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길을 비켜라 만신전의 양들아
봄이 스멀거리며 미끄러져 오고 있다. 페르난데스는 갑판 선두에서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메를린포트. 출항지로 향해 달라는 그의 요청에 레이아는 흔쾌히 닻을 올렸다.
“고맙소.”
“무얼! 여정이 오히려 짧아 아쉽군.”
레이아는 빙긋 웃었다. 북부로 향하는 항행은 거칠고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으나 결국 말레이른의 기함을 얻은 이 시점에서, 가이메른 왕실은 다시금 북해상 최강의 군사력이라는 이명을 돌려받았다.
거함의 주위로 쌀알처럼 흩어진 작은 함선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왕국 갤리 못지않은 군선들이며, 이들이 호위하는 기존의 민선들은 이젠 물자 수송선과 무역선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북해 전반에 걸친 중계 무역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사략 함선 운용. 가이메른 왕실은 인퍼머르를 점거했던 시절만큼 빠르게 부를 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부가 단 한 사람의 항행을 위해 기꺼이 한 절기의 항행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국빈급 대우라 할 수 있었다. 북부의 성대한 축하연을 뒤로한 채 남부로 떠난 지 어언 일주일이다. 남부로 항해할수록 기상이 빠르게 맑아지고,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즈음이면 세르너드 남작령에선 봄철 수확이 한창일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작령을 떠난 것이 벌써 2년 전이니, 지금 어떤 상태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향수병이냐?
‘늙은이처럼 무슨.’
-이젠 제 나이마저 부정하는 게냐?
‘나는 스물이야.’
-퍽도.
페르난데스의 상념에 끼어들어서 페이자쉬가 짧게 투덜거렸다. 어쨌건 봄이었다. 적어도 한 계절을 온전히 혹한 속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는 몰라도, 더운 지방 출신인 키르하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쾌속선으로 파발을 먼저 보내지 않았나. 늦었을 리가 없어.”
“이단심문청은 그대 생각보다 손이 빠르오. 레이아 여왕.”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비프로스트를 타 넘기 전, 페르난데스는 제피스를 먼저 남부로 귀환시켰었다. 당연히 그때의 상황이 본청에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고……. 지옥 관문으로 성자가 넘어갔다는 정보를 들은 이단심문청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페르난데스는 다소 유쾌한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며 기겁하는 베오른의 얼굴은 퍽 보기 좋았다.
“항구다!!”
-타다다닷!
그의 곁을 지나서, 새하얀 드레스가 펄럭거렸다. 프레이야였다. 그녀는 거의 평생을 아스가르드에서 보냈고, 그 외의 시간을 북부에서 지냈으니. 그녀에게 남부 대륙은 미답지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갑판의 선두에 매달려 소리 질렀다.
“위대한 바니르, 바나헤임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 생명과 봄과 꽃과 기타 아름다운 것들의 여신이 간다. 남부의 문명들이여!”
경배하라!! 프레이야는 양팔을 촥 펴며 소리쳤다. 물론 항구에 접항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말레이른의 기함은 결코 내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지금 그녀의 외침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페르난데스와 레이아뿐이었지만.
“여비는 베이타서스 교회에 청구하시오.”
“하하. 농담이 늘었구나! 마음에 든다. 어디 올 여름엔 달리 계획이 있나?”
“……없소만?”
“혹시 들어 본 적 있느냐? 해변 전체가 보석으로 깔린 아름다운 섬이 있다. 한 움큼만 퍼가도 한 사람쯤 한 해는 족히 호화롭게 보낼 수 있는 데다……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지. 왕실의 초대를 받겠느냐?”
레이아는 한 발자국 그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한 발자국 멀어졌다.
“수도사를 속세의 사치로 유혹하려 드시오? 정결의 서약에 어긋나오.”
“넌 그다지 정결해 보이진 않는데……? 어디 미녀 둘을 수행원으로 끼고 다니는 사내가 수도사처럼 보이겠느냐? 아, 이젠 셋이로군. 정부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귀족들도 저런 미인들을 꿰차진 못했음이야.”
“조력자요. 현지 조력자.”
“물론 그렇겠지.”
레이아는 후후, 하고 웃었다. 그녀는 곧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외쳤다.
“정박 준비! 하선을 준비해라! 예포 또한!”
“예, 전하!!”
곧 항해사들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쇠사슬에 얽힌 쾌속정들이 하나둘 해상으로 하선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포?”
“암, 응당 예포가 필요하겠지. 지난번에 보낼 땐 경황이 없어 예우를 준비하지 못했구나.”
레이아는 코트 깃을 잡고 장난스럽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일국의 은인에게 취하는 예를 허락해라. 네 위신이 곧 우리 민족 전체의 위신과 다를 바 없으니. 너를 그저 피난민처럼 저 항구에 입항시킬 수는 없다.”
레이아는 상쾌하게 말하고는 사뿐사뿐 떠났다. 그녀는 등 뒤로 모자를 휘적 흔들고는 말했다.
“그리고 내 제안을 잊지 말거라! 그 섬은 여름뿐만 아니라 가을, 겨울, 그리고 이 절기에도 풍광이 매우 빼어나다!”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일별하고는 다시 항구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봄이다. 햇살 따스하고, 바람마저 포근한. 남부 부동항의 봄이었다.
-퐁!
그리고 봄의 여신이 기쁨에 겨워 갑판 전체에 꽃을 피워 내는, 그런 봄이었다.
* * *
-부우우우우!!
메를린포트는 페이른 왕실의 물자 교역 중심지이자, 가장 융성한 부동항이며 동북부 삼각 무역의 가장 핵심이 되는 무역항이었다.
따라서 메를린포트의 시가드들은 군율이 엄정했고, 항만 방비는 완벽에 가까웠다. 초계함들은 다가오는 서펜트 킹의 기함을 보자마자 경보를 울려댔다.
물론, 서펜트 킹의 기함은 함포로 상하게 만들 수 없다. 경보가 울리든 말든 그들은 항만으로 인접했다.
수평선에 걸쳐진 것만으로도 거리 감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기함이 내항하고 있었다. 마치 성벽이 다가오는 듯한 모습에 메를린포트 항만 인근의 모든 시민들은 패닉에 빠져 흩어졌다.
이들은 대도시 거주민치고도 재난 상황에 퍽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당장 작년 초에 워커 사태가 도시 전체를 망가트렸고, 그 이전엔 늑대 인간 난동이 있었으며, 그 이후에 가이메른의 황금함대가 항만을 무단 점거 하기까지 했었으니.
그러나 재난에 익숙하다는 뜻이 곧 재난 상황 앞에서 담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가장 대담한 선원들조차도 위협사격을 몸으로 맞으며 상처 하나 없이 다가오는 바다 위의 요새엔 질겁해 사기를 잃고 도주했다.
“누가 왔다고……?”
그런 혼란 상황 속에서도 공포 대신 당혹을 먼저 느끼는 이들이 있었으니. 첫째로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한 메를린포트 행정 귀족들이었으며.
“초계정들이 보고하길, 가이메른 왕실의 친전이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북부 해상 도시 전역에 흩뿌려진 각 왕실, 또 각 세력의 정보 집단들이 그랬으며.
“가이메른이라고? 형제, 알렌토 형제!! 보고서, 보고서를 가져오게! 페르난데스 형제가 처음 받은 작전 지역이 어디였나!”
“……가이메른 왕실입니다.”
“아, 제발. 왕실 함대 전체를 끌고 지금 세속 왕국의 항구로 무단 접항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해 주게…….”
“제피스 형제님을 모셔 올까요?”
“아니. 부디 주 베이타서스께 날 데려가 주게.”
장례 성사를 희망하는 몇몇 이단심문관들 또한 그랬다. 아니, 이단심문관들은 사기를 잃는 다른 시민들과 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목숨의 위협이 아닌, 수치심에 가까운 이유 탓에.
-콰아아아앙!!
갑작스런 포성이 메를린포트 전역에 굉음을 내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엘프 왕실의 축전 예포라는 소식까지 들었을 때.
“장례 성사……를 준비해 주게.”
“막토 수페를라우도.”
사전에 다른 정보 집단과 어떤 접촉도 하기 전에 페르난데스를 호위해 이단심문청으로 빠져나가려는 몇몇 이단심문관들은 자신의 장례 성사를 요청했다.
* * *
맑은 하늘, 따스한 봄. 꽃이 만개한 쾌속정에서 네 사람이 항만에 인접하고 있었다.
봄철 바람에 한껏 들뜬 키르하스, 긴 임무가 끝나 마음이 풀어진 아벨, 그리고 그냥 신난 프레이야, 작전 경과보고를 할 생각에 오랜만에 장난기가 도는 페르난데스까지.
네 사람은 항구의 물밑 정보전과 갑작스런 예포로 경악에 찬 시민들. 그리고 다가오는 쾌속정을 향해 우르르 몰려드는 시가드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긴 했다. 무단 입항 자체는 항만의 경범죄 중에서도 형벌이 강한 범죄에 해당했지만, 어쨌건 벌금형 정도의 가벼운 소란이고. 그 누구도 감히 베이타서스 교회의 이단심문관을 경범죄로 인한 벌금형에 처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래서 고위 공직자가 편하다니까.’
-살판났군.
‘이제 당분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건데 당연히 기분 좋지. 이제 정말 느긋하게 대천사나 찾아보자고.’
-예상 지역은 있나?
‘글쎄, 일단 아세아스 고위 의회를 한번 들러 봐야겠어. 전생엔 적대 세력이어서 잔해물만 봤지만, 거기 전성기 때는 대단한 마탑 아니었나. 한번은 꼭 가 보고 싶은 동네였지.’
페르난데스는 그답지 않게 유쾌하게 말했다. 대악마 둘을 소탕했다. 문명 사회의 짧지 않은 역사 안에서 이런 대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는 거사였다.
그리고 또한, 두 명의 대천사를 구원했다. 하나로 단결된 북부는 빠르게 안정되고 있고, 핌블페스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점차 기상도 정상화될 테니, 몇 세기간 북부인들은 북부 대륙에서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 이전 문명 사회의 가장 거대한 두 사건 중 하나가 종결된 상황이다. 칠흑의 에리크가 죽고 대천사가 북부를 다스린다면 타락이 번질 일은 없다. 이따금씩 이단심문관 몇몇을 파견하면 될 일이고,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아에렌과 사전 공조를 끝내 놓은 상황이다.
또 다른 것.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삼십 년은 있어야 일어날 사건이다. 그러니 적어도 문명 사회의 종말로 향하는 시계는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뒤로 물러났다.
짜릿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확실한 피드백이 체감된다는 것은. 페르난데스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하며 메를린포트의 항구에 발을 디뎠다.
“멈추시오!”
시가드들의 외침이 들릴 때까지도, 그의 머릿속은 프레이야의 화단처럼 평온했다.
“아니, 너희들이 멈춰라.”
갑작스레 저 멀리서 기사들이 나타날 때까지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페이른 나이츠들이 올 수도 있지. 페르난데스는 신분 증명을 하기 위해 품에 손을 넣었다.
“알베르트 세르너드 공, 맞소?”
“사람 잘못 봤소.”
페르난데스는 본능적으로 대답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이름은 데인 왕국에서 쓰던 음성기호였는데……?
페르난데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다른 세력을 바라보았다. 녹색 휘장에 펄럭이는 문양…… 왕가의 문양……. 비센테 왕의 인장이 그려져 있는…….
‘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제야 페르난데스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적어도 세 개의 서로 다른 집단이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악은…….
“형제여!!!”
“으익?”
“흐억!”
-콰아아앙!!
하늘을 쩌렁하게 울리는 거친 목소리!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어디선가 뛰어내려 도로의 타일들을 모조리 박살 내며 떨어져 내린 디모니카였다!
“형제여! 주의 거룩함을 찬미하라! 오오! 형제!!”
-와락!
디모니카, 파비아노는 거칠게 소리 지르며 달려와 페르난데스를 꽉 끌어안았다. 페르난데스는 그가 나타난 순간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 제기랄. 베오른 형제님…….’
-적어도 세 집단에 지원을 요청한 모양이군.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제피스가 대악마의 부활을 알린 것이 적어도 보름 전이고, 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이단심문청이 아니었으니.
파비아노는 페르난데스를 단단하게 붙들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 더 조용히…… 오지 그랬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장께선 많이 진노하셨습니까?”
“일단 나는 기쁘네. 우리 모두가 기쁘지. 형제의 실책이 아니니 걱정하진 말게나.”
“메를린포트엔 누가 와 있습니까?”
“제피스 형제님이 계시다네. 지금 북부 해로에 얽혀 있는 모든 항구에 이단심문관들이 배치되어 있다네. 형제를 ‘몰래’ 호위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세력들도요?”
“광명순교회, 구호기사단, 페이른 왕실 첩보부, 데인 이너 서클, 제국 아이언사이드, 그 외 기타 등등. 교황청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집단들이 자넬 기다리고 있었네.”
“하하.”
“제피스 형제께서 전달하란 말이 있었네. ‘어차피 요란하게 된 것, 이판사판이다. 최대한 뻔뻔하게 나와라.’”
“그건 마음에 드는군요.”
페르난데스는 메마르게 웃으며 파비아노를 떼어냈다. 그는 이 년 전을 떠올리며 잠시 크흠, 하고 목을 풀었다.
-아, 그거 할 건 아니지? 그때 충분히 부끄러웠잖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아.’
-보통 한 번으로 수치심을 배우기 때문이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야. 우리 삶이 언제나 그랬듯이.’
페르난데스는 잠시 각오를 다지고는 거칠게 외쳤다.
“이단심문관 아르칸젤로다! 길을 비켜라, 만신전의 양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