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209화 (210/388)

209. 황제를 향해 쏴라 (1)

“저기, 은공. 저희 개선 중인 것 아닌가요?”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들뜬 기분으로 흥얼거리던 키르하스는, 여정 내내 완전 무장한 채로 따라붙은 흉흉한 외국 기사들의 시선 아래에서 점차 감정이 상해 가는 듯했다.

“정말 너무들 하네요. 은공께서 어떤 일을 겪고 어떻게 살아 돌아오셨는지 아무도 몰라주는 것이요.”

“어디 성직자가 속세의 명성을 탐하겠어?”

“명성의 문제가 아니라요. 저들은 은공에게 목숨값 적어도 하나 이상은 빚지고 있는 셈 아니에요?”

키르하스의 말에, 함께 말을 몰고 있던 아벨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키르하스. 증명할 방법이 없다.”

“화가 나진 않으세요? 몸을 던져 가며 구한 세상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요!”

“화가 나느냐, 페르난데스?”

아벨이 웃으며 말하자,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화를 내기에 앞서서, 머리가 복잡했다.

세속 군주들의 근심이 무엇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군 소집령을 내려 성전까지 선포한 마당에, 군비를 축내 가며 응했더니 돌연 베이타서스 교회가 침묵하기 시작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가. 정치가들은 누구보다 이해타산에 예민했으며, 또한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러므로, 의문이 든 순간 그들은 가장 위협적인 가정을 먼저 시작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방을 소모시켜서 다른 국가를 지원하진 않을까?’

이미 각국의 정부에선 이러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을 터였다. 교회의 정치권 개입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정보력을 외부로 돌릴 것이다.

페르난데스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왕가의 군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런 취급에 억울하거나, 분개하기보다는…….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지.’

혹시 저놈들이 세력권을 넓히기 위해 교회와 손을 잡았나? 이러한 종류의 의심이 동부 왕국 연합 도처에 깔려 있는 상황이다. 애당초 동부 왕국 연합은 서로를 믿기 때문에 뭉친 것이 아니라, 서로 이젠 그만 싸우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허술한 연맹체였으므로.

페이른과 데인 왕가가 대립했던 순간처럼, 지금 왕국 연합은 서로를 향해 언제든 칼끝을 겨눌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향후 교회의 행보 하나하나가 전쟁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세속 사회의 인망과 영향력을 모두 잃어버리기 직전인 지금이, 오히려 문명 사회에 교회가 가진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인 셈.

-다각, 다각, 다각.

상념 속에서, 말이 발을 내디뎠다. 메를린포트와 이단심문청은 도보로 사흘 거리에 있기에, 여정은 길지 않았다.

“흐아암.”

프레이야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머리칼을 장식한 화려한 화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밝게 말했다.

“뭐, 그래도 말이다. 필멸자들아! 정말 좋은 날이 아니냐! 남부는 따듯하구나. 참 마음에 들어.”

“이제 따듯하지 않은 곳으로 갈 계획이오만.”

“북부로 돌아간다는 뜻이냐?”

“분위기는 비슷할 수도 있소. 이단심문청에 온 걸 환영하오.”

-끼이이익.

그 말과 함께, 길의 끄트머리. 산길로 접어드는 그 골목 어귀에 걸려 있는 경고문이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살짝 기울어졌다.

-경고. 귀하는 교황령에 출입 중입니다.

-체포 시 화형될 수 있음.

-성 바오톨로메오 수도원.

이젠 숫제 고향에 온 기분이라,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살짝 겁을 먹은 프레이야를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 * *

-부우우우우—!!

-뎅, 뎅, 뎅.

페르난데스가 수도원의 외성을 발견했을 때, 수도원 방향에서 뿔피리 소리가 길게 퍼지고 종이 울렸다. 이제야 개선식 같은 모양새였다.

거대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그 사이로 수도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페르난데스가 그 사이를 지나가자, 수도사들은 아무 말 없이 바닥을 쿵. 찍곤 했다.

이것은 저들 나름대로의 환영이었다. 대단히 진심이 가득한. 적어도 헤레티카와 엔마기카처럼 정숙할 줄 아는 수도사들 사이에선 그랬다.

“형제여!! 오, 맙소사! 형제가 돌아왔다아아아!!”

“난 믿고 있었다네! 베이타서스께서 굽어 살피심이라! 막토!”

정숙할 줄 모르는 수도사들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뛰어왔다. 한 발짝, 한 발짝에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으익.”

옆에서 프레이야가 기분 나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페르난데스는 말과 함께 으스러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말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수도사들에게 채여 갔다.

“형제님들. 저도 반갑습니다만 조금 진정하시는 것이…….”

“주의 거룩함을 찬양하세!!”

“오, 형제. 어디 보게. 다친 곳 없나? 팔 두 짝, 다리 두 짝에 머리도 달려 있군! 멀쩡해!”

“그게 꼭 멀쩡하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으하하하! 혀도 멀쩡하다네! 이럴 수가! 상처 하나 없이 대악마를 썰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나?”

“난 아무래도 걱정이네! 몸 내부까지 멀쩡한지 확인해야겠어! 야외 찬송의 전당으로 데려가게나!”

“20세트 정도는 가뿐히 들어야 하네! 이건 타락 순수성 검증이야!”

이단심문관다운 잔인한 검증법이다. 페르난데스는 투덜거리며 달려드는 디모니카들을 떼어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난동을 부리는 디모니카들을 향해 박수를 짝 쳤다.

“자, 형제님들. 오는 길에 제가 교황 성하의 인장을 봤는데, 이러고 있으셔도 됩니까?”

“엇, 음.”

“음.”

제아무리 디모니카라 하더라도. 아니, 신성을 몸에 흘려 넣어 육신을 재구성한 디모니카들이라면 더욱이. 베이타서스의 전권 대리인인 교황의 권위에 더욱 강하게 복종하기 마련이다.

디모니카들은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으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교황 성하께선 대예배당에서 기다리고 계시다네.”

“수도원장님께서도 함께 계시지. 아, 제피스 형제님. 형제님께서도 참관을 하시라는 수도원장님의 명령입니다.”

“그럴 생각이었네.”

제피스는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벨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제피스를 따라 대예배당으로 들어섰다.

* * *

“무장을 해제하시오.”

대예배당의 회랑 끝, 예배소로 향하는 대문 앞에서 성당 기사가 고압적인 말투로 그를 내려 보았다. 번들거리는 투구 바이저 아래로 푸른 눈이 번쩍였다.

“이단심문청에선 개인 무장이 권장 사항인데?”

“교황 성하의 친전 아래에선 아니오. 세르너드 주교.”

“내가 페르난데스 세르너드라는 것, 그리고 2급 이단심문관이라는 것, 주교급 인사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인가?”

페르난데스는 기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기사는 다소 꺼림칙한 기색을 보이며 머뭇거렸다. 그는 픽 웃으며 소드벨트를 풀러 기사에게 던졌다.

“받게.”

기사가 페르난데스의 소드벨트를 움켜쥐려는 순간, 페르난데스의 주먹이 벼락처럼 기사의 투구에 내려 꽂혔다. 땡, 하고 강철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비틀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단심문청에서 이단심문관에게 그런 눈을 보이지 마라. 성당 기사. 화형당하기 싫으면.”

“감히……!”

기사는 울리는 머리를 짚으며 거칠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피스가 피식 웃으며 기사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거 뽑으면 죽네, 형제. 그리고 디모니카가 정말 공격하려 했다면, 자네 머리가 온전했을 것 같나? 페르난데스 형제. 자네도 진정하게. 교황 성하의 친전일세.”

“예, 형제님.”

페르난데스는 기사의 손에서 소드벨트를 빼앗아 어깨에 걸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예배소의 무거운 문이 미끄러지며, 자줏빛 카펫이 깔린 성소가 드러났다.

단상 근처엔 추기경들과 교황, 그리고 수도원장이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피스가 살짝 물러서고, 페르난데스는 그 사이를 가로질러 곧장 교황에게 걸어갔다.

“2급 이단심문관, 디모니카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오, 과례는 되었네! 어린 형제. 늙은이가 형제의 보고서를 보고 몸이 달아 직접 찾아왔는데,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실례를 저질렀군!”

페르난데스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자, 교황이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베오른은 페르난데스에게서 무장을 건네받아 짧게 살피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성검이 온전하군. 페르난데스 형제.”

“다행히도 부러트리진 않았습니다.”

“하하, 뽑아 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목례하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칼을 뽑아 올렸다. 열쇠검의 빛이 한순간 밝게 타오르며 어둑한 예배소를 환히 밝혔다.

교황과 추기경이 감탄하는 사이, 페르난데스는 칼을 빙글 돌려 바닥에 박아 넣고는 뒤로 물러섰다.

“과연, 정결함을 의심할 여지가 없군!”

“막토.”

추기경들이 성호를 긋고는 따라 고개를 숙였다. 교황은 만개한 미소를 지으며 페르난데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지난번에 본인이 그대를 믿는 이유를 말했었는데, 혹 기억하나?”

“보고서는 해당 지역의 다양한 자료들을 교차 검증한 이후에 결재된다는 말씀 말이십니까?”

“맞네. 여기서 문제가 있지. 대황야엔 우리의 눈이 많이 있었다네. 워낙에 거대한 사건이었으니, 황야 곳곳에서 증거를 찾아내기 수월했고…… 하지만 이번에, 북부의 경우엔 다소…… 어렵지.”

북부는 엄밀히 말하자면 선신 만신전의 권역이 아니다. 애당초 원양을 건너면 해상 약탈과 전쟁을 취미로 여기는 전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문명 밖의 사회인 탓이다.

그러니, 페르난데스의 보고서를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해당 지역에 파견되었던 제피스와 몇몇 디모니카들뿐이었으며. 정작 중요한 순간 페르난데스는 지옥 관문에 몸을 던졌다.

거기까지 진실일 경우, 그리고 결과적으로 페르난데스가 타락의 징후 없이 돌아왔다면……. 교황은 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녕, 대악마를 처단했는가?”

“예, 성하. 주의 이름에 맹세코 진실입니다.”

“주께서 보우하심이라……!!”

교황 바울은 성호를 그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짧지 않은 삶 동안 수많은 사건과 끔찍한 재난을 마주했지만 그 모든 순간을 통틀어 이토록 영광스러운 날이 없었다.

“세상이 자네에게 빚을 졌군.”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자네에게 빚을 지고 있다네.”

“……예?”

바울은 잠시 말을 고르고는 추기경에게 손짓을 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추기경이 서류 하나를 들고 와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제국의 황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페르난데스는 보고서의 겉면을 넘겼다. 보고서에는 제국의 고위 귀족들과 선제후, 그리고 황실의 조직도에 관한 상세한 기록들이 있었다. 외부에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반란 모의 혐의가 붙을 수 있을 정도로 세부적인 자료였다.

-재밌게 돌아가는군.

‘교황…… 늙은 너구리 같으니.’

페르난데스는 전생을 기억한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교황 바울.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아 영생자가 된 사내. 선신 만신전의 책략가이자 최후의 전쟁까지 그와 전략을 겨루었던 전술가. 사방으로 분열된 선신 만신전 세력을 규합해 낸 정치가…….

그의 의도는 반드시 선하다. 악마와 결탁해 세계를 멸망시키던 페이자쉬에게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으니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창공의 기사를 파견해 아리아를 암살하도록 사주한 것 또한 저 사내였다.

페이자쉬와 바울은 닮은 점이 많았다.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공략해 적을 거꾸러트리는 것에 대해 달인의 영역에 있다는 점에 있어 특히 그랬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제국 내부의 극비 자료를 건넨다. 그것도 지금 동부 왕국 연합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황제 선출권을 노리는가…….’

제국의 황위는 계승되지 않는다. 제국이 동부에서 북부, 그리고 대륙 중부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세력권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혈통에 의존하여, 모든 후계자들이 위대한 황제가 되리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호부 밑에서도 얼마든지 견자가 나올 수 있는 법.

그리하여 ‘황제 선출권’이라. 현명했던 시황제는 자신의 자손들이 무능한 것을 탓하며 가장 강력한 일곱 대영주에게 선출권을 내렸으니. 황제 그 자신의 혈족과 함께 도합 여덟 가문이 차기 황제를 지목할 수 있다.

그렇게 선출된 황제는 종신직이지만……. 그러나 어쨌건. 황위의 계승은 제국 정치에 대단히 예민한 문제이며…….

‘키르자트와의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 황권은 바닥에 떨어져 있다.’

황실을 제외한 일곱 선제후가 만장일치로 동의한다는 가정하에, 황제는 실각하고 황위 계승 의회가 열릴 수 있으니.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들어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다음 황제는 누가 되길 바라십니까.”

“……하하. 하하하!”

교황은 돌연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쥐었다. 그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일이 끝나면 교황청으로 오게.”

“……예?”

“이번 일은 반드시 비공식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네. 그리고 성공한다면…….”

그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페르난데스에게 속삭였다.

“본인이 떠난 다음, 본인의 자리는 자네의 것일세.”

“……성하!!”

그의 등 뒤에서 추기경들이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인상의 추기경이 걸어 나와 교황에게 외쳤다.

“이건 적법하지 못한 일입니다!”

“사제들은 정치에 능통하지 못하지. 외교는 전투와 다를 바 없고, 정치는 전쟁과 같다네. 정세를 바라보는 눈은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눈을 가진 이가 주의 선택을 받은 성자이고, 또 그 스스로 대악마를 처단했으니. 이보다 적합한 인재가 있을 수 있나?”

“페르난데스 수사는…… 분명 뛰어난 인재이옵니다. 하오나 성하. 그 유능함은 주의 검으로써 쓰일 때에 빛을 발하는 법이라 믿사옵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교황은 예배소 바닥에 박혀 은은한 빛을 발하는 열쇠검을 바라보았다. 교단의 성물은 어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정순했다.

“열쇠검을 처음 들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잊었나?”

“…….”

성 그레고리. 지금의 교황청이 있던 자리에 둥지를 틀었던 악룡을 무찌르고 그 위에 교회의 반석을 올린 성자. 강대한 악이 지상을 활보하던 그 시절에 칼 한 자루로 교지를 지켜낸 수호자……. 추기경들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겠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심문관.”

“받들어 따르겠습니다.”

교황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화답했다. 교황과 성자는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둘은, 닮은 점이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