혼 속에 봉인시켰군. 영혼을 둘로 나누었어. 그래. ‘꿈’이라……. 마법이군. 이 세계, 네 심상 세계 전체를 마법으로 자아 올렸어.”
페르난데스는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닦았다. 핏물은 실재하는 것처럼 길게 번졌지만, 이윽고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까맣게 타들어가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환상이군. 자기 자신마저 속일 정도로 정교한 환상. 자신의 이성을 봉인시키고, 그 주위를 마법으로 둘러 감쌌어. 힘을 얻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지옥 마력의 타락에 영혼까지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아주 교활해. 아주 교활하군…….”
[닥쳐!]
-콰아아앙!
용의 두꺼운 팔뚝이 페르난데스를 당장 짓밟을 듯 내려찍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을 긁고 물러서는 것에 그쳤다. 기세가 흉흉했지만, 용은 페르난데스에게 실제로 접촉하지 못했다.
“넌 로프트가, 그리고 보탄이 너를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힘을 얻기 위해 기꺼이 로프트의 수술대에 올라섰겠군. 비프로스트를 이용해 지옥 마력을 급여받고, 그 과정에서 이성을 봉인시키고……. 하지만 서투르구나.”
[무슨 말이냐!!]
“마법의 술식이 투박하다. 마학 연구를 게을리 했군.”
-팅.
거문고가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다르켈리사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황금들이 잿가루가 되며 흩날렸다. 그녀의 몸을 이룬 검은 비늘, 강대한 근육과 뼈들마저도. 하나하나 재가 되어 흩어졌다.
[너…… 너…….]
“다만 강대한 마력을 이용해 우악스레 짜 올린 환각 결계. 마력의 흐름도, 술식의 보조도, 술사 자체의 조예도 너무나 낮다.”
-팅.
황금이 녹아내리고, 공동이 진동하며 영역이 확장된다. 세계가 흔들리고, 밤하늘의 천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별이 유성우처럼 흐르고 달이 미끄러지며 해가 떠오르고 빛이 비쳤다.
[그만둬라!!]
“네 광기는 나를 타락시킬 수 없고, 네 마력은 나를 붙잡을 수 없다. 이곳, 여기. 심상 세계 안에서 너는 물리적으로 나를 해칠 수 없다. 자, 이제 네게 무엇이 남았느냐?”
[영원!!]
사다르켈리사는 회전하는 세계 속에서 비틀거리며 외쳤다. 비늘이 부스러지고 근육이 수축하며 점점 그녀의 몸집이 작아져가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영원이 남았다! 널 쓰러트릴 수 없다 하더라도, 널 이곳에 나와 함께 봉인시키기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네 영혼이 여기에서 얼마나 형체를 유지할 것 같으냐? 사다르켈리사는 수천 년간 이 자리를 홀로 지켰다! 너, 필멸자여. 너는 그리할 수 있겠느냐? 네 그 잘난 이성을 유지한 채 영겁을 버텨낼 수 있겠느냐!]
“해 보지.”
페르난데스는 칼을 뽑아 바닥에 박아 넣었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움켜 쥔 채로, 단단하게 서서 눈을 감았다.
이곳의 시간은 물질 세계와 전혀 다른 감각으로 지나간다. 이 자리의 수천 년은 어쩌면 물질 세계의 찰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말은 즉, 자신이 얼마를 버티든, 얼마나 허물어지고, 어떤 세월을 겪어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물질 세계의 육신엔 어떤 부담도 없다는 뜻이었다.
반면 이곳에선 마력이, 그리고 마법이 자유롭다. 이 심상 세계 전체의 지배권은 사다르켈리사가 가지고 있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다르켈리사의 마법 조예가 예상보다 저조하다는 것이 그에겐 호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심 싸움이다. 이 세계의 지배권을 두고 벌이는 장구한, 기나긴 마법전. 대악마의 의지와 마력. 그 틈을 찾아 그의 마력 쐐기를 박아 넣을 수 있을지, 또는 그 전에 페르난데스의 의지가 먼저 쇠할지의 싸움이다.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너 또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마.”
대악마의 마력과 인간의 의지. 그 둘 중 무엇이 먼저 고갈되는지를 걸고 하는 도박이다. 장구한 세월, 그리고 판돈은 목숨.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많은 종류의. 페르난데스는 그런 종류의 도박을 싫어하지 않았다.
* * *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오, 친구. 인내심을 갖게!”
-삐이익!
매가 토르를 비난하는 것처럼 길게 울었다. 토르는 매의 발아래에서 투덜거리며 지상을 내려 보았다. 지상에선 요툰과 헬하임의 군단이 악마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요르문간드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은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불타오르는 이그드라실을 배경으로, 사내와 요르문간드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다간 요르문간드보다 먼저 저기 저놈들이 다 죽어나겠는데?]
이그드라실로 진격하던 요툰과 헬하임의 군단은 악마와의 전투에서 점차 뒤로 밀리고 있었다. 악마들은 그야말로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거인족 연합군은 비록 그 질에선 앞서더라도 양에서 밀리고 있었다.
요르문간드가 눈이라도 뜨는 날에는 그대로 휩쓸려나갈 것이 뻔했다. 토르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풀다가, 그때마다 발톱을 세우는 매에게 투덜거렸다.
“침착하게, 친구. 아직 절정은 멀었다네.”
[얼마나 더?]
“펜리르가 요르문간드의 목을 뜯을 때까지.”
[우리가 하면 되지 않나? 요르문간드는 지금 옴짝달싹하지 않는데? 우리가 덤벼들면 되지 않겠나?]
“그래서야 다 된 상을 엎는 것밖에 더 되겠나? 요르문간드는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준비를 해 왔어. 지금 저 몸체의 머리를 뜯어 날린다 하더라도 놈에게 진정한 죽음을 안겨줄 수는 없지. 펜리르가 해내야 해.”
로프트는 천천히 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토르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무얼, 이제 와서 몇 시간 더 기다린들 무슨 상관이겠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하지만…… 저 필멸자가 해낼 수 있을까?]
“아무렴. 보탄과 나, 그리고 선신 만신전. 거기에 저 스스로 쌓아 올린 격까지 더한다면. 펜리르는 지금 이 자리, 우리 중 누구보다 강하니. 저자가 실패한다면…… 우리에게 닥칠 종말은 피할 수 없을 걸세.”
[거 참 의존적인 자세로구만.]
“본디 죽음은 의존적인 것 아니겠나? 산 자가 있기에 죽음도 있는 법. 하하.”
로프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