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리뷔에의 선제후,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 (1)
리뷔에는 제국 변경 중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적어도 술탄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50년 전쟁이 종식되자, 전선 바로 아래에 있던 전초기지들은 빠르게 쇄락해 갔다.
끝없이 들어오던 지원이 한순간에 멎었다. 전쟁은 막대한 돈을 집어삼키는 사업이고, 그 사업에 발을 담은 상인들은 종전과 함께 길거리로 나앉거나, 리뷔에를 떠났다.
용병 사업, 운송업, 무역업, 야금과 대장, 식자재 중간 유통 등의 모든 종류의 사업에 적색 불이 켜졌다. 전선의 모든 전초기지의 교역로에 해당하던 리뷔에는, 이제 막대한 인구 증가와 그로 인해 발생한 치안 공백에 대한 부채를 더 이상 황금으로 찍어 누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뷔에의 대공 에르브 드 카르벨리에는 활로를 찾아야 했다. 전쟁 사업으로 축재하던 황금기가 끝나고, 이제 남은 것은 화려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계산서뿐이었으니.
“대공, 로랑스가 불타고 있습니다!”
제국은 전쟁에 흐를 피를 최소화하기 위해 용병 사업을 국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 탓에, 종전 이후 임금이 체납된 용병들의 수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고용되지 않은 용병은 산적과 다름이 없다. 즉, 리뷔에의 드넓은 영지엔 지금 적어도 수십 개의 산적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반면 제국군은 이미 지난 일 년간 모두 철군한 상황. 각 선제후들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제국군은 굳이 리뷔에에 체류하며 유지비를 지불하고 싶지 않아 했다.
더군다나, 몇몇 선제후들은 강대한 경쟁자의 몰락을 원하고 있었다.
“……군사. 내게 남은 군사들이 있나. 부관.”
“이시도르 남작의 병력이 아직 체류 중입니다. 모리스 자작과 튀렌 자작 또한…… 기꺼이 전하를 돕겠다 청하고 있습니다.”
공작의 메마른 목소리에 부관이 참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국의 상비 병력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산적과 반군을 진압하는 데에 투사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자신의 병력을 온존시키는 데에 성공한 가신들은 제 영지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 리뷔에에 체류 중이었다.
이들은 아귀들이다. 공작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귀들. 공작의 소집령에 따라 병력을 준동했으니, 이에 대한 유지비 절반은 예법상 공작이 지불해야 했고. 공작에겐 그 모든 병력을 먹여 살릴 자원이 부족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딸. 공작이 죽은 이후에 대공 위를 이을 자손. 이 사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리뷔에의 주권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실패한 전쟁 사업과 몰락한 가문을 자신의 소중한 딸에게 전가시키고 그 자신의 목숨을 도모할 수는 없다. 공작은 이마를 감싸 쥔 채로 말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구나…….”
“전하.”
“사람의 고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니, 우리가 흡혈귀들과 다를 게 무언가? 경. 우리가 어찌 흡혈귀들보다, 저 천한 모기들보다 낫다 할 수 있겠나……?”
부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황실의 지원은 끊겼고, 선제후들은 리뷔에의 몰락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군은, 너무나 심약하다.
전쟁 수행에 자질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재능이 넘치는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금, 영지의 몰락 앞에서 저 나이 든 장군은 그 어느 순간보다 유약해져 있었다.
가망이 없다. 장군과 부관은 오랜 세월 함께했으며, 그 탓에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사이엔 절망이 흘렀다.
그때.
“전하! 전하!!”
-벌컥!
영주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종 하나가 헐떡이고 들어섰다. 시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와 공작의 눈앞에 와락 엎드렸다.
“무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무슨 일이냐?”
“사절이 당도했습니다!!”
“사절이?”
“호족 연합의 사절이…… 대족장이 직접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무어라?!”
공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현 시대, 혼란이 수습되는 틈을 타 성장한 대황야 최강의 군벌이 지금, 리뷔에를 찾았다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공작은 마른세수를 하고 곧장 코트를 걸쳤다.
“앞장서거라!”
환란 와중에 찾아온 뜻밖의 손님이다. 영지를 구원할 호재가 될지, 영지의 몰락에 점화할 도화선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어쨌건, 변수가 없다면 몰락할 영지인바. 대공은 입술을 깨물며 방을 나섰다.
* * *
“제국은 여덟 명의 선제후가 다스리는 일종의 연합체다.”
“은공, 좀 무겁습니다!”
“화려할수록 좋다. 제국 귀족들은 하찮아 보이는 이와 거래를 하지 않아.”
페르난데스는 키르하스에게 장신구를 채우며 말했다. 최대한 실용적이면서, 동시에 화려해야 했다. 선제후를 상대하고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선 허술한 차림새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개중 한 가문이 제위에 오른다면 나머지 일곱 가문은 제국 황궁의 요직을 나누어 차지하지. 명목상의 직책이지만, 권력은 본디 이름에서 나오는 법.”
“지금 저희가 상대할 자는 직위가 어떻게 됩니까?”
“황실 서방 원정군 총사령관.”
-철컥.
“끅!”
페르난데스가 키르하스의 허리에 황금으로 치장된 벨트를 꽉 조이자, 키르하스는 돌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머리를 휘휘 털며 울상을 지었다.
페르난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발치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신발 매듭을 고쳐 묶었다.
“가장 황실에 충성하던 인물이고, 황제가 아끼던 인물이었지만. 서방 원정이 실패한 이상 황실에선 본보기가 필요했지. 서방 원정이 종전된 이후에도 그의 직책은 여전히 원정군 총사령관이다.”
“하지만, 원정군은…….”
“그래. 그의 처지는 실 끊어진 연과 같다. 원정군이 해산된 이 시점에서, 사령관의 책임과 부채는 남아 있으니. 사방에 흩어진 용병들의 전후 채무와 병력 밀집으로 발생하는 치안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실리는 없고 의무만 쌓인 자리다.”
키르하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은공,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선제후를 이용하려거든 차라리 교황의 영향력이 닿는 제국 동부에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권력을 잃고 몰락하는 귀족을 이용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됩니까?”
“교황과 친밀한 대공에게 접촉한다면 동부의 세속 군주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뭇 왕국들의 시선이 집중된 이 시점에서, 성전을 선포했던 베이타서스 교회가 돌연 제국 동부의 선제후와 접촉한다는 것은 자칫 제국의 손을 들어 동부를 정벌하려는 움직임으로 비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전쟁에 목이 마른 지금의 황제라면 반드시 그런 여론을 조성할 것이다. 그 점에서, 동부 선제후들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자, 자세한 것은 회담이 끝난 뒤에 말하자꾸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
“예, 은공. 거래를 하러 온 대족장을 연기하라는 말씀 아니십니까. 제국의 사정에 썩 해박하지 않은.”
키르하스는 맑게 웃었다. 제국의 사정, 그러니까 카르벨리에 대공의 군권 상실을 모르고 있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여군주를 가장하라는 것이 페르난데스의 주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키르하스에게 가장 자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등 뒤에 시립한 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배.”
“예, 대족장!”
-척!
수인 전사가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긴 담뱃대를 건넸다. 키르하스는 우아한 손짓으로 담배를 물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은공.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뭐지?”
“제가 대족장이고, 여기 제 수하들이 저의 가솔들인데. 은공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조언가다.”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대답하자, 키르하스는 짓궂게 웃으며 반문했다.
“제가 준비해 둔 은공의 역할을 따르시겠습니까?”
“……?”
-똑똑.
화려한 접객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제후의 준비가 마무리되었다는 의미였다. 곧, 문이 열리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시종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키르하스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짙은 연기를 후, 하고 내뱉었다. 곧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절그럭,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장신구들이 부딪쳤다.
방 안 유등의 불빛 아래에서 황금이 화려하게 빛났다. 그 위,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부터, 나의 애첩이 되거라. 따르거라.”
-탁.
그녀는 담뱃대를 뒤로 던지며 말했다. 주위에 듣는 귀가 많은 탓에, 페르난데스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등 뒤를 쫓았다.
근엄하고 싸늘한 표정과 정반대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키르하스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치고 있었다.
* * *
에르브 공작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아 회랑으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렸을 때까지도, 공작과 신하들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그의 가신들은 불만과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떨어진 공작의 권위에도 남아 있는 이들은 충신이거나, 또는 간신이었다.
그와 함께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빈 충신들은 직언에 머뭇거림이 없었고, 간신들은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으므로. 공작은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가신들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호족 연맹의 대족장, 키르하스 하트테이커가 입장합니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회랑의 문이 열렸다. 선두엔, 삐딱하게 선 채로 팔짱을 낀 여인이 서 있었다.
가신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족장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감탄과 음심, 그녀의 기세에 눌린 경외, 그녀가 가진 군사력에 대한 경계심. 그러한 감정들이 응접실을 휘감고 돌았다.
차가운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살피던 키르하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대황야의 지배자.”
-저벅.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당황한 시종을 옆으로 밀쳤다. 시종은 어, 하며 밀려났다. 키르하스는 한 발자국 더 내디디며 말했다.
“망령 왕조들의 정복자.”
“카단의 세례를 받은 첫 번째 군주.”
“사냥의 여주인.”
“대황야의 불패자.”
-저벅.
키르하스는 응접실의 가운데에 깔린 붉은 비단을 밟으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자리에 앉은 대공이 당혹감 속에 굳어 있는 모습을 보며, 그의 바로 앞까지 일직선으로.
칼을 휘둘렀을 때 간신히 닿을 정도의 거리에 멈춰 서서, 키르하스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런 호칭이 빠졌지만. 네 하인이 부른 이가 나다. 제국 귀족. 호족 연합의 대족장이 널 만나고자 청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콧수염을 길게 기른 덩치 큰 귀족이 앞으로 나서며 버럭 소리 질렀다. 키르하스는 삐뚜름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안전이지?”
“엇, 어…….”
그 싸늘한 눈에 순간 압도되어 귀족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키르하스는 혀를 쯧 하고 차며 굳어 있는 대공에게 말했다.
“네 하인들의 기백이 부족하군. 이들이 네가 가진 최선은 아니리라 믿는다. 선제후.”
“……다과를 들라.”
에르브 공작은 시종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키르하스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술상 또한 함께 준비하라. 회담의 끝을 보고 들겠다.”
수인 호족들은 친구에겐 술을, 적에겐 차를 내어 준다. 그 풍습을 떠올린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키르하스는 으르렁거리듯 웃으며 성큼 걸어 수인 전사들이 끌고 온 의자에 몸을 기댔다.
“회담을 시작해 보지.”
의자에 몸을 묻고 고혹적인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키르하스가 손을 뻗었다. 수인 전사 하나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에게 담뱃대를 건넸다.