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황제를 향해 쏴라 (2)
교황이 떠난 이후, 베오른은 가득 쌓인 보고서들을 그저 탁상 위에 올려둔 채로 가만히 지도를 올려 보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명 사회의 복잡한 세력권이 그려진 전술 지도를.
교회의 문제를 황제에게 덮어씌운다. 이것은 이단심문관이 할 일이 아니었다. 황실에선 이단 정황과 타락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제가 세속 사회의 정세에 개입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러니, 이건 자신의 과실이 아닌가. 베오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섣불리 성전 선포를 요청한 것. 그 일 때문에 지금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고 있는 셈이니까.
베오른이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집어들 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들어오게.”
베오른은 천천히 의자를 돌리며 문을 마주보았다. 문이 열리며, 페르난데스가 걸어 들어왔다.
“벌써 시작하려 하나?”
“예, 수도원장님. 길게 끌 일은 아닙니다.”
마치 옆 마을을 잠시 시찰하고 온다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낸 이는 비공식적으로 대악마 둘을 처리한 이단심문관이다.
베오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권했다. 페르난데스는 베오른에게 찻잔을 받아 들며 맞은편에 앉았다.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일이 우려되네.”
“세속 정세에 개입하는 것 말입니까?”
페르난데스의 말에 베오른은 아무 말 없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이 썼다.
“성하께선 황실에서 우릴 먼저 이용했으니, 우리 또한 그렇게 하자 하셨지. 하지만 주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동해보복을 권하지 않네.”
“제국이 분열되면 장기적으로 문명 사회에 득이 됩니다.”
“……뭐라고?”
페르난데스는 웃음기 없이 말했다.
“황제는 독선적이고, 제국은 강대합니다. 동부 왕국은 매년 제국에 막대한 전쟁 지원금을 보내고 있었고, 50년 전쟁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 자국의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부 왕국 연합에 가해지는 세율이 나날이 오르고 있습니다. 세속 군주들의 불안감은 오히려 지금이 평온하기에, 황제와 술탄이 전쟁을 벌이지 않기에 일어난 문제입니다.”
“평화가 문제라?”
“예, 수도원장님. 황제는 전쟁 실패로 인해 무너지는 황실의 권위를 황금으로 막아내고 있습니다. 그 황금은 동부 왕국의 곡창지대에서 비롯되고, 서부 원정에 집중되었던 제국의 군단들은 이제 유지비를 잡아먹는 괴물 취급을 받고 있지요.”
페르난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서부에서 동부로, 길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
“황제에겐 전쟁이 필요합니다. 서부를 건드릴 수 없다면, 황제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남부의 정글은 돈이 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황실에선 남부 정글 지대를 건드릴 수 없는 이유가 따로 있다.
북부로는 넓은 바다뿐이다. 그 너머로 물론 북부 대륙이 있기야 하지만, 원정을 보내기엔 아직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고 원양을 건너는 원정군을 꾸리기엔 초기 투자 비용이 과하다.
그렇다면 황실 입장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곳은 동부뿐. 동부 왕국 연합에서 황실의 서부 원정을 기꺼이 지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동부에 신경을 꺼 달라는 완곡한 부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제 황실이 신경 쓸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 된 이 시점에서, 오히려 평화는 전쟁을 위한 한 자루의 비수가 되어 있다.
“술탄과의 전쟁은 너무 빠르게, 그리고 어떤 이윤도 없이 종결되었습니다. 하물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비단길이 막혔고, 황무지는 녹지가 되었으며 호족 연합은 단단히 규합되었고, 심지어 황무지 곳곳엔 망령 군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제국의 여론은 이미 서부 원정에 지쳐 있었다. 5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며, 이를 위해 투사(投捨)된 수많은 자본과 인력은 황실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의 입장에선 승리가 필요했다. 치적에 남을 수 있고, 백성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명백한 승리가.
이 상황을 동부의 세속 왕가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선포된 성전군에 더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세속 군주들의 과민함은 생존 본능에 기인한 것이다.
“동부 연합과 제국이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서부 원정처럼 느슨하고 지지부진한 전쟁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제국은 동부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대륙 전역에 불을 지필 겁니다.”
“그러니 황제를 폐위해야 한다라…….”
“예, 제위는 선출직입니다. 따라서 현 황실에 대한 불만과 정국의 불안은 제위의 이양과 함께 사그라들겠지요.”
“좋아. 그렇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건장하게 황궁을 지키는 황제를 어찌 폐위시키고, 어떻게 새 황제를 추대할 수 있겠나?”
“강대국의 몰락은 언제나 내분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장님.”
* * *
봄바람이 첨탑 아래로 낮게 불었다. 교황은 훌쩍 떠났고, 페르난데스와 그 일행은 별다른 정화 성사나 이단 심사를 받지 않았다. 이것이 다행인 일인지, 키르하스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창틀에 턱을 괴고 투덜거렸다. 멍청이들. 세계의 틈을 넘어 다른 차원에서 대악마를 무찌르고, 물질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신과 악마들을 막아낸 대영웅을, 같은 시대에 살아가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머저리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것이 있다면, 페르난데스가 그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못내 그녀를 열 받게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어째서? 왜 자신의 공이라 말하지 않는가?
그의 업적은 다만 이단심문청 내부의 몇몇 심문관들, 그리고 교회의 고위 간부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다른 만신전 교회와 세속 군주들은 오히려 북부 성전 소요가 그저 음모 가득한 소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억울하단 말인가. 그녀가 본 것만으로 꼽아도 페르난데스는 수십 번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동상과 찰과상, 타박상, 절상과 창상을 모조리 입어 가며 전진했다. 안구가 터져 나가고 살이 짓무르는 것은 예사였다.
성자가 아니었다면, 디모니카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자신의 권능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가혹함 속에서 꿋꿋이 일어선 것이다.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멍청이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그녀는 깃발 펄럭이며 멀어져 가는 교황 일행을 내려 보았다.
“억울하더냐?”
“……은공.”
등 뒤에서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키르하스는 당황하기보다는 체념했다. 디모니카의 예민한 청각에 그녀의 투덜거림이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귀를 축 늘어트렸다.
“예, 은공. 억울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지?”
페르난데스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내성의 넓은 회랑엔 그 둘뿐이었다. 키르하스는 투정 부리듯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며 입술을 삐죽였다.
“은공의 공과 업적이 사토 속에 묻혀 지나가는 것이 억울합니다. 은공 전에 누가 있어 대악마를 처단했단 말입니까. 오직 당신뿐이었습니다! 문명 사회의 모든 군주들이 제 발로 나와 감사를 올려도 모자란 일입니다!”
“내가 공명심을 좇았거든 사제가 되었겠어? 하지만 네 마음이 곱구나. 고맙다.”
페르난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키르하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거친 손이 키르하스의 머리칼 위에 얹어졌다. 키르하스는 날선 눈을 내리깔며 제 풀에 그르렁거렸다.
“날이 좋구나. 잠시 걷자.”
“예, 은공.”
앞서 걷는 페르난데스의 등을 보며 키르하스는 귀를 늘어트린 채로 터덜터덜 걸었다. 회랑의 열린 창을 통해 봄철 바람이 불어, 그녀의 귀밑머리를 스쳤다. 어디선가는 따듯한 꽃 내음이 났다.
“우리에겐 이유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해?”
“예.”
“정말 그랬지. 그때 네겐 복수심뿐이었고, 내겐 그런 널 이용해 더 많은 악마를, 또 다른 전투를 벌일 생각뿐이었어.”
페르난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이용한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대황야에서 느꼈던 것처럼.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그저 기물로 사용하려 거뒀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슬프게 할 수는 없었다. 기물이면 어떠한가. 자신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는 것 하나가 그녀에겐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함께 걸어 나가고, 같은 길을 바라보는 순간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하지도, 바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은공?”
“이제 내겐 이유와 목적이 같은 무게로 보인다. 키르하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것인가. 이런 계산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더구나.”
문득, 페르난데스가 창가 앞에서 멈춰 섰다. 어디선가 날아온 하얀 씨앗이 그의 손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손을 휘젓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스파인 산맥은 농담으로라도 평탄한 곳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험준한 산맥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짐승은 생육한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곤충이 찌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봄을 맞아 돋아나는 새 잎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풍경과 같이 울렸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그 광경을 내려 보며 말을 골랐다.
이유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페르난데스에게, 그리고 페이자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명제였다. 이 삶을 돌이킬 수 있었던, 그리고 돌이켜야만 했던 명제.
오직 아들의 평온한 삶, 단 하나만을 위해서. 처음엔 그뿐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이제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것들을 느끼고 있다.
그것이 나쁜 것일까. 또는, 이것 또한 베이타서스가 ‘영혼의 사악한 부분’을 떼어내 억지로 조형한 허상일까.
이유가 무엇이었든 달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지 따윈 없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입장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런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선가. ‘너를 다시 이용하겠다.’라고 말하려는 지금 이 순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키르하스를 내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키르하스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응?”
“은공께서 저어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제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 짧은 시간, 거의 본능에 걸친 영역에서 그녀는 페르난데스가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도와주겠어? 달가운 일이 되진 않을 거야.”
“도와 달라 말하지 마십시오, 은공. 항상 하던 것처럼 그저. 하라 하시는 편이 제겐 더 좋습니다.”
키르하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굳센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여서,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수인 호족들의 대족장이 필요한 일이 있다.”
“은공께선 함께 가십니까?”
“물론.”
“둘이서 가는 겁니까?”
“당분간은.”
“더없이 좋군요.”
그렇게 말하며, 키르하스는 깨끗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